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손자 데이빗은 마운틴듀를 달라는 할머니(윤여정) 요청이 못마땅했다. 한국에 살던 할머니가 도미해 자기 집에 온 이후부터 모든 것이 나빠진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트레일러 하우스는 더욱 비좁아졌고, 엄마(한예리) 아빠(스티븐 연)의 관계는 악화했다. 심지어 할머니는 요리도 못하고, 자신과 누나에게 화투를 가르치며 걸쭉한 욕설까지 섞었다.
할머니가 TV 방송에 정신이 팔린 새 데이빗이 그릇에 자기 소변을 담아 건넨 이유다. ‘미나리’(2020)는 이처럼 조모를 편하게 느끼지 못하는 한국계 미국인 손자의 감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작품이다. 손자가 그토록 자기 혈육을 불편해했던 원인, 그리고 할머니를 향한 마음이 서서히 변해가는 과정을 담는다. 이민자의 경험담을 담은 이 영화는 왜 이민자가 아닌 관객들을 감동하게 할까.
아메리칸드림, 실현은 쉽지 않았다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카메라는 데이빗 가족의 이사 날을 비춘다. 새집은 트레일러 하우스다. 거주지를 고른 것은 아빠 제이콥이다. 부부는 지난 10년간 병아리 감별사로 살았으나 제이콥은 그런 식으로는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실제 부부의 삶은 10년 전 미국으로 넘어오기 전에 비해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는 주거 비용을 줄여서라도 승부를 봐야 할 때라고 본 것이다.
제이콥의 아내 모니카가 이 결정을 마음에 들어 할 리 없었다. 모니카는 가족이 서로 지지해주며 기존처럼 성실하게 일하면 속도는 느려도 언젠가 삶이 개선될 것이라고 봤다. 부부는 이사 첫날부터 대판 싸우고, 아이들은 부모의 눈치를 본다. 새 동네에 정착하기도 전에 무너져내릴 듯 이들의 삶은 위태롭다.
짓궂은 장난에도 그저 ‘허허’ 웃어 보인 할머니
남편은 농사일을 시작하지만 물을 대는 것부터 난관이다. 점점 악화하는 가정 형편에 아내는 남편을 더욱 원망하고, 남편은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아내를 향한 불만을 키워간다. 아내 모니카의 엄마가 등장하는 시점이 바로 이때다. 모니카는 10년 만에 만난 친정엄마의 존재만으로 큰 위로를 받고, 부부간의 갈등도 다소 누그러진다.
그러나 어른들이 괜찮아졌다고, 아이들의 삶까지 좋아지라는 법은 없다. 손주들은 처음 보는 할머니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 때문에 할머니는 못 알아듣는 영어로 “냄새난다” “싫다”는 등의 불호를 내비치다 아빠에게 혼나기도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손주들이 버릇없게 군다고 외면하지 않는다. 서두에 언급한 짓궂은 장난에도 그저 ‘허허’ 웃을 뿐이다. 손주들은 이와 같은 할머니에게 점차 친근감을 느끼고, 덕분에 가정도 전보다 바르게 선다.
한국서 충분히 잘 살던 할머니는 왜 미국에 왔을까
여러 정황을 봤을 때 아마도 한국에서 할머니는 충분히 잘살고 있었던 것 같다. 딸에게 두툼한 돈 봉투를 건네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 굳이 미국으로 온 것은 그저 딸의 SOS 때문이다. 딸과 손주, 그리고 사위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할머니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식구들의 안녕이었지 어떤 보상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자기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별다른 의미가 없는 미국행을 결심할 수 있었다.
(*강력한 스포일러를 포함한 단락. 원치 않으면 다음 단락으로)
그러나 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상황은 급반전된다. 든든한 기둥이던 할머니가 어느새 다른 구성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짐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할머니는 뇌졸중 이후 마비 증상에도 집안일을 거들고, 이것이 더 큰 사고로 이어진다. 사위가 애써 재배한 농작물을 화재로 다 태워버린 것이다. 급기야 자신을 무가치하게 느끼게 된 할머니는 자살을 결심하고, 앞서 할머니를 미워했던 손자가 할머니의 발길을 돌리면서 가족의 화합이 이뤄진다는 게 이 영화의 결말이다.
삶에는 ‘쓸모’ 외에도 중요한 게 있다
‘미나리’는 배우 윤여정의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비롯해 다수의 트로피를 안았다. 이민자나 소수 인종에게서만 지지받는 걸 넘어섰다. 백인 미국인을 포함한 다양한 관객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건 이 영화에서 감독이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담담하게 그려낸 사랑이 보편적 감동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감독은 서사 전체를 통해 ‘쓸모’에 관해서 질문한다. 병아리 감별사인 부모는 수컷 병아리는 가차 없이 폐기한다. 맛도 없고 알도 낳지 못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부부는 직업적으로는 쓸모를 기준으로 무언가를 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미국 사회에서는 병아리와 같이 위태로운 지위에 있었다. 유용성이 없다고 생각되면 바로 폐기하는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두 사람은 언제 버려질지 몰라 헤매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과 자녀들의 삶을 지켜주러 온 것이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자기 삶에 이들이 유용성을 더해줄 것이라는 기대 없이 가족을 보살핀다.
그러던 할머니가 자신을 ‘쓸모없다’고 여기게 되니, 손자가 손을 잡는다.
유용성에 따라 세상의 외면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든 품을 수 있는 불안이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개인화하고 파편화한 세상이기에 더 그렇다. 서로 존재 그 자체로 인정할 수 있게 된 이 이민자 가정의 이야기는 그래서 보편적 감동을 준다.
누군가의 추억 서랍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을 주는 작품이다. 따뜻한 햇빛이 공간 구석구석을 비추고, 음악도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아주 힘들었던 시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만으로 아름답게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통해 자기 머릿속 서랍을 다시 열어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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