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하지 못한 '푸른 낭만'…MBC 청룡 시대가 남긴 것들

[이재국의 엘팬알백] ⑯MBC 청룡 시대 8년의 기록과 추억

교통사고를 극복하고 19개월 만에 마운드에 복귀한 김건우(왼쪽에서 두 번째). 1989년 4월 29일 잠실 롯데전에 선발등판해 8이닝 3실점으로 팀의 7연패를 끊어낸 뒤 동료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스포츠서울
『MBC 청룡은 1989년 신인 삼총사 김기범 노찬엽 최훈재의 활약으로 개막전 6연패의 사슬을 끊어낸 뒤 이튿날에도 전년도 신인왕 이용철의 구원 역투(4.1이닝 무실점) 속에 OB를 3-1로 격파하며 2연승을 달렸다.』 <엘팬알백 15편>

1989년의 시작은 좋았다. 1982년 KBO리그 출범 후 MBC 청룡이 개막 2연승을 거둔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1982년 원년 개막전에서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삼성 라이온즈에 11-7로 이겼지만, 다음날 OB 베어스 박철순의 완투에 눌려 2-9로 패했다. 그 이후엔 1988년까지 개막전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6연패를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1989년의 개막 2연승은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청룡 팬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는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청룡은 다시 추락했고, 끝내 승천하지 못했다. 감독은 또 다시 교체됐다. 그리고 마침내 국내 굴지의 대기업 럭키금성 그룹에 매각된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6번째 주제는 MBC 청룡 시대와의 결별이다. 끝을 향해 가는 청룡열차의 마지막 여정과 청룡이 8년간 남기고 간 기록과 추억, 흔적들을 되돌아 본다.

1989시즌을 앞두고 MBC 청룡 지휘봉을 잡은 배성서 감독. ⓒ스포츠서울

◆배성서 감독의 스파르타식 훈련과 반발

MBC 청룡은 1988년 11월 25일 배성서 전 빙그레 이글스 창단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영입했다. 유백만 감독은 총감독으로 승격시켰다.

배성서 감독은 1973년 영남대 야구부 창단 감독으로 부임한 뒤 혹독한 훈련을 통해 이른 시간 안에 대학야구 정상으로 이끌었고, 무명의 김재박을 슈퍼스타로 길러내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인물이다.

그 이후 동국대(1977~1981년)와 한양대(1982~1985년) 감독을 지낸 뒤 1985년 빙그레가 KBO 제7구단으로 창단되자 초대 사령탑을 맡기도 했다. 동국대 시절엔 김성한과 한대화, 빙그레 시절엔 연습생 장종훈을 미래의 홈런타자로 키워내 많은 스토리를 남겼다.

배성서라고 하면 ‘스파르타식 훈련’과 연결된다. 호탕한 상남자 스타일에 한편으론 정도 많지만, 훈련만큼은 절대 타협이 없다. 하지만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이런 훈련 방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프로 시대 선수들의 생각과 괴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정삼흠의 ‘항명사건’도 터져나왔다.

“내일부터 바로 합동훈련이다. 낙동강 모레사장으로 해병훈련을 간다.”

배성서 감독은 취임 후 12월초 신임 감독 환영 회식 자리에서 선수단에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그 순간 훈훈하던 식사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침묵이 흘렀다. 12월이면 비활동 기간으로 선수들이 휴식을 취해야 할 시기. 그러나 배 감독은 그해 꼴찌나 다름없는 성적(전기리그 7개구단 중 7위, 후기리그 6위, 종합순위 6위)을 올린 팀이 무슨 휴식이냐는 듯 몰아붙였다.

그때 어디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MBC 청룡의 '부엉이' 정삼흠. ⓒ스포츠서울
“여기가 공산당입니까. 그렇게 못하겠습니다.”

5년차 투수 정삼흠이었다. 배 감독이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정삼흠을 불러 술잔을 건네며 타일렀지만 정삼흠은 “못하겠다”며 맞섰다.

