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 버스부터 공영화합시다
제주에서 '이동' 하기
제주에 내려온 지 1년이 되었다. 막 내려왔을 무렵, 제주살이가 어떠냐고 묻는 지인들에게 조금 불평했던 기억이 난다. 다 좋은데, 교통이 불편했다. 분명 행정구역상 제주시인데, 시내 중심부로 가는 버스의 배차 간격이 빨라야 30분이었다. 중산간으로 가는 길은 더 막막했다. 자주 가는 동네까지 직통버스는 한 시간에 두 대뿐인데,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다보니 배차시간이 1시간이다. 목적지까지 소요 시간은 약 50분. 놀라운 점은 걸어가도 1시간이면 도착한다는 사실이다. 걸어가도 한 시간, 버스를 타도 한 시간이라니! 도보를 몇 번 시도해 보았으나, 얼마 못 가 포기했다. 더워도 너무 더웠다. 추석 기준 제주 북부의 열대야는 연속 70일을 넘겼다. 기상 관측 이래 최장 기록이다. (40일 정도에서 이미 관측 이래 최장 기록을 세운 것인데, 거기서 30일 가량을 더 넘긴 것이다.) 결국 나는 운전 연수를 시작했다. 온 세상이 내가 승용차를 타게끔 만들고 있다!
제주시 외곽 A에서 중산간 B로 이동할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은 다음과 같다.
승용차는 이동시간이 짧고, 아무 때나 출발할 수 있다. 날씨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 (전기자전거와 자전거는 초기 비용이 적지만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 가지 않을 수 있었다면 자전거를 선택했을 것이다.) 주어진 이동 수단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로 보인다. 유일한 걸림돌이 있다면 초기 비용이다. N천만 원대의 목돈에 유지비까지 고려하면, 승용차 구입은 나의 가처분소득을 크게 줄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렇게 된다면 어떨까?
갑자기 버스의 경쟁력이 올라갔다. 초기 비용도 없고 날씨 영향도 적다. 승용차를 사지 않으니 N천만 원의 초기 비용과 수백만 원의 유지비도 아낄 수 있다. 미숙한 운전 실력으로 인한 교통사고 발생 가능성 등을 감안하면 실제 이익은 더 클 것이다. 사실 당연한 얘기다. 이동시간과 배차간격이 합리적이라면 버스를 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요금을 낮추거나 무상 제공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당연한 이야기가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버스 산업 구조에 있었다.
준공영제라는 함정
제주도는 2017년부터 버스 준공영제를 운용하고 있다. 버스 배차권과 노선 조정권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가 민간 버스업체의 운영비용을 보전해 주는 제도다.(국회의원 김진애, 책임연구원; 김상철 공공교통네트워크 정책위원장, <공공교통 정책의 새로운 문제설정 - 어떻게 교통정책은 사회정책이 되는가>, 2020-정책보고서, 2020) 공공 재정으로 버스업체의 손실을 보전해 주고 있지만, 의외로 개입은 쉽지 않다. 노선이나 배차 등을 조정할 때마다 버스 업체와 협의를 거쳐야 한다. 게다가 적자 걱정 없이 고정적인 수입을 보장해 주니, 도덕적 해이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버스 업체들의 과도한 이익과 전용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준공영제 시행 이후 운행 노선도, 버스도 늘었지만 수송 분담률은 오히려 하락했다는 점이 전혀 놀랍지 않다. 7년이 지난 지금, 제주 버스는 ‘돈 먹는 하마’라는 오명을 쓰고 재정 부담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달에는 재정 건전성을 이유로 이용률이 낮은 노선을 급작스럽게 변경·감축하면서 수백 건의 민원이 폭발하기도 했다.
수익성이 낮은 노선을 없애거나 감축하는 것은 정말 당연한 일일까? 다들 예산이 부족하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거기에는 함정이 있다. 수익성을 계산하는 계산기에 공공교통으로 인한 사회적 이익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먼저 승용차의 외부 비용(cf. 사회적 비용, "한 경제 주체의 행위가 시장을 통하지도 않고 값을 지급하지 않고도 다른 경제 주체의 경제적 성과에 불이익을 주는 현상", 우리말샘)을 알아보자. 공공교통 네트워크는 2017년 기준 승용차의 외부 비용을 약 1만 2천 원으로 추산했다.(국회의원 김진애, 책임연구원; 김상철 공공교통네트워크 정책위원장, <공공교통 정책의 새로운 문제설정 - 어떻게 교통정책은 사회정책이 되는가>, 2020-정책보고서, 15p) 승용차가 발생시키는 혼잡비용과 대기오염비용, 사고비용 등을 합산한 것이다. 반면 승용차당 세금비용은 약 2천 원에 불과하다. 세금을 내고 남은 1만 원은 사회 전체가 갚아야 한다. 승용차를 사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사회는 마이너스 비용을 지불하지만, 승용차 이용자는 손해를 볼 일이 없다.
