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배상하라”… ‘사법 의학’이 필수의료 기피 불러
전국 응급실을 총괄하는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응급의료센터는 지난 9월 ‘순환 당직 응급 수술’ 대상 질환으로 복막염을 추가 지정했다. 외과 의사의 ‘기본적 수술’로 통하던 복막염을 수술할 의사가 없어 치료 병원을 전국 단위로 넓히겠다는 것이다. 외과 의사라도 유방·갑상선처럼 본인의 세부 전공 분야만 진료하려는 분위기가 최근 부쩍 심해졌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이 이유로 지난해 법원 판결을 자주 거론했다. 서울고법은 작년 10월, 장이 꼬여 구토를 하던 생후 5일 된 신생아를 응급 수술한 외과 의사 등에게 “환자에게 10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당시 이 병원엔 소아 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소아외과 의사가 없었다. 소아외과 전문의는 전국에 50여 명밖에 없다. 시간을 지체하면 아기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어 외과 의사는 응급 수술을 했다. 하지만 이 의사는 장 꼬임이 있는 아기는 맹장이 일반인과 다른 곳에 있고, 이를 재배치해야 한다는 걸 모르고 수술을 끝냈다. 결국 아기는 심한 장기 손상을 입고 인지 저하가 왔다. 부모들은 “소아외과 의사가 아닌 외과 의사가 수술을 했다”며 거액의 소송을 냈고 법원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는 결국 의사들이 세부 전공에 맞는 일부 환자만 받게 만들어, 응급 환자가 병원을 찾다 숨지는 ‘응급실 뺑뺑이’를 심화한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법원 판결은 ‘방어 진료’ ‘필수과 기피’를 부르는 대표적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필수과 의사들은 부정적 뉘앙스를 담아 이를 ‘사법(司法) 의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원 판결은 응급실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법원은 작년 말 흉통을 호소하며 응급실에 온 환자의 대동맥 박리(대동맥 안쪽 혈관 손상) 질환을 발견하지 못한 혐의(업무상과실치상)로 재판에 넘겨진 응급실 의사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사고 당시인 2014년 이 의사는 전공의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레지던트 1년 차였다. 작년엔 환자의 폐암 징후를 조기 발견 못 했다고 응급실 의사와 병원에 17억원 배상을 선고한 판결도 나왔다.
소아과도 직격탄을 맞았다. 부산지법은 올 1월 생후 45일 아기에게 설소대(혀와 구강 연결 부위) 수술을 한 소아과 의사에게 13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수술 후 지혈 등을 의사가 하지 않고 간호조무사에게 맡기는 과정에서 아기가 장애를 얻게 됐다는 이유였다. 응급의학과와 소아과 의사들은 “소송이 겁나서 적극적인 치료를 점점 못 한다”고 했다.
산과도 마찬가지다. 수원지법 평택지원은 작년 5월 출산 예정일을 하루 앞두고 진통으로 병원을 찾은 임신부가 “태동이 약하다”고 말했는데도, 의사가 1시간 40분 뒤에야 태아 상태를 검사해 아기가 뇌성마비를 앓게 됐다며 12억원을 물어주라고 선고했다. 산과 의사들은 “아기 한 명 받아서 10만원 벌다가, 소송 걸리면 10억원을 배상해야 한다”며 “법원 판결이 산과 기피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했다.
실제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작년 산부인과 레지던트 4년 차 등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는데, 이 중 47%는 ‘분만을 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의료 사고 발생 우려’(79%)였다.
법조계에서도 “법원이 의사의 업무상 과실을 너무 엄격하게 본다”는 지적이 있다. 법원 출신 변호사는 “보통 과실범은 본인이 문제를 일으키지만, 의사는 이미 발생한 문제를 해결한다”며 “해외 주요국이 고의가 없는 의사의 과실 책임을 거의 묻지 않는 것도 이런 특수성 때문”이라고 했다.
☞사법 의학
현실과 동떨어진 과도한 법원 판결이 의료 현장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의료계 은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의 병원 진찰료 심사 기준이 불합리하다는 뜻의 의료계 은어인 ‘심평 의학’에서 따온 신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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