회식이 끝난 뒤 선수들끼리 모여 "낙동강 훈련에 갈 거냐, 말 거냐"라며 논쟁을 하기도 했지만 의견이 갈렸다. 이 같은 정보를 들은 구단에서 밤새 선수들에게 회유(고참급 및 주전선수)와 협박성 전화(신인급 및 비주전선수)로 설득을 했다. 선수들은 저마다 입이 나왔지만 새 감독이 훈련을 밀어붙이는 이상 달리 빠질 방법이 없었다.

다음날 훈련을 떠나기 위해 경기고 앞에 선수단이 모였다. 그런데 정삼흠만 안 나타났다.

“당시 계약서는 거의 한자로 돼 있었어요. 대부분의 선수들이 계약서를 읽어보지도 않고 연봉만 보고 사인을 하던 시절이었죠. 저는 당시 계약서를 다 읽어보고 내용을 알고 있었거든요. 분명히 12월에는 비활동기간이라 월급도 안 나오고 선수들이 훈련을 하면 안 된다고 돼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원칙을 말씀드렸던 거죠. 그리고 그때 저는 무릎 수술도 했던 상황이라 훈련을 받기 힘든 시기이기도 했고요.”

정삼흠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오래된 일이지만 워낙 큰 사건(?)이다 보니 그는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했다.

“저하고 의견이 일치하는 선배들도 몇몇 있었고, 김재박 선배 같은 경우는 영남대 시절 은사이기도 하니 난처한 표정이었어요. ‘선수가 어쩔 수 있느냐’는 얘기도 나오고…. 구단에서 선수들한테 전화를 돌려서 설득을 했고, 결국 다시 다음날 아침 경기고 앞에 모여서 투표를 하기로 했는데 훈련에 참가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어요. 저는 다음날 아예 그곳에 안 갔죠. 그런데 거기서 훈련을 가는 걸로 결론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동계훈련이 끝난 뒤 새해인 1989년 1월 7일부터 진해 전지훈련이 시작됐다. 그리고는 1월 30일부터 34일간의 대만 스프링캠프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감독 눈밖에 난 정삼흠은 당초 대만 스프링캠프 명단에서도 빠졌다가 구단의 중재로 따라갔지만 선수단과 별도로 떨어져 훈련을 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전반기 내내 1군에 호출되지 않고 2군에서 지냈다.

MBC 청룡 김건우(오른쪽)가 배성서 감독의 얘기를 듣고 있다. 둘은 한양대 시절 스승과 제자 관계이기도 했다. ⓒ스포츠서울

◆교통사고 김건우 19개월 만의 감동 복귀전

1989년은 KBO가 단일시즌제를 처음 도입한 해였다. 1988년까지 시행한 전기리그-후기리그 제도와 달리 한 시즌 120경기를 단숨에 치러야 했다.

포스트시즌 제도도 변화가 생겼다. 3위와 4위가 준플레이오프를 거치고, 승자가 2위와 플레이오프에서 격돌한다. 여기서 승리하는 팀이 1위와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포스트시즌 방식이 처음 시작됐다(이런 KBO의 포스트시즌 사다리 시스템은 훗날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에서 차용했을 만큼 흥행을 선도한 모델이 됐다).

MBC 청룡은 앞서 설명한 대로 개막 2연승을 달리며 단독 1위로 나섰다. 이후 4월 11일 잠실 태평양전부터 4월 19일 사직 롯데전까지 1패와 1승을 반복하는 레이스를 펼치면서 5승3패로 선전했다. 바깥에서는 “스파르타식 훈련의 효과”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4월 20일 인천 태평양전부터 4월 28일 대전 빙그레전까지 1무 포함 7연패를 당했다.

