아침에 일기를 쓴다
[나의 실버타운 일기] (3)

일기는 저녁에 쓰는 게 상식인데, 나는 아침에 머릿속으로 씁니다.
저녁에 기록하는 일기는 초등학생 때 방학 숙제를 떠오르게 해서 압박감이 먼저 듭니다. 방학 내내 미루고 미루다가 개학 2, 3일 전에야 몰아서 꾸며대던 일기. 그건 일종의 강요된 반성문이었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지난 한 달 동안의 날씨를 기억해낸다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궁리 끝에 거짓 날씨를 하루는 흐림, 하루는 맑음으로 바꿔가며 메워버렸습니다. 거짓말이 탈 없이 통과된 데 대한 짜릿함과 죄의식이 그때 처음으로 생긴 것 같아요.
어른이 되어서도 저녁에 써야 하는 일기나 가계부는 의무의 독촉장 같아서, 나는 저녁 일기는 평생 쓰지 않았습니다. 저녁은 항상 쫓기듯이 살아온 일과에 지치고 피곤해서 쓸 시간도 없었거니와, 어렸을 때의 거짓 일기 때문인지 일기는 나 자신에 대한 거짓 고백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실버타운에 와선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어제의 일과 오늘 있을 일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봅니다. 생각은 순서나 질서가 없어서 항상 솔직하고 자유롭게 흐르고, 바뀌고 사라집니다.
어제는 어땠더라? 5시쯤 깨어 뒤척이다가 7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10시에 가벼운 운동, 12시에 점심, 오후 4시에 노래 교실, 다시 7시쯤 저녁 식사. 그 뒤에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지루해서 잠이 드는 게 보통이니까 일과를 적는 일기는 그게 다입니다.
하지만 아침엔 가벼운 마음으로 어제 있었던 일들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오늘 하루의 일과도 예상해 봅니다. 그러니까 나의 아침 일기는 어제와 오늘 이틀 치를 한꺼번에 쓰는 셈인데, 어제 있었던 일들은 사실의 기억을 넘어 사실에 얽힌 느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제법 풍성한 이야기들로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언제까지일지는 장담 못 하지만….
※필자(가명)는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나 지금은 한 실버타운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매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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