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비디아가 차세대 인공지능(AI) 칩 ‘베라 루빈(Vera Rubin)’으로의 전환을 가속화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6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4)를 둘러싼 글로벌 메모리 업체 간 경쟁이 본격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엔비디아 공급망의 핵심 축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점유율 경쟁이 새로운 분수령을 맞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美 수출 승인 지연에 엔비디아 '루빈' 집중
7일 외신 보도와 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일부 H200 칩 생산을 줄이고 관련 파운드리 생산능력을 차세대 아키텍처인 ‘베라 루빈’ 기반 칩 생산 준비에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대만 TSMC에서 확보한 생산능력 일부를 기존 제품 대신 차세대 칩에 배분하는 방식이다. 미국 정부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승인 절차가 예상보다 장기화하면서 H200 출하 일정이 지연되고 있는 점이 배경으로 거론된다.
실제 콜렛 크레스 엔비디아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지난달 25일(현지시간)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미국 정부가 일부 H200 제품의 수출을 승인했지만 현재까지 관련 매출은 발생하지 않았다”면서 “앞으로 추가 수출 승인이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현재 약 25만개 수준의 H200 칩이 생산된 뒤 재고로 쌓여 있는 것으로 업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H200은 엔비디아의 기존 AI 가속기 ‘호퍼(Hopper)’ 아키텍처 기반 제품으로 미국의 수출 규제를 충족하도록 설계된 모델이다. 반면 베라 루빈은 엔비디아가 올해 초 공개한 차세대 칩 아키텍처로, 더욱 복잡한 AI 연산을 처리하기 위한 차세대 데이터센터용 플랫폼으로 개발되고 있다. 오픈AI와 구글 등 주요 빅테크 기업들이 차세대 AI 인프라 구축 경쟁에 나서면서 관련 수요도 빠르게 확대되는 분위기다.

당초 업계에서는 H200 수요가 올해 상반기까지 견조하게 이어진 뒤 하반기부터 베라 루빈 기반 차세대 칩이 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첨단 반도체를 전략 자산으로 규정하고 대중국 수출 통제를 지속 강화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H200 역시 개별 수출 허가와 최종 사용처 검증 등 까다로운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출하가 지연되면서 상당량의 재고가 쌓인 것으로 전해진다.
엔비디아가 차세대 제품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HBM4 공급을 둘러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공급 경쟁도 더욱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H200에는 5세대 제품인 HBM3E가 탑재되는 반면 차세대 베라 루빈에는 6세대인 HBM4가 탑재된다.
HBM4 조기 개막… 삼성·SK, '역전'과 '수성' 기로
현재 시장에서는 엔비디아와 공고한 협력 관계를 맺어온 SK하이닉스의 점유율이 높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난해 말 시장조사업체인 카운터포인트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HBM4 시장 점유율은 SK하이닉스 54%, 삼성전자 28%, 마이크론 18%로 예상됐다. 그러나 마이크론의 성능이 양사 대비 크게 뒤처지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루빈의 초기 공급 물량 상당 부분은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 배정될 가능성이 높아진 상태다. 일각에서는 엔비디아향 HBM4 물량의 최대 70%가 SK하이닉스에 배정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삼성전자는 HBM3E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차세대 제품 개발과 양산 준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 1c 나노급 D램 기반 HBM4 양산을 추진하며 ‘세계 최초 양산’ 타이틀을 확보한 상태다. 삼성전자는 메모리와 파운드리 공정을 모두 보유한 강점을 앞세워 로직 다이 제작부터 패키징까지 일괄 처리하는 ‘턴키(Turn-key) 솔루션’을 강조하고 있다.
엔비디아 역시 특정 업체 의존도를 낮추고 공급망을 다변화하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삼성의 조기 공급 능력은 향후 물량 배분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SK하이닉스도 차세대 HBM 시장 주도권 방어에 나섰다. 회사는 HBM4 개발을 완료하고 주요 고객사에 샘플을 공급한 상태다. 현재 루빈에 탑재하기 위한 최종 검증 단계가 진행 중이며 연내 양산이 예상된다. 파운드리 업체 TSMC와 협력해 루빈 아키텍처에 최적화된 맞춤형 HBM4 개발에 주력하며 기존 공급 우위를 유지한다는 전략이다.
특히 이달 16일부터 19일(현지시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열리는 ‘엔비디아 GTC 2026’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직접 참석할 예정이어서 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 회장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차세대 HBM 공급 전략 등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이를 SK하이닉스의 ‘퍼스트 벤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행보로 보고 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엔비디아는 공급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언제든 물량 배분을 조정할 수 있다”며 “HBM4에서 누가 먼저 수율과 공급 안정성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시장 점유율 구도도 빠르게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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