이때 난세의 영웅이 나타났다. 바로 1987년 9월에 치명적인 교통사고로 이탈했던 김건우가 19개월 만에 복귀전에 나선 것. 4월 29일 잠실 롯데전에 선발등판해 8이닝 7안타 3볼넷 3탈삼진 3실점으로 막고 팀의 5-3 승리를 이끌었다.

구속은 과거에 비해 많이 떨어졌고, 제구도 들쑥날쑥했지만 롯데 선발 김시진에 맞서 8이닝 동안 무려 149구를 던지며 불굴의 투혼을 불살랐다. 팀의 7연패도 끊었고, 그 역시 1년 7개월 만에 승리투수가 되는 감격을 맛봤다. 이날 잠실구장을 찾은 팬들도 뜨겁게 눈물을 흘리며 “김건우”를 연호했다.

1989년 4월 30일자 조선일보. MBC 청룡 김건우가 교통사고를 딛고 19개월 만에 재기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조선일보

하지만 그 감격은 오래 가지 않았다. MBC는 다시 3연패를 당했고, 1승 후 2연패를 반복하면서 5월 6일까지 시즌 7승1무15패로 최하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이미 승수보다 패수가 2배 이상 많았다.

6월초에도 또 무기력하게 7연패를 당하자 “감독 교체를 위해 선수들이 일부러 실수를 한다”는 루머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6월 29일까지 진행된 전반기. MBC 청룡은 24승3무30패(승률 0.447)로 7개 구단 중 5위로 반환점을 돌았다.

MBC 청룡 선수들이 득점 후 환호하는 장면. 2루수 김동재(왼쪽)는 1988년 12월에 삼성에서 현금(2000만 원)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내야수 민경삼(가운데)과 외야수 박흥식도 보인다. ⓒ스포츠서울

◆초유의 사태…선수들의 감독 불신임 투표

7월 4일 시작된 후기리그 개막전에서도 OB에 4-9로 패해 6위로 내려앉았다.

마침내 전반기에 감독 눈밖에 나면서 2군에 내려가 있던 정삼흠이 시즌 처음 1군에 호출됐다. 베테랑인 이광은이 서울 시내 음식점에서 둘의 만남을 주선해 묵은 감정을 풀게 했기 때문. 정삼흠은 7월 5일 잠실 OB전에 선발등판해 3이닝 1실점을 기록한 뒤 4회에 이국성으로 교체되면서 후반기 예열을 시작했다. 그러나 MBC는 이날도 8회에만 3점을 내주며 2–4로 역전패했다.

다음날에도 OB 최일언의 완봉투에 막히며 0-1 패배를 당했다.

올스타 브레이크가 끝난 뒤 시작된 후반기에만 3연패. 전반기 막판을 포함하면 5연패(1무 포함)를 기록했고, 7월 7일 잠실 롯데전을 이겼지만 이후 다시 3연패를 당했다.

일이 터졌다. 일방통행식 배성서 감독의 지휘 방식에 선수들의 불만이 부풀 대로 부풀었다.

급기야 선수들이 모두 모여 감독 불신임 투표를 진행했고, 베테랑 선수들이 그 결과를 갖고 7월 20일 MBC 이건영 사장에게 “감독을 교체해 달라”고 요구하는 초유의 하극상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구단에서 선수들의 뜻을 들어준다면 팀의 기강이 무너지는 상황. 결국 선수단 요구를 일축하면서 배성서 감독을 신임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 이후의 상황은 불을 보듯 뻔한 일. MBC는 7월 21일부터 내리 5연패를 당했고, 8월 5일 인천 태평양전부터 시작된 연패는 8월 25일 인천 태평양전까지 이어졌다. 무려 11연패. 이는 MBC 청룡과 LG 트윈스를 통틀어 아직도 구단 역사상 최다연패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날까지 MBC는 32승4무55패(승률 0.374)로 6위 롯데(38승3무50패)에도 무려 5.5게임차 뒤진 최하위를 달렸다. 누가 봐도 압도적 꼴찌를 차지할 게 자명해 보였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롯데가 시즌 막판에 자멸하기 시작한 것이다. 9월말과 10월초에 걸쳐 10경기 동안 1승1무8패를 기록했다.

