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과거장의 ‘난장판’…지금 관료보며 드는 기시감 왜일까

김석환 박사·지식 큐레이터 2025. 12. 3.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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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광려천과 덕연서원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함안의 하천 가운데 3대 하천이라고 하면 함안천, 석교천, 광려천을 들 수 있다. 함안천은 함안군의 가운데를 흐르고, 석교천은 그 왼쪽을 흘러 남강으로 들어간다. 함안천 오른쪽을 흐르는 길이 26㎞의 광려천은 마산에서 발원해 함안 칠서를 거쳐 낙동강으로 흐른다. 많고 많은 지천 가운데 광려천을 굳이 다루는 것은, 광려천 변에 주세붕의 묘역과 그를 모신 덕연서원이 있기 때문이다.
주세붕이 배향된 덕연서원, 함안군 칠원읍. /김석환

주세붕은 1543년(중종 38) 풍기(현 경북 영주) 군수 시절 조선 최초의 사립대학이라 할 수 있는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백운동서원은 7년 뒤 임금의 편액을 받아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꾼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립 고등교육기관이다. 국립대학 격인 성균관은 한양에만 있었다. 소수서원은 기숙 시설을 갖추고 원생들을 교육했고, 이들은 과거 준비에 매진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소수서원은 4000여 명의 원생을 배출했다.

과거는 시험을 통해서 지배계층인 관료를 선발하는 방식이다. 세습이나 추천보다는 진전된 제도이다. 과거제도는 고려 초인 958년(고려 광종 9) 도입되었지만, 고려와 달리 조선은 원칙적으로 과거를 거쳐야만 고위직을 맡을 수 있도록 했다. 조선 시대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과거 합격자 수의 지역적 균형이 명시되어 있다. 과거는 초시, 복시, 전시 등 3단계 시험이 있다. 초시 합격자는 240명이었는데 성균관 유생 가운데 50명, 한양에서 40명을 뽑았고 나머지 150명은 지역별 인구로 도 단위로 선발했다. 당시 가장 인구가 많았던 경상도가 30명, 충청도와 전라도가 각 25명, 경기도 20명, 강원도와 평안도 각 15명, 황해도와 함경도가 각 10명이었다. 이들 240명을 대상으로 2차 시험인 복시에서 33명을 뽑고, 왕 앞에서 치르는 시험인 전시(展試)를 거쳐 최종 등위를 결정했다. 복시와 전시에서는 지역 할당제가 적용되지 않았다. 생원∙진사시로 불리는 시험도 있었는데, 이는 정식 과거가 아닌 일종의 예비시험이었다.
경북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의 기숙사인 학구재. /김석환

조선의 국시는 성리학이었다. 성리학 이념은 조선의 교육과 관료 엘리트 충원 시험인 과거를 통해 공고해졌다. 과거 시험을 거친 이들 통치계급 이른바 사대부계층은, 공자와 주자를 숭상하는 성리학과 중화사상에서 자신들의 정당성과 존재 근거를 찾았다. 그들에게 충성의 최종 대상은 왕이 아니라 중국 천자였다. 후금을 치기 위한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광해군이 거부하려 하자 신하들이 "차라리 전하에게 죄를 범할지언정 (명나라) 천자에게는 죄를 범할 수 없다"며 대든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이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대의 대상이 중국 대신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박정희, 전두환 독재 정권에 대한 미국의 묵시적 승인도 그랬고, 새 정권이 출범하면 미국 대통령과 얼마나 이른 시간에 얼마나 길게 통화하는지, 미국 방문 시 어떤 환대를 받는지가 정권의 평가 요소가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표현처럼 "미국인보다 미국의 이해를 더 대변하는" 이들이 고위관료가 되고 교수가 된다. 국내에서는 걸핏하면 '격노'하던 윤석열 전 대통령도 2024년 4월, 바이든 미국 대통령 앞에서 '아메리칸 파이(American Pie)'를 부르며 미국이라는 권위에 아양을 떨었다.

주세붕의 서원은 사서오경 등의 경학 교육과 과거 시험 준비 학교가 되어 조선의 성리학적 지배체제를 완성해나갔다. 과거에 합격해도 바로 벼슬자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33명이 응시하는 전시의 1~3 등만 실제 벼슬을 받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형식적인 벼슬은 있되, 업무와 녹봉이 없는 명예직이 주어졌다.

