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시 5년 후인 2006년에는 큰 폭의 페이스리프트로 내/외관을 변경한 '렉스턴 ll'가 출시됐습니다. 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던 플래그십 세단 '뉴 체어맨'의 얼굴을 거의 그대로 이식하면서 이제는 진정한 의미의 '체어맨 SUV'로 거듭났어요.
강화된 보행자 안전 규정에 발맞춰 돌출된 캥거루 범퍼가 삭제되면서 세단 못지않게 매끈해진 전면부, 측면과 후면의 변화는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사이즈를 키운 알루미늄 휠, 다소 과했던 크롬 가니쉬의 비율을 줄이면서 더욱 중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뽐냈습니다. 실물로 처음 마주했던 검은색 차량의 포스가 상당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다만 라디에이터 그릴이 상대적으로 높게 배치되면서 사람으로 치면 얼굴이 길어 보이는 효과를 만들어냈고, 날렵했던 직전 모델과 달리 뭉툭해진 느낌과 함께 희번덕한 인상의 동굴형 헤드램프가 인상을 크게 바꾸면서 소비자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습니다. 앞서 뉴 체어맨이 출시될 때도 비슷한 분위기였죠. 구작이 좋은 평가를 받았던 차들의 어찌 보면 숙명이 아닐까 싶어요.
페이스리프트 모델인 만큼 실내의 변화는 크지 않았습니다. 대신 상하 구분이 확실했던 센터패시아를 일체형 하우징으로 변경하고 각종 편의장치의 디자인과 구성을 달리해 신선함을 더했어요. 새로운 스티어링 휠은 각종 버튼을 누르기 쉽게 다듬었고 특이하게도 패들시프트처럼 스티어링 휠 상단에 있는 버튼으로 기어 변속을 할 수 있는 토글시프트를 국내 최초로 선보였습니다. 물론 차량의 성격상 운전의 재미를 위한 것이기라기보다는 굳이 기어레버를 조작할 수고를 약간 덜어주는 용도였지만요.
이런 배려는 또 있었습니다. 방향 지시등 레버 끝의 버튼을 누르면 비상등을 3번 전멸하는 '원터치 3 비상등'은 지금도 쌍용차에서만 볼 수 있는 기능인데요. 써보신 분들 아실 텐데 정말 우리나라에 최적화된 옵션이 아닐까 싶어요.
이 밖에 미디어용 USB 포트를 마련해 보다 편리한 음악 감상이 가능했고, 지상파 DMB를 지원하는 DVD 내비게이션 시스템, 더욱 업그레이드된 텔레매틱스 에버웨이, 또 내비게이션을 선택하면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오디오 유닛과 공조장치가 원형을 이루도록 디자인한 것도 독특했습니다. 앞서 2003년 선보인 마쯔다의 스포츠카 'RX=8'을 참고한 모양이에요.
여기에 무려 5단계로 조절이 가능한 앞/뒤 열선 시트와 타고 내릴 때 시트를 움직여 승/하차를 돕는 운전석이지 액세스, 전자식 파킹 브레이크와 오토홀드를 추가로 적용해 요즘 차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편의 사양을 갖췄습니다.
단 2열과 3열 트렁크 공간은 사실상 그대로였고 전작의 독립형 에어컨이 빠지면서 오히려 편의성은 떨어졌지만, 대신 승차감이 업그레이드 됐습니다. 고급 트림에 한해 기존 리지드 액셀 후륜 서스펜션을 멀티링크로 변경해 트림에 따라 후륜 서스펜션 구조를 달리해 승차감과 주행 감각에서의 차이를 둔 것도 이 모델부터였습니다.
한술 더 떠 최고급형인 노블레스는 차고를 최대 30mm가량 조절할 수 있는 후륜 전자제어 에어 서스펜션까지 장착해 전작보다 더 업그레이드된 승차감은 물론, 험로 주행이나 승객 탑승, 물건 적재 등으로 뒤쪽이 가라앉았을 때 이를 보정해 주행 성능을 보완할 수도 있었어요.