반면 MBC는 9월 22일 광주 해태전부터 10월 1일 대구 삼성전까지 무려 8연승을 내달렸다.

결국 MBC는 시즌을 종료하면서 49승4무67패(승률 0.425)를 기록해 롯데(48승5무67패)를 1게임차로 누르고 탈꼴찌에 성공했다. 만시지탄이었지만 막판의 선전은 이듬해 도약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

MBC 구단은 시즌 종료 후 선수단의 신임을 얻지 못한 배성서 감독을 계약기간 1년을 남겨두고 경질하면서 분위기 쇄신을 꾀했다.

MBC 청룡 감독으로 복귀한 백인천 감독이 선수들과 상견례를 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6년반 만에 친정으로 돌아온 백인천 감독

MBC 청룡 선수들은 1982년 초대 사령탑을 맡았던 백인천 감독을 옹립했고, 구단은 11월 7일 야인으로 머물고 있던 백인천과 계약기간 2년에 연봉 5000만원의 조건으로 새롭게 감독 계약을 했다.

“20여 년간 청춘을 바친 야구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나의 명예를 되살리고 야구인생을 마지막으로 활짝 꽃피우기 위해서라도 있는 힘과 땀을 몽땅 그라운드에 뿌리겠습니다.”

MBC 청룡으로 돌아온 백인천 감독은 감독 계약을 한 뒤 언론 인터뷰에서 이같은 소감을 밝혔다. 1983년 6월30일 삼미 슈퍼스타즈로 트레이드돼 팀을 떠난 뒤 6년 반 만에 청룡 유니폼을 다시 입었다.

그런데 [엘팬알백] ②편에서 소개했듯이 11월말부터 MBC 문화방송은 청룡 구단을 매각하기로 결정하면서 급박하게 물밑에서 인수 기업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현대, 대우, 진로유통, 일화, 한일그룹 등 국내 굴지의 기업들을 후보에 올려놓고 접촉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때 럭키금성 그룹이 정보를 입수한 뒤 구본무 그룹 부회장의 지휘 아래 MBC 청룡 구단 인수를 전광석화처럼 결정했다.

12월 중순 ‘청룡 새주인 럭키금성’이라는 기사가 대문짝하게 실리고, 1990년 1월 18일 럭키금성과 매각합의서에 사인하면서 MBC 청룡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이로써 백인천 감독은 MBC와 계약했지만 럭키금성 그룹이 선수단을 모두 인수하기로 해 LG 트윈스 초대 감독에 오르면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게 된다.

1989년 12월 15일자 스포츠서울. 럭키금성 그룹이 MBC 청룡 구단을 인수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스포츠서울

◆청룡 시대가 남긴 것들

1982년 1월 26일 KBO에서 2번째로 창단식을 한 MBC 청룡. 1990년 1월 18일 럭키금성에 매각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MBC 청룡 창단 8주년 기념식을 8일 앞둔 날이었다.

이종도의 만루홈런으로 시작된 '푸른 낭만'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에게 참 많은 꿈과 희망, 추억을 선물해주고 갔다.

돌이켜 보면 KBO 최초 승리팀이었고, 알고 보면 KBO 역사상 유일하게 영어가 아닌 우리말 ‘청룡’을 사용한 팀이었다.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해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로 끝났지만, 그래도 청룡 팬들에겐 그들이 자부심이었다.

연회비 5000원에 어린이회원에 가입한 아이들은 MBC 청룡 점퍼를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고, 그때 청룡 야구에 매료된 팬들은 이제 '청룡 아재'라는 타이틀로 탄탄한 지지층을 이루며 LG 트윈스 올드팬을 구성하고 있다.

