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는 '아르헨티나 박세리'였다...'정치·경제 파탄' 위로한 월드컵 우승
아르헨티나 축구대표팀이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36년 만에 극적인 우승을 일궈내자 아르헨티나 전역이 환희와 감동으로 들끓고 있다. 오랜 경제 위기에 고통받고 있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진통제라도 맞은 듯 시름을 잊고 마음껏 울고 웃었다. 월드컵 우승 트로피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게 하는 ‘희망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8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부 오벨리스크 일대는 축구대표팀을 상징하는 하늘색과 흰색 물결로 출렁거렸다. 아르헨티나가 연장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 끝에 디펜딩 챔피언 프랑스를 꺾고 우승을 확정하자 수백만 인파가 거리와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남녀노소 모두가 ‘국민 영웅’ 리오넬 메시를 연호하면서 축제를 즐겼다. ‘축구 전설’ 디에고 마라도나의 얼굴이 새겨진 대형 현수막도 펄럭였다.
어린 아들과 오벨리스크 광장에 나온 한 축구팬은 “마치 천국에 있는 것 같다”며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영국 가디언에 말했다. 인근 술집에서 경기를 관람한 다른 축구팬도 “아르헨티나가 처한 상황에 엄청난 안도감을 준다”며 눈물을 흘렸다. 단순한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가슴에 응어리진 한이 풀리는 해방감에 가까웠다.
아르헨티나인들은 절망감과 패배감에 젖어 있었다.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을 정도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고 있는 부실한 경제는 코로나19 봉쇄와 글로벌 경기 위축 탓에 30년 사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기 대비 92.4% 상승했고, 올해 물가상승률은 100%를 넘길 것으로 전망됐다. 기준금리는 무려 75%에 달한다. 암시장에서 페소화 가치는 3년 전과 비교해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서민 경제는 진작에 파탄 났다. 올 초 실업률이 7% 수준까지 떨어졌지만, 고물가와 통화가치 하락으로 직업을 갖고도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인구가 28%로 집계됐다. 전체 인구의 40%가 빈곤선 아래 삶을 살고 있고, 매일 2,800명이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 최대 육류 수출국임에도 지난해에는 국민 1인당 소고기 소비량(47.8㎏)이 1920년대 이후 100년 만에 가장 적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비롯한 대도시에는 노숙자도 급증했다.
정치는 더 혼란스럽다. 올해 7월 한 달간 경제장관이 두 번이나 바뀌었고, 이달 초에는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부통령이 뇌물수수혐의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정치 분열은 경제를 더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
아르헨티나 국민에게는 희망이 절실했다. 그래서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굴욕적 패배를 당하고도 16강, 8강, 4강 문턱을 넘어 결승에 진출한 축구대표팀에 고단한 현실을 투영했다. IMF 시절 한국인들이 골프선수 박세리를 응원하며 힘을 얻었듯, 아르헨티나도 월드컵 우승을 염원하며 하나로 똘똘 뭉쳤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비록 월드컵 우승이 아르헨티나가 겪고 있는 경제 위기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희망과 자부심을 재발견하게 했다”고 평했다.
2023년은 아르헨티나에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지지부진했던 남미공동시장(Mercosurㆍ메르코수르)과 유럽연합(EU) 간 자유무역협정 비준을 앞두고 있고, 전기차 배터리 소재인 리튬 생산국으로서 칠레, 볼리비아와 함께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비슷한 ‘자원 동맹’ 결성을 추진 중이다. 10월에는 총선도 치른다. 한 축구팬은 “월드컵 승리가 아르헨티나에 절실히 필요한 정치ㆍ경제 개혁의 전조가 될 수 있지 않겠냐”고 기대했다.
공교롭게도 아르헨티나는 인플레이션율이 100%를 넘은 해에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1978년 첫 우승 당시엔 연평균 인플레이션율이 176%였고, 1986년 두 번째 우승컵을 품었을 때는 116%를 기록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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