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돌로리스(homo doloris), 고통의 의미를 깨닫는 인간

기호일보 2025. 8. 10.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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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속에 일상이 요동친다.

동일한 고통이 누구에게는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장벽이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정신을 더욱 단단하게 다지는 디딤돌이 된다는 것, 그리스 비극은 인생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려 했던 그리스인들의 삶의 태도를 완벽하게 반영한다.

자신과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며 성실한 삶을 드러내는 것, "그래도 삶은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호모 돌로리스(homo doloris), 이른바 고통받는 인간이 허무주의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저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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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재 인하대학교 프런티어창의대학 교수
정연재 인하대학교 프런티어창의대학 교수

폭염 속에 일상이 요동친다. 문명의 성취는 인간을 한껏 드높이는 것처럼 보이나 자연의 섭리 앞에 인간은 나약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역사상 유례없이 풍요로운 시대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무엇인가 공허하고 궁핍한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 시대를 압도하는 이 같은 공허와 불안감은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감정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의 한계를 상당 부분 극복하게 만든 첨단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면서도 선뜻 우리의 존엄성과 삶의 가치가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지금 우리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존엄하고 가치 있고,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대체 불가능한 고귀한 존재라는 의식이 무너지고 그저 대체가능한 부품과도 같은 존재라는 의식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극단적일 수 있으나 자살이 이해가능한 선택지 혹은 자연스러운 죽음의 형태로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조만간 도래할 것 같은 생각이 이러한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여기서 잠시 그리스 비극을 떠올려 본다. 고대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풍요롭고 행복한 시대에 유행했던 예술장르였다.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인간사의 가장 어두운 측면을 응시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그리스인들은 인생이 얼마나 불확실하며, 불행과 고통이 얼마나 행복 가까이 있는지를 기억하기 위해 비극을 즐겨보았다고 한다. 고통과 죽음 앞에서만 삶의 가치가 온전하게 드러난다는 인생의 이치를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비극이 철저한 깨달음의 산물로서 고통과 슬픔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을 요구하는 예술장르로 인식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동일한 고통이 누구에게는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장벽이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정신을 더욱 단단하게 다지는 디딤돌이 된다는 것, 그리스 비극은 인생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려 했던 그리스인들의 삶의 태도를 완벽하게 반영한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윌리엄 제임스(W. James)라는 철학자는 '거듭나기(twice born)'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거듭나기란 일종의 새로운 가치관을 갖는 것으로 생사의 중대한 기로에 설 만큼 심각한 마음의 병을 앓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에 대한 새로운 가치라든가 기존과는 전혀 다른 인생의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 번 태어난 사람의 종교는 직선적인 것이고 단층 건물이다. 이에 비해 거듭난 사람의 종교는 이층 건물의 신비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고통에 대한 깊은 감수성'과 제임스가 강조했던 '거듭나기'의 정신은 허무의 시대 삶의 기반을 튼튼히 다져줄 계기를 제공한다. 내가 누리는 지금의 행복이 자신의 탁월한 능력과 노력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 아니라 과분할 정도로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 시련과 고통은 우리의 삶을 단련시키기 위한 필수적 요건이자, 더 큰 시련과 고통을 겪는 이웃을 되돌아보는 계기이며 결국 우리의 인생을 온전히 긍정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탁월성을 지향하는 이들이 지녀야 할 자세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통에 대한 단선적인 이해를 극복하고 덧없는 삶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는 삶이야말로 평균의 유혹을 극복하는 지름길이다. 삶이 점점 더 무의미하고 대체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 우리는 '고통의 의미'와 '존엄한 삶'이라는 근본적 질문 앞에 서 있다. 자신과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며 성실한 삶을 드러내는 것, "그래도 삶은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호모 돌로리스(homo doloris), 이른바 고통받는 인간이 허무주의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저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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