1982년과 1983년 MBC 청룡 어린이 회원증이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공병곤 어린이는 이 같은 인연으로 훗날 LG 트윈스 홍보팀장을 지냈다. ⓒ공병곤 님 제공

세월이 흘러 이름마저 아스라이 하나둘씩 잊혀져 가지만, 아직도 팬들의 마음 깊숙이 박혀 있는 나만의 슈퍼스타들이 있다.

1982년 원년 개막전 만루홈런의 사나이 이종도부터 KBO 유일의 4할타자 백인천, 606경기 연속 출장의 ‘원조 악바리’ 김인식,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5차례나 휩쓴 ‘그라운드의 여우’ 김재박, 내야와 외야를 오가며 황금장갑을 4차례나 수상한 ‘온달’ 이광은, '쌕쌕이' 이해창, '강견의 우익수' 신언호, ‘미스터 청룡’ 김상훈, ‘검객’ 노찬엽, '빵식이' 박흥식 등은 1980년대를 관통하는 청룡 팬들의 자긍심이었다.

원조 에이스 하기룡과 장신의 미남 투수 오영일, 작은 체격에도 다부진 투구를 펼친 좌완 유종겸, 잠수함 이길환과 이광권 등 초창기 투수들뿐 아니라 1980년대 중반 입단한 ‘면도날’ 김용수와 ‘비운의 신인왕’ 김건우, 훗날 LG 트윈스에서 에이스급 활약을 펼치는 ‘부엉이’ 정삼흠과 김태원, 김기범 등은 아직도 청룡을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름들이다.

엘팬알백이 청룡 시대를 마감하면서 그들이 남긴 발자취와 추억을 더듬어 본다.

●MBC 청룡 시대 8년간 성적

MBC 청룡은 한 번도 우승을 하지도 못했지만,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를 합친 종합성적에서 한번도 꼴찌를 하지도 않았다.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를 따로 구분하면 1988년 전기리그에서 최하위를 경험한 것이 유일한 사례다.

●MBC 청룡 시대 역대 감독들

1982년부터 1989년까지 MBC 청룡 시절 감독과 감독대행을 포함해 총 12차례(6명) 지휘봉이 바뀌었다. 1980년대만 따지면 삼미~청보~태평양(총 16회)에 이어 지휘자가 두 번째로 많이 교체됐다. 그만큼 팀이 어수선했다.

●MBC 청룡 시대 개인타이틀 수상자

MBC 청룡 시대 KBO 공식 개인 타이틀 수상자로는 원년 타격(타율)과 출루율 2관왕을 달성한 백인천을 비롯해 총 7명. 이들은 총 10개의 트로피를 가져왔다.

참고로 KBO 개인 타이틀 타자 부문에서 장타율은 1984년부터, 득점은 2000년부터 시상했다. 승리타점은 MBC 청룡과 궤를 같이 하며 1982년부터 1989년까지 시상했지만 1990년 폐지됐다. 대신 1990년부터 최다안타 타이틀이 신설됐다.

개인 타이틀 투수 부문을 보면 탈삼진은 1993년, 홀드는 2000년 신설됐다. 구원왕은 2003년까지 세이브포인트(세이브+구원승)로 시상하다 2004년부터 세이브만 집계해 최다세이브상 타이틀을 만들었다.

●MBC 청룡 시대 골든글러브 수상자

골든글러브는 11개를 수집했는데 그중 김재박이 5개, 이광은이 4개를 가져왔다. 한편 1982년과 1983년 골든글러브는 수비율로 수상자를 가렸다. 오늘날처럼 베스트10 성격의 골든글러브는 1984년 이후부터다. 이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MBC 청룡 시대에선 김재박과 이광은만 황금장갑을 받은 셈이다.

●MBC 청룡 유니폼 변천사

MBC 청룡 시대에도 여러 차례 유니폼이 바뀌었다. 유니폼을 보면 시대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유니폼 변천사를 통해 당시의 추억을 되새겨본다.

