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취향은 단순하다. 오직 최고만 추구한다.”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말인데, 포르쉐 911 터보 S를 정의하기 딱 좋은 표현이다. 최강의 파워와 최고의 장비 갖춘 ‘끝판 왕’인 까닭이다. 욕망 자극할 결핍이 없어 역설적으로 따분할 수 있는데, 그럴 땐 한 번씩 급가속을 하면 된다. 시공간의 왜곡으로 착각할 만큼 강렬한 경험이 기다린다.
글 김기범 편집장(ceo@roadtest.kr)
사진 서동현 기자(dhseo1208@gmail.com)
운전의 본질 탐구한지 75년째

8단, 시속 100㎞. 이때 수평대향 6기통 3.8L 가솔린 트윈터보 엔진은 1,200rpm으로 잔잔히 회전하는데, 창밖 풍경에 심취하다 보면 911 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기 쉽다. 911은 역사와 패키징 측면에서 독보적인 스포츠카다. 그런데 매일 타는 이동수단으로 대하고 다룰 땐 기대 이상 편안하다. 포르쉐가 911을 ‘그랜드 투어러(GT)’로 정의하는 이유다.
실제로 포르쉐는 매번 911을 개발할 때 도로에서 마주칠 거의 모든 지형과 시설물을 소화하는데 문제없는지 살핀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인근 바이작의 포르쉐 연구개발센터 내 트랙이 방증(傍證)이다. 다양한 곡률과 기울기의 국도와 고속도로, 도로시설물을 집약했다. 여기에서 섀시 엔지니어들이 프로토타입을 담금질하는데, 운전 실력이 직업 레이서 뺨친다.

911은 스포츠카 회사로서 포르쉐의 기틀을 다진 주역이다. 페라리가 스포츠카 팔아 번 돈으로 F1팀을 운영한다면, 포르쉐는 SUV로 움켜쥔 돈다발로 911을 다듬어 왔다. 영업이익률은 자동차 업계 최고 수준이다. 911 한 시리즈로 스페셜 에디션 제외하고도 27차종이나 만들어 판다. 닫은 지갑도 활짝 열게 만드는 옵션 운영은 업계의 벤치마킹 대상이다.
포르쉐 911 매력의 핵심은 단연 운전감각이다. 드라이버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만들고, 뿌듯한 성취감에 젖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911은 기본형으로 수렴할수록 오히려 호기심과 도전정신을 자극한다. 가령 수동 7단 변속기는 당최 방심할 짬을 주지 않는다. 고속도로에 진입해 가속 붙여갈 때 잠시만 게으름 피우면 곧장 연료차단의 불벼락을 맞기 일쑤다.

7단 수동 변속기는 손도 바쁠뿐더러 종종 지금 물려 놓은 기어가 몇 단인지 헷갈리기도 쉽다. 특히 서로 바짝 붙은 3과 5, 7단이 그렇다. 게다가 뒷바퀴 굴림 911은 코너에서 앞바퀴의 접지력 변화를 유독 손끝으로 생생히 느낄 수 있어 수시로 심장이 쫄깃해진다. 911의 시작점인 카레라 몰 때는 가진 출력을 남김없이 긁어 쓰고 싶은 강박에 시달린다.
911의 상징적·실질적인 꼭짓점

하지만 911 터보 S라면 이 모든 과정이 부질없어진다. 911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강의 파워와 최고의 장비, 구성을 거머쥔 꼭짓점인 까닭이다. 포르쉐 911 터보의 시작은 197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IAA)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르쉐가 부스 중앙의 무대에 올린 은색 쿠페는 911 카레라 RS 3.0을 쏙 빼닮았다. 차이는 꽁무니의 ‘터보’ 엠블럼이었다.
이듬해 10월, 파리 모터쇼에서 911 터보가 데뷔했다. 당시 광고 카피는 이랬다. ‘특별하고, 폭발적이며 값비싼(Exclusive, Explosive, Expensive).’ 이번에 탄 911 터보 S는 개발명 992의 8세대다. 터보 S를 포함한 911 터보는 반세기 진화를 거치며 최고출력이 260→662마력으로 수직상승했고, 0→시속 100㎞ 가속 시간은 5.5→2.7초로 반 토막 났다.


