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는 만큼 일한다? ‘조용한 퇴사’

<트렌드 코리아>를 통해 매년 한국 사회의 주요 키워드를 발표하는 김난도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가 내년 대한민국을 관통할 주요 키워드로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을 꼽았습니다. 이름만 들으면 회사를 나온다는 뜻 같은데, 그렇다고 대규모의 퇴사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처음 듣는 분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실 텐데요. MZ세대 직장인들이라면 모두가 공감하고, 이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조용한 사직, 그 시작과 뜻을 파헤쳐봅니다.


조용한 사직, 일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니다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 유행은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022년 7월,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20대 엔지니어 자이드 펠린이 숏폼 플랫폼 틱톡에 올린 영상이 시발점이었는데요. 펠린은 영상에서 "최근 조용한 사직이라는 용어를 배웠다"라며, "일이 곧 삶인 건 아니다. 당신의 가치는 당신의 성과로 결정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틱톡에 영상을 올린 자이드 펠린이 이 용어를 만든 건 아닙니다. 2009년 텍사스 A&M 대학의 경제 심포지움에서 경제학자인 마크 볼저가 이 용어를 주창했습니다. 볼저가 경제 성장에 대한 열정, 야망이 줄어드는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시킨 용어였죠. 펠린이 영상을 올린 이후 #quietqutting 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자신이 조용한 사직자라고 고백하는 MZ세대들의 영상들이 이어지면서, 이 용어는 일파만파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허슬 문화에 대한 반발, 우리는 받는 만큼 일한다

조용한 사직이란, 실제로 퇴사하는 것이 아니라 업무에 몰두하지 않고 맡은 일만 최소한으로 하며 회사와 자신을 심리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조용한 사직의 핵심에는 '주어진 일만 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노력하지 않는 태도'가 있습니다. 퇴근 이후에는 회사 연락을 받지 않기, 저녁이나 주말에 회사 이메일에 답하지 않기 등등이 대표적인 행동이죠. '우리는 임금대로 행동한다'는 슬로건도 조용한 사직의 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조용한 사직은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시간과 노력을 다하는 '허슬 문화'의 대척점에 있습니다. 허슬 문화는 개인이 사생활보다 일을 중시하고 그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렇게 업무 범위 이상의 일을 했을 때, 승진이나 더 나은 연봉을 얻으리라는 믿음이 깔려 있죠. '조용한 사직'은 이러한 허슬 문화를 포기하거나 스스로 거부합니다.


이미 시작된 '조용한 사직' 현상

그런데 요즘 언론에서 자주 보이는 '조용한 사직'이란 현상,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이는 수치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국 구인 사이트 레주메 빌더(Resume Builder)의 한 조사에서는 35~44세 근로자의 25%가 '조용한 사직자'가 되겠다고 답했습니다. 또 여론조사 기관 갤럽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 직장인 중 50%가 조용한 사직자에 해당하며, 특히 만 35세 이하 Z세대 직장인들의 '업무 비 몰입률'이 매년 상승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인이 직장인 3000여 명으로 시행한 설문에서 응답자 70%가 "딱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면 된다"라고 답했죠. 세대 차이도 확실합니다. 월급만큼만 일하면 된다고 대답한 세대별 비율은 20대가 78.1%, 30대가 77.1%였던 반면, 40대는 59.2%, 50대는 40%에 그쳤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조용한 사직자가 많아질수록, 기업 생산성은 낮아진다는 겁니다. 실제로 미국의 올해 2분기 비농업 부문 노동 생산성은 4.6% 감소했으며, 이는 74년 만의 최저치였습니다.


체념을 생존 전략으로 배운 청년들

대기업과 스타트업을 불문하고 대부분의 기업들은 빠른 시일 내에 급성장을 추구하는 성과, 성장 중심의 조직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력한 만큼 충분한 보상을 주거나 개인이 발전 또는 성장할 기회를 주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죠. 더군다나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그나마 직원으로서 얻던 이점과 혜택도 상당 부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주어진 업무를 충실히 하되 추가적인 노동은 하지 않고, 그 대신 연봉 증가나 승진, 좋은 평가, 직장에서의 자아 실현도 바라지 않는 태도를 점차 갖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코로나19 이후 도래한 예측 불가능한 사회에 2030 세대가 적응한 결과"라 평하기도 했는데요. 말하자면 오늘날의 청년들은 '체념'을 생존 전략으로 택한 것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회사의 잘못된 경영을 지적합니다. 이제 기업들은 퇴사자들의 사직 요인을 확인하고, 낮 시간 휴식 및 휴가 등을 장려하며 번아웃을 방지하는데 힘써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