1982년 MBC 청룡 최초 유니폼. 왼손투수 유종겸이 입고 있는 이 유니폼의 가슴엔 한자로 청룡이 새겨져 있다. 창단식과 전지훈련 때만 착용했다. 개막전에는 다른 유니폼을 입었다. ⓒ스포츠서울
1982년 개막전부터 입은 원년 유니폼. 흰색 홈 유니폼은 가슴에 영어로 청룡 'ChungYong'을 넣었고 아래에 삼원색의 MBC가 새겨졌다. 원정 유니폼은 가슴에 서울 'SEOUL'이 들어간 것이 특징. 헬멧과 모자에는 서울과 MBC의 이니셜인 SM이 겹쳐져 있다. 백인천 감독 겸 선수.ⓒ스포츠서울
1983년 유니폼. 홈 유니폼엔 붉은색으로 영어 MBC와 푸른색으로 한글 청룡이 새겨져 있다. 전기리그까지는 1982년처럼 삼원색 MBC가 새겨져 있었지만, 후기리그부터 바뀌었다. 오른쪽 원정 유니폼을 보면 어깨와 소매로 이어진 부분을 흰색으로 처리한 게 눈에 띈다. 원년에는 유니폼 줄이 노란색이었지만 1983년엔 흰색으로 바뀌었다. ⓒ스포츠서울
1984~1985년 유니폼. 흰색 홈 유니폼에는 가슴에 푸른색과 노란색 띠를 넣은 다음 한글로 청룡을 새겨넣었다. MBC가 없는 것이 특징. 푸른색 원정 유니폼에는 가슴에 흰색과 노란색 띠를 배치하고 서울을 새겨 넣어 '서울 원조팀'을 강조하고 있다. 가슴에 등번호를 넣은 것도 포인트. 모자는 S와 M을 교차한 형태의 마크를 썼지만 글자를 흰색에서 노란색으로 변경했다. 왼쪽부터 이광은, 하기룡, 신언호 '배재고 삼총사'의 모습. ⓒ스포츠서울
1986~1989년 유니폼. MBC 청룡 시대 마지막 유니폼이자 가장 오랜 기간(4년 ) 유지된 유니폼이다. 1984~1985년 유니폼에서 달라진 부분은 글씨체다. 각이 진 형태의 청룡 글자가 다소 둥근 형태로 변했다. 모자 마크도 기존의 'M'과 'S'가 겹쳐진 스타일에서 'M'과 'C'가 나란히 붙은 형태로 바뀌었다. 이유가 있다. 당시 프로야구단 유니폼에 지역명이 표기된 것이 지역감정을 부추길 수 있다는 KBO 서종철 총재의 우려에 따라 유니폼 가슴과 소매에도 지역명이 사라졌는데, 모자의 S가 C로 바뀐 것도 서울(Seoul) 대신 청룡(ChungYong)의 이니셜을 땄기 때문이다. ⓒ스포츠서울

청룡과 함께 웃고 울었던 수많은 시간들….

한 번도 우승을 해 본 팀도 아니고, 한번도 MVP를 배출해 본 팀도 아니었다. 누군가 “청룡이 왜 좋았냐”고 묻는다면 그저 “청룡은 우리 시대의 낭만이고 꿈이었어”라고 말하고 싶다.

청룡은 승천하지 못했고, 청룡이 꾸던 푸른 꿈과 용틀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청룡 시대가 남긴 전설과 추억은 야구가 지속되는 한 영원할 것이다.

※[엘팬알백]은 이로써 MBC 청룡 시대 이야기를 마감하려 합니다. 다음 ⑰편부터 청룡을 이어받은 LG 트윈스 시대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MBC 청룡의 1982~1985년 엠블럼(왼쪽)과 1986~1989년 엠블럼.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