조선의 벼슬자리는 '내삼천(內三千) 외팔백(外八百)'이라는 말처럼 서울의 벼슬자리가 3000개고, 지방의 벼슬자리가 800개라고 칭해졌다.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 문반직을 기준으로 하면 '원님'으로 불리는 지방관직을 포함해도 1000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치열한 자리다툼이 벌어졌다.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당쟁을 '배고픈 열 명이 밥그릇 하나를 두고 싸우는 상황'으로 비유한다. 밥 한 그릇을 놓고 여럿이 앉으면, 왜 말투가 그러냐, 시선이 곱지 않다 등의 이유로 싸움이 반드시 일어나는데, 본질은 밥이 모자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세기가 시작되던 1800년, 정조는 순조의 세자 책봉을 축하하는 의미로 특별과거 시험을 이틀간 치른다. 21만 5000여 명이 시험에 응시했다. 당시 한양 인구는 20만~30만 명 수준이었다. 이때 제출된 답안지는 무려 7만여 장. 채점은 믿기 어렵겠지만, 고작 반나절 만에 끝났다. 일찍 제출된 답안지에 대해서만 채점했기 때문이다. 답안지를 빨리 제출하려면 일단 앞자리에 앉아야 하고 답안도 빨리 써야만 한다. 그래서 권세 있는 집안은 공공연하게 대리시험 팀을 구성했다. 정약용의 <경세유표(經世遺表)>가 묘사한 과거장 풍경에는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역할을 맡은 선접(先接), 문장에 능숙해 시험을 대신 치르는 거벽(巨擘), 글씨를 대신 쓰는 사수(寫手) 등이 등장한다. 합격이 예정된 권세가의 응시생은 햇빛을 가리는 우산 아래에서 우아하게 시간만 보내면 된다.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하는 정조 시대였다. 이런 모습은 단원 김홍도가 그린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김홍도의 공원춘효도 부분. /안산 김홍도미술관 소장

우리가 쓰는 '난장판'이라는 말은 이 무렵의 과거장에서 유래한 것이다. 백범 김구도 16살에 황해도 해주에서 향시에 응시했다가 시험지 바꿔치기, 합격자 이름 바꿔치기 등을 목격하고 동학에 입문했다.

무과의 타락은 문과보다 훨씬 심했다. 조선 전체를 보면 무과 합격자는 문과보다 10배나 많았다. 1784년(정조 8) 세자 책봉을 경축하는 무과 시험의 합격자는 무려 2676명이었다. 정조는 지방 출신이라도 차별하지 말고 선전관으로 발령하도록 호기롭게 지시했다. 이는 물정 모르는 분부였다. 당시 선전관청의 정원은 고작 20명이었다. 임금의 명령과 관계없이 합격자 대부분은 합격증만 끌어안고 평생을 살았다.

벼슬자리도 마땅치 않은데 왜 과거에 목을 매었을까? 양반 신분 때문이었다. 3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으면 양반의 지위를 잃고 양인이 된다. 과거는 양반이라는 신분과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했지만, 탈세의 합법적 수단이기도 했다. 과거를 위해 힘들여 공부한 학문은 현실 문제 해결에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아니 과거를 거쳐 어렵게 높은 자리를 차지한 조선의 양반들은 실무에 관여하는 것 자체를 천하게 여겼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말에게 콩을 더 주라 했던 양반이, 좀스럽다는 평을 받아 이후 벼슬길이 막힌 사례도 나온다.

과거 대신 고시라는 형식의 시험을 통과한 이들도 현실 문제 해결 능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고시 출신 공무원이었던 노한동은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에서 "겉으로는 공익을 위한 체계를 자처하면서도, 대다수 관료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영리하게 움직이며, 정작 본질적인 일은 그만큼 치열하게 외면하는 기형적인 세계"가 공직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책의 부제목은 '한국 공직 사회는 왜 그렇게 무능해졌는가'이다.

조선 시대에도, 해방 이후에도 그들은 무능했다. 시험에 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정책 대상인 백성을 '을(乙)'로 보고 군림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장 뛰어난 능력은 임명권자의 심기를 살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일이었다. 한덕수 전 국무총리는 불법 계엄 3개월 전 언론 인터뷰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대인이다. 제일 개혁적인 대통령"이라고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말했다.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도 계엄 한 달 전 라디오방송에서 "국무회의를 해보면 인공지능(AI)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대통령뿐"이라고 추켜세웠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저도 전문가지만 특히 입시에 대해서는 (윤 대통령에게) 많이 배운다"고 말한다. 2024년 12월 3일 밤 국무회의 CCTV에는 그들의 민낯이 드러난다.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공적 열정이 아니라 출세 욕망만 가득한 그들에게는 계엄은 민주주의 파괴가 아니라 자신들의 자리보전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구한말 나라를 팔아먹는 조약에 찬성했던 그들의 선배 관료들도 그랬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발표를 앞두고 조선의 관료들은 순종 즉위 4주년 연회를 열었다. 당시 일본 망명 중이던 청나라 지식인 양계초에 따르면 즉위 4주년 연회에 참석한 군신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먹고 마시고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양계초는 이렇게 썼다. "무릇 조선 사람들은 망하는 것을 스스로 즐겼으니, 또한 무엇을 가엾게 여기겠는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한국 최고급 아파트 분양 광고의 표현을 빌리면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이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대우받는 평등 세상'이 결코 아니었다.
덕연서원 앞을 흐르는 광려천. /김석환
광려천 변에 누워 있는 주시경 선생은 이런 일들을 알고 있을까? 2025년 4월 봄빛 속 광려천은 말없이 흐르는데, 숭어 떼들만 소에 모여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김석환 박사·지식 큐레이터

☞ 필자는 KNN 사장, 한국인터넷진흥원장,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고인돌과 인공지능'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언론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으며 콘텐츠와 한국 언론기업의 문제에서부터 산업혁명 이후 헤게모니를 둘러싼 세계와 한국의 근현대사, 생성형 인공지능, 플랫폼, 빅데이터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