다만 한계가 분명했죠. 지상고와 무게중심이 높은 데다 태생부터 승차감에 불리한 보디 온 프레임 구조 특성상 승차감을 확보하려면 서스펜션을 무르게 세팅하는 방법이 최선이었을 겁니다. 소위 '물침대'라고 일컬어지는 부드러운 서스펜션은 대부분의 일상주행에서 문제없는 승차감을 확보했지만, 조금만 속도를 높여 코너를 돌면 앞뒤 좌우로 출렁였고 덕분에 동승객에게 멀미를 유발했습니다. 이는 모노코크 방식의 경쟁 차들과 비교되는 지점이었어요.
파워트레인의 변화 역시 돋보였습니다. 판매량이 저조했던 6기통 가솔린 모델은 빠졌고 대신 업그레이드된 디젤 엔진을 적용해 더 나은 출력과 효율을 선사했어요. 이번에도 하위 트림인 RX5에는 기존 뉴 렉스턴의 5기통 2.7L 디젤 엔진, 상위 트림인 RX7과 노블레스에는 이 엔진의 VGT 시스템을 적용해 최대 출력 191마력, 최대 토크를 41kgf.m로 끌어올려 당시 국산 디젤 SUV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성능을 제공했습니다.
한편으로는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벤츠의 구형 엔진을 개량했던 이 물건보다 더 강력한 디젤 엔진을 선보이지 못했다는 건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죠.
전 모델의 벤츠 5단 자동 변속기를 마무리했고, RX5에는 후륜구동 모델과 함께 토크 온 디멘드 방식의 전자식 4륜구동 시스템을, RX7과 노블레스에는 직전 가솔린 모델에만 제공됐던 풀타임 AWD를 맞물려 주행 성능도 강화했습니다. 여기에 전작의 경사로 저속주행 장치는 물론, 공기압 경고 장치, 전자식 자세 제어 장치 ESP, 전복 방지 장치 등 각종 첨단 안전장치를 새롭게 도입해 더욱 안전한 주행이 가능해진 것도 눈에 띄는 부분이었습니다.
이후 2007년 하반기 소소한 마이너 체인지가 이루어졌고 차명이 '렉스턴 ll EURO'로 변경됐습니다. 이름에서도 짐작되듯 더욱 까다로워진 'EURO 4' 배출가스 기준에 대응하기 위해 DPF를 장착, 미세먼지와 질소산화물을 걸러냈지만 마력도 함께 걸러지면서 출력이 소폭 감소했습니다.
CDPF라는 배지가 붙어있는 쌍용차들을 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대신 이때는 '클린 디젤'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디젤이 친환경차 이미지가 있었던 때였죠. 저공해 인증까지 받아 환경부담금 면제, 공영주차장 할인 등 쏠쏠한 혜택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내/외관도 소폭 달라졌는데요. 내장 컬러를 좀 더 밝은 톤으로 수정하고 자잘한 디테일이 변경됐고 스포티한 디자인의 5스포크 휠, 바디 컬러를 원톤으로 처리하면서 세련미를 더했습니다.
이듬해인 2008년에는 '슈퍼 렉스턴'이라는 이름으로 또 한 번 부분 변경됐습니다. 사라졌던 투톤 도색을 다시 도입했고 새로운 디자인의 하이퍼 실버 알루미늄 휠로 세련미를, 라디에이터 그릴은 면도날을 연상케 하는 디테일을 추가하고 중앙에 쌍용 엠블럼을 배치해 마치 벤츠 SUV를 연상시켰어요.
실내는 직전 유로의 구성 그대로였습니다. 2010년 그냥 크루즈 컨트롤이 추가된 것을 제외하면 단종까지 블루투스 오디오조차 추가되지 않았어요. 특이하게도 4.3인치 멀티 AV 시스템이라는 옵션을 선보였는데, 작은 LCD 터치스크린에 후방 카메라, 지상파 DMB, 나중에는 내비게이션까지 넣은 독특한 물건이었죠. 기존 DVD 내비게이션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에 고급형 트림에는 아예 기본으로 넣어주면서 뭐 없는 것보다야 낫긴 했는데, 그때도 액정이 너무 코딱지만 해서 이게 뭔가 싶었어요.