과거의 포르쉐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지금의 911은 놀랍도록 큰 차다. 반면 처음이라면 연예인 실물로 볼 때처럼 ‘예상보다 아담하다’고 느낄 수 있다. 포르쉐 터보 엔진의 역사를 꿰고 있다면, 911 터보의 뿌리가 서슬 퍼런 경주차란 사실을 모를 수 없다. 하지만 배경을 모르는 이에게 911 터보 S는 강력하면서도 호화롭고, 막연한 걱정보단 훨씬 편안한 GT다.
디자인에 대한 호불호를 논하기에 911의 스타일은 너무도 전형적이다. 1~8세대의 윤곽이 오롯이 겹치는 차종은 흔치 않다. 왕방울 같은 눈을 동그마니 뜨고 선 모습만 봐선 꽁무니 깊숙이 감춘 폭력성을 예상하기 어렵다. 리모컨 키를 쓰는데, 시동 거는 방식은 열쇠 시절과 같다. 운전대 왼쪽 레버를 오른쪽으로 비틀어 건다. 르망 경주에서 비롯된 전통이다.


누군가 그랬다. “최고의 911은 최신의 911”이라고. 8세대 911의 실내는 디지털 물결로 넘실댄다. 정보의 폭과 깊이도 굉장해 타이어 온도(윈터 타이어 장착 시 제외)까지 띄울 수 있다. 앙증맞은 뒷좌석도 있다. 국내에선 공식적으로 쓸 수 없지만, 간단한 짐이나 반려동물 태우기 좋다. “실용성을 결코 포기 않겠다”는 페리 포르쉐의 고집이 낳은 흔적기관이다.
포르쉐 최신 기술, 전자장비 모듬


911 터보 S의 엔진엔 피에조 인젝터와 터보차저 두 개를 물렸다. 터빈은 실시간으로 날개 각도를 바꾸고, 압축기와 반대로 회전한다. 터빈과 압축기 휠의 직경도 각각 55, 61㎜로 이전보다 키웠다. 웨이스트게이트 플랩은 스테퍼 모터로 전기 제어하고, 부스트 압력 제어도 더 빠르고 정확해졌다. 압축한 공기는 이전보다 14% 큰 두 개의 인터쿨러로 식힌다.
강제 흡기 기능도 갖췄다. 이전엔 좌우 옆구리 구멍을 통해 인터쿨러를 식혔다. 이젠 지붕을 타고 내려온 공기가 뒷날개 바로 앞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그 역할을 한다. 대신 좌우 흡기구가 엔진으로 보낼 공기를 들이킨다. 총 4개 흡기구의 단면적을 키우고 저항을 낮춘 결과 ‘가솔린 미립자 필터(GPF)’로 숨통 꽁꽁 틀어막고도 662마력을 콸콸 토해낸다.


변속기는 8단 포르쉐 듀얼(더블) 클러치(PDK)로, 0.001초 만에 변속한다. 포르쉐 911 터보 S는 0→시속 200㎞ 가속을 8.9초에 마치고, 시속 330㎞까지 가속을 이어간다. 유럽 기준 공차 중량(DIN)은 1,650㎏. 이전보다 덩치를 살짝 키우되 인산철리튬(LiFePO4) 배터리와 경량 소음방지 유리, 경량 앞뒤 스포일러 등으로 무게 증가를 최소화한 덕분이다.
전자장비도 구색별로 빠짐없이 갖췄다. 가령 ‘포르쉐 액티브 서스펜션 매니지먼트(PSAM)’가 각 휠의 댐핑 강도를 제어하고, ‘포르쉐 트랙션 매니지먼트(PTM)’와 ‘포르쉐 스태빌리티 매지니먼트(PSM)’는 접지력을 챙긴다. 코너에선 ‘포르쉐 토크 벡터링 플러스(PTV Plus)’와 ‘리어 액슬 스티어링’이 모난 라인은 뭉개고 흐릿한 궤적은 뾰족이 다듬어준다.

