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나. 대한민국 대통령의 여권번호가 다섯 달 동안이나 전 세계에 노출돼 있었습니다.
대통령뿐만이 아닙니다. 국무총리와 국가안보실장은 물론이고요. 평상시에는 존재와 신원 자체가 국가 기밀로 분류되는 대통령 근접 경호관과 식사를 검수하는 검식관까지 총 168명에 달하는 핵심 인력 신상정보가 공개됐습니다.

최고 권력의 개인정보
엑셀 파일 무너지다
현대 정보전에서 적성국이 노리는 기회는 방화벽을 정면으로 뚫는 것이 아니라, 방화벽 안쪽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문을 열어주는 순간이기도 하는데요.
올해 6월 초 당시 이재명 대통령은 열흘 일정으로 유럽 순방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리는 벨기에 및 EU 정상회담과 EU 본부 방문을 소화하고요. 이탈리아 국빈방문과 교황청 방문, 그리고 프랑스 에비앙에서 개최되는 G7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다자 외교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죠.
여기서 문제가 터집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서울공항을 통해 출국하기 일주일 전인 6월 2일에 말이죠.
해외 유료 악성코드 검사 사이트에 ‘1호기 탑승자 명단’이, 세부적으로는 ‘탑승객 명단(대한민국-벨기에)’이라는 제목의 엑셀 파일 하나가 게시된 겁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 국정 운영 컨트롤타워가 통째로 들어 있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 내외를 필두로, ▲당시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었던 한성숙 현 국무총리 ▲위성락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김용범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조현 외교부 장관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 등 핵심 국무위원과 참모진이 총망라돼 있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청와대 비서실과 외교부 소속 실무 수행원들, 청와대 출입기자단은 물론이고, 절대 외부에 신원이 노출돼서는 안 되는 특수 인력들까지 명단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는 대통령경호처 소속 근접 경호관들, 대통령 부부가 먹는 음식을 미리 확인해 독극물이나 이상 여부를 점검하는 검식관, 대통령 주치의와 의무실장을 포함한 의료진까지. 심지어 대통령 내외 의상과 머리, 화장을 전담하는 수행원들까지 모두 합쳐 168명이었습니다.
아-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라는 정도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인데요. 탑승자 168명 전원의 국문 및 영문 이름, 소속과 직책, 생년월일, 여권번호, 그리고 여권 발급일과 만료일까지 이른바 고유식별정보가 적혀 있었습니다.
게다가 외부 감청 등에 대비해 대통령 순방 행사에 극비리에 부여하는 세 글자 코드명까지 함께 기재돼 있었죠.
더 큰 문제는 해당 파일이 6월 2일에 올라온 뒤 언론 취재가 시작된 11월 2일까지 약 5개월 동안 아무런 제지 없이 방치돼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정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그사이 이재명 대통령은 벨기에 순방을 포함해 다섯 차례나 유출된 여권번호를 그대로 사용한 채 해외 순방을 다녀왔습니다.