버스는 어떨까? 일단 여러 명이 한 버스에 타니 혼잡도 완화에 도움을 준다. 대기오염과 사고 발생 가능성도 낮아진다. 탄소 배출량까지 감안하면 버스를 타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동안의 교통 정책은 버스로 인한 사회적 이익을 제대로 계산하여 이용자에게 되돌려 준 적이 없다. 올해 들어서야 '기후동행카드', 'K-패스' 등의 요금 할인 정책이 겨우 등장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버스, 지하철과 같은 공공교통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존재다. 출근하기 싫다고 집 밖을 나서지 않을 도리는 없다. 제주에서 승용차가 없는 버스 이용자에게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취약하고, 일을 쉴 수 없으며, 먼 거리를 가야 하는 사람일수록 버스를 타야만 한다. 선택권이 없는 사람들에게 수요-공급의 시장 논리를 들이미는 것은 부당하다. 오히려 버스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고, 그만큼의 이익을 이용자에게 되돌려주는 정책이 필요하다.
탄소 저감을 위한 공공교통
공공교통은 온실가스 저감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제주의 경우, 직접 온실가스 배출량의 절반 정도가 수송부문에서 발생한다. 1인당 자동차 등록 대수 전국 1위가 제주도라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1km 이동 시 교통수단별 탄소 배출량은 승용차 210g, 버스 27.7g, 지하철 1.53g으로 공공교통이 승용차보다 현저히 낮다. (그린피스, "대중교통 요금 인상이 기후위기에도 영향을 미친다구요?", 2023.02.20, https://www.greenpeace.org/korea/update/25460/blog-ce-public-transport-fare/) 탄소중립을 위해 공공교통의 활성화가 시급한 이유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버스를 선택하게 만들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이용이 편리하고 저렴하면 된다. 버스의 "경쟁력 강화"다. 어떤 사람들은 같은 이유로 민영화를 주장한다. '경쟁'이 부족해서 공공부문의 효율성이 민간보다 떨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전제가 잘못되었다. 혼자서 오롯이 도로를 점유하며 달리는 승용차와 대중을 싣고 달리는 버스는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 개인의 욕망은 늘 사회적 이익을 앞서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하다. 둘 사이의 수평을 맞추려면 공공이 개입하여 버스가 승용차보다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승용차 억제 정책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이미 유럽의 여러 도시는 혼잡통행료를 징수하거나 차량 통행 제한 구역을 만드는 등의 승용차 억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조남건,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선진 교통정책의 동향>, 특집 교통정책의 선진화 방향, 국토연구원, 2008.06.15) 단, 그전에 버스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가 선행되어야 한다. 승용차 대신 버스를 타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 되어야 승용차 억제 정책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 역시 전국 최초로 차고지 증명제를 시행하여 승용차 구입을 억제하려 한 바 있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버스 인프라가 부족한 상황에서 승용차 구매를 억제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공공교통 요금에 대한 강력한 할인 정책도 필요하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공공교통으로 유인하여 탄소배출을 획기적으로 저감하기 위해서다. 독일의 경우, 2022년 6부터 8월까지 일부 대중교통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9유로(약 1만2000원) 티켓'을 시험 판매하여 대중교통 이용률 25% 증가, 이산화탄소 180만 톤 저감이라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린피스, "대중교통 요금 인상이 기후위기에도 영향을 미친다구요?", 2023.02.20, https://www.greenpeace.org/korea/update/25460/blog-ce-public-transport-fare/) 공공교통으로 얻은 사회적 이익을 버스 업체가 아닌, 이용자 시민에게 돌려주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승용차 억제 정책 혹은 탄소 배출과 관련된 세입을 공공교통의 재원으로 사용하려는 시도들도 이어지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공공교통의 전면 무료화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준공영제하에서는 시행이 불가능하다. 버스 산업의 '완전 공영제'가 필요한 이유다. 준공영제 구조에서는 정부 보조금이 시민이 아닌 버스 업체의 이익으로 흘러갈 뿐이다.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비용이 들어가는 준공영제를 폐지하고 완전 공영제로 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버스 업체가 아닌, 버스 그 자체에 대한 투자가 탄소중립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시민에게 알리고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1km당 450억 원이 드는 '수소 트램'보다, 버스 산업의 공영화에 투자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 훨씬 더 많은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이제는 버스를 공공에게, 시민에게 돌려주어야 할 때다.
이 글은 생태적 지혜 연구소와 제주투데이에 함께 실립니다.
[고이영 제주 시민(eyoung.creat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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