아직 하나 더 남았다. ‘포르쉐 다이내믹 섀시 컨트롤(PDCC)’은 앞뒤 토크 배분 등을 통해 코너링 때 차체 옆면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고르지 않은 노면에서 승차감까지 챙긴다. 빨리 달리는 만큼 제동력도 최강이다. 포르쉐 세라믹 컴포지트 브레이크(PCCB)가 기본으로, 앞뒤 직경이 각각 420, 390㎜다. 게다가 앞 로터는 무려 10피스톤 캘리퍼로 깨문다.
강해서 되레 느긋할 수 있는 역설

그런데 정작 운전할 땐 이름조차 헷갈리는 장비들을 의식조차 하기 어렵다. 진보한 기술일수록 존재를 낮춰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까닭이다. 또한, 나와 차의 한계를 넘나들 만큼 격렬하게 운전할 일도 드물다. 이번 시승 일정은 꽤나 넉넉한 편이었는데, 촬영이나 이동 등 911 터보 S 끌고 나갈 일만 생기면 약속이나 한 듯 온 세상이 하얘지도록 눈이 내렸다.
보통은 엄동설한에 고성능 스포츠카를 몰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포르쉐 911 터보 S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섬세하게 구동력 나누는 PTM과 피렐리 P제로 윈터 타이어, 젖은 노면(Wet) 모드 덕분에 오히려 안심하고 쏘다닐 수 있었다. 주택가의 좁은 골목과 과속방지턱 즐비한 어린이 보호구역, 가파른 지하주차장을 당당하고 편안하게 드나들었다.

막강한 911 터보 S와 함께 한 순간들은 역설적으로 느긋하고 평화로웠다. 어차피 적수도 마땅치 않은데, 굳이 파워를 과시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득한 스펙은 기어이 경험하지 않고 가능성으로만 남겨둬도 뿌듯했다. 승차감 때문에라도 가급적 노멀 모드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빨라 스포츠 플러스와 론치 콘트롤도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가감속과 조향의 반응이 빠르고 정확하며 정교하니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조작은 최소한에 그쳤다. 8단, 1,200rpm으로 시속 100㎞를 유지하다가도, 엄지발가락만 꿈틀하면 번개처럼 5단, 2,500rpm로 태세를 전환해 좀처럼 조바심 낼 일이 없다. 0이 몇 개인지 헷갈릴 만큼 잔고 빵빵한 통장을 품고서, 체크카드로 찔끔찔끔 푼돈 쓰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막상 911 터보 S와 헤어질 날이 밝으니 외면했던 욕망이 고개를 든다. 한 번 들쑤셔보지 않으면 미련이 남을 듯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스포츠 플러스 모드로 바꿨다. 육중한 꽁무니의 엔진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오른발로 페달 짓이기는 순간, 폭력적인 가속G로 얼굴의 핏기가 싹 가셨다. 소름 돋을 만큼 무서운데, 이상하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참고] 포르쉐의 보수적인 성능 제원
포르쉐의 성능 제원은 의아하다. 실제 계측 때 더 나은 기록이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다. 이유는 깐깐한 계측 방식에 있다. 가령 제동거리는 시속 240→90㎞ 제동을 25회 반복해 브레이크를 충분히 예열시킨 뒤 시속 100→0㎞ 제동 테스트한다. 말이 좋아 예열이지 평범한 차라면 준비하다 뻗을 만큼 가혹한 조건. 포르쉐 브레이크 성능의 신뢰성을 엿볼 단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