슈퍼 렉스턴이 상징성을 갖는 건 다름 아닌 본격적인 원가 절감이 시작된 모델이라는 점에서였습니다. 출시 초에는 직전 렉스턴 ll EURO와 동일한 구성으로 판매됐지만, 텔레메틱스 에버웨이와 후륜 에어 서스펜션 등 고급 옵션이 순차적으로 삭제됐고 결정적으로 2010년 하반기 카이런, 액티온과 공유하는 4기통 2.0L 디젤의 염가형 트림 'RX4'를 출시하면서 쐐기를 박았죠.
물론 더 나은 연비와 합리적인 차량 가격으로 렉스턴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일부 소비자들에게는 환영받았지만, 초창기 렉스턴을 떠오르게 하는 굼뜬 가속 성능, 이에 더해 새로 도입된 비트라 6단 변속기가 무거운 차체와 궁합이 맞지 않아 저속에서 상당한 변속 충격과 여러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무엇보다 '합리적인'이라는 말은 그동안 렉스턴에게는 어울리지 않았죠. 이 모델의 출시로 싼타페와 쏘렌토, 윈스톰 같은 중형 SUV와 경쟁하는 처지가 되면서 명실상부 고급 SUV 렉스턴의 명성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렉스턴 ll'는 페이스리프트 모델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과 온갖 호화 사양으로 무장해 여전히 대한민국 1%의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만한 럭셔리 SUV다운 상품성을 뽐냈습니다. 벤츠 혈통의 5기통 디젤 엔진은 상용차와 돌려쓰는 경쟁차의 투박한 4기통 디젤 엔진과는 결을 달리하는 매끄러운 질감을 선사했죠.
다만 상황이 많이 달라졌죠. 렉스턴 ll가 갓 출시될 때만 해도 힘을 못 쓰던 경쟁사들이 속속 최신 파워트레인과 좋은 상품성으로 무장한 대형 SUV를 잇따라 내놓으면서 렉스턴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테라칸'의 실패를 맛본 현대가 모노코크 도심형 SUV로 선회하면서 '베라크루즈'를 출시해 도심형 럭셔리 SUV라는 수요를 빼앗아갔고 그나마 이때는 강철 프레임을 품은 정통 SUV의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뒤이어 등장한 기아 '모하비'가 보디 온 프레임 차체 구조로 탄생하면서 렉스턴은 말 그대로 사면초가에 몰리게 됐어요.
결국 2006년 9,689대를 끝으로 꾸준히 하락해 쌍용 사태가 일어난 2009년 2,683대를 최저치로 2011년 2.0 모델의 버프로 겨우 8,000대를 넘기는 데 그쳤습니다.
어느덧 출시 10년 차, 페이스리프트로만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인 시간이죠. 신차로서의 수명을 다해가면서 빠르게 경쟁력을 잃어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날이 강력해지는 배기가스 규제마저 발목을 잡았습니다.
가뜩이나 바람 잘날 없던 회사에 또다시 칼바람이 불어닥치면서 후속 계획까지 타격을 입자 일단 생존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최대한 부분 변경으로 화장을 고치고 가격을 조정해 살아남는 수밖에 없었죠. 누가 무쏘의 후속 아니랄까 봐 이 모델의 운명 또한 비슷해졌네요.
한편 연식이 쌓이면서 여러 고질병도 드러났습니다. 겉 부분은 멀쩡한데 차량 하부를 지탱하는 서브 프레임이 운행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심하게 녹슬거나 '로디우스', '카이런' 등 같은 세대 쌍용차가 공유하는 일명 '볼 조인트 결함'으로 운행 중 차가 주저앉는 만만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 벤츠 5단 변속기를 제어하는 전자기판에 문제가 생기면서 기어가 특정 단수에 고정되거나 변속 충격을 유발하는 '일렉트로닉 킷 고장' 등 주요 부품을 공유하면서 고질병도 함께 공유했어요.
초반에 출고된 렉스턴 ll는 DPF조차 달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노후 경유차 운행금지 대상에 포함되어 빠르게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 시절 GV80이나 다름없는, 소득이 꽤 있는 분들이 타는 차였기 때문에 서울 4대문 안에 진입할 수 없다는 건 비슷한 처지의 디젤 SUV들 중에서도 더 큰 타격이었을 거예요. 이 모델부터 내수형의 가솔린 모델이 아예 제공되지 않았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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