악성코드를 잡으려다
벌어진 건 아닐까
그렇다면 왜, 누가 기밀 파일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을까. 그리고 어떻게 지난 5개월간 몰랐을까.
해커가 훔친 자료라면 암시장에서 몰래 팔아넘기지,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 사이트에 올릴 리가 없을 텐데요.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해킹’이 아닌 ‘유출’로 추정됩니다.
기밀 파일이 올라간 플랫폼은, 구글 산하 자회사가 운영하는 유료 악성코드 검사 플랫폼 ‘바이러스토털(VirusTotal)’입니다. 바이러스토털은 컴퓨터에 별도의 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하지 않고도 의심스러운 파일이나 인터넷 주소(URL)를 업로드하면 악성코드 감염 여부를 판별해 주는 편리한 서비스입니다. 이 때문에 전 세계 기업과 기관 보안 담당자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고 있죠.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집단지성 방식이기 때문인데요.
누군가 바이러스토털에 파일을 올려 검사를 돌리면, 그 파일과 검사 결과는 전 세계 백신 업체와 유료 회원들에게 실시간으로 투명하게 공유됩니다. 전 세계 보안 전문가들이 새로운 변종 악성코드를 연구하거나 백신을 개발할 수 있도록 자료를 오픈하는 구조인 거죠.
가입비를 내는 유료 회원이나 백신 업체라면 아무런 제약 없이 올라온 파일을 열람하고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이러스토털에서도 첫 화면에 “데이터를 올리면 공유될 수 있으니, 개인정보는 올리지 말라”는 경고 문구를 명시해 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보안 담당자들이 이 작동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경고 문구를 간과한 채, 내부 기밀문서가 악성코드에 감염됐는지 확인하려고 무심코 파일을 올렸다가 대형 유출 사고를 치는 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실제로 2017년에도 국내 언론에 ‘악성코드 잡으려다 기업 기밀 줄줄’이라는 보도가 나왔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2024년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직원 3,000여 명의 PC 보안 점검 결과 등이 담긴 정보가 이 사이트에 며칠간 노출돼 있다가 뒤늦게 삭제되는 소동까지 벌어졌죠.
이에, 이번 사태 역시 외부 해커의 소행인 ‘해킹’이 아니라, 순방 명단을 다룬 누군가가 검사를 목적으로 올렸거나 시스템상 빠져나간 ‘유출’ 가능성이 큰데요.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중앙일보>를 통해 “악의를 가지고 내부 정보를 탈취한 해커가 이를 전 세계 공유 플랫폼에 올렸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해킹보다는 내부 관계자의 보안 인식 부족이나 업무상 실수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박두순 외교부 대변인 역시 브리핑에서 “현재까지는 유출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죠.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어떤 경로로 이 파일을 바이러스토털에 올린 걸까요.
① 첫 번째는 국내 내부 관계자의 업무상 과실 가능성입니다.
노출된 엑셀 파일의 상세 정보, 즉 저자 항목을 뜯어보니 외교부 영문 약칭인 ‘mofa’가 명기돼 있었습니다. 외교부에서 작성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서인데요.
더군다나 대통령 해외 순방을 총괄하며 1호기 탑승 명단을 관리하는 실무 부서가 외교부 의전장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내부망 PC에 있던 파일을 이동식 저장장치 등을 이용해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PC로 옮긴 뒤, 악성코드 감염 여부를 확인하려다 유출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아니라면 다른 곳에서 유출됐을 수 있습니다.
탑승자 개인정보를 채우고 공군 1호기 이착륙 절차 등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안보실, 대통령경호처, 국가정보원, 공군, 재외공관, 그리고 공군 1호기 운영사인 대한항공까지 다양한 기관 실무자들에게 공유되는데요. 여러 공유 지점 중 한 곳에서 실수가 벌어졌을 수 있죠.
② 두 번째는 유럽 현지, 즉 순방 상대국 전달 과정에서의 유출 시나리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동아일보> <SBS>가 단독 보도했는데요. 해당 파일은 지난 6월 1일 외교부 의전장실에서 내부망 등을 통해 주벨기에 유럽연합 대사관으로 전달됐고, 이후 브뤼셀 공항 입국 수속 절차를 위해 인터넷망을 거쳐 벨기에 외교부 측에 전달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하루 뒤인 6월 2일에 바이러스토털에 파일이 올라온 겁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단서가 있는데요. 유출된 일부 파일 작성자명에 벨기에식 이름(추정)인 ‘Bruno’가 표시돼 있었다는 점입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한 외교 소식통은 “파일에 악성코드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업로드한다면, 파일을 제작한 우리 쪽보다는 받아서 확인하는 상대국 쪽에서 업로드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겠느냐”고 짚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메일 등으로 파일을 전달받은 벨기에 현지 관계자가 열람 전 바이러스토털에 올려 안전성을 검사했을 수 있다는 추론입니다.

사전 인지 해명 논란과
보안 참사 지적
가장 먼저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청와대와 외교부의 엇갈린 태도와 ‘5개월간의 공백’입니다.
사건이 처음 보도된 2일, 청와대는 “보도 내용에 대해 사전 인지 후 대응 조치를 취했으며, 앞으로 외교부 등에서 추가 조치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언론이 보도하기 훨씬 전부터 문제를 파악하고 조치를 취한 것처럼 읽힐 수 있는 대목인데요.
하지만 주무 부처인 외교부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 직전인 2일 저녁에야 제보를 통해 유출 사실을 처음 인지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더군다나 만약 청와대가 정말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면 왜 5개월 동안이나 파일이 사이트에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왜 대통령은 유출된 여권번호로 다섯 번이나 해외 순방을 다녀왔느냐는 반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요.
<한겨레>는 외교부 관계자가 전날 저녁 유출 사실을 인지하고 수사를 의뢰했다고 밝힌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중앙일보>는 “청와대와 외교부가 유출 사실을 최초로 인지한 시점은 사실상 언론 보도 직전이었던 것으로 파악됐다”고 전했고요.
어쨌든 대통령 안위와 직결된 순방 보안 체계를 총괄 감독해야 할 컨트롤타워에 보안 구멍이 생긴 건 확실한데요.
3일 청와대는 순방 보안 관리 체계를 전면 점검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외교부 역시 피해 인원 168명 전원에 대한 여권 재발급 절차에 착수했고요. 이재명 대통령 내외의 여권 교체는 3일 당일 완료했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국민의힘은 이재명 대통령이 과거 민간 기업의 정보 유출 사고 때 쏟아냈던 강경 발언들을 그대로 소환하며 비판했습니다.
지난해 12월 정부 업무보고 당시, 이재명 대통령은 쿠팡 등 민간 기업들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강하게 질타한 바 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기업들이 개인정보 유출에 안이한 것 같다며 “국민에게 피해를 주면 엄청난 경제 제재를 당하고 잘못하면 회사가 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한다”고 말하죠. 그러면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 “집단소송제 도입”까지 직접 거론했습니다.
<조선일보> 사설에서는 대통령 발언이 있고 난 뒤에 “실제 기업들은 CEO 사퇴와 총수의 대국민 사과는 물론 과징금 폭탄을 맞았다”고 꼬집었는데요.
이를 두고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고 당시 이재명 대통령은 ‘회사가 망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망할 차례인가”라고 비판했습니다.
한편, 주요 언론사들 역시 사설을 통해 정부의 보안 불감증을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세계일보>는 “국가 최고지도자의 신변 안전과 직결된 정보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정부의 보안 관리 실태가 한심할 따름”이라고, <경향신문>은 “관계 당국은 그동안 뭐 하고 있었다는 건가”, <한겨레>는 “국가기관들의 해이해진 보안 기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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