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막을 때부터…‘정쟁’ 얼룩진 중동의 첫 월드컵 [박강수 기자의 도하일기]

박강수 2022. 11. 28.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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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국제축구연맹(FIFA)이 조별리그 2차전부터 성소수자 지지의 의미를 담고 있는 무지개 모자와 깃발의 경기장 반입을 허용했다. 사진은 26일(현지시각) 카타르 도하 974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월드컵 D조 프랑스와 덴마크 경기가 끝나고 나서 왼팔에 무지개색 밴드를 한 관중이 차고 있는 모습. 도하/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시작은 ‘무지개’였다. 카타르는 이슬람 율법(샤리아법)에 근거해 동성애를 ‘금지’하고 형벌(3년 이하 징역·태형·사형)로 다스리는 ‘인권탄압국’이다. 네덜란드, 독일, 잉글랜드 등 이번 월드컵에 출전한 일곱개 유럽 팀은 이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경기장 안으로 가져오기로 하고 이른바 ‘원러브’(OneLove) 완장 착용을 공표했다. 무지개 빛깔 하트 속에 숫자 1을 새긴 주장 완장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연대와 차별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호소(축구에만 집중하자)와 회유(다른 완장 캠페인을 준비했다), 경고(차고 나오면 옐로 카드 받고 시작하는 거다)로 출전국들을 압박했고, 이 가운데 ‘경고’가 먹혔다. 옐로 카드 협박에 유럽 팀들은 피파의 결정을 성토하며 완장을 포기했다. 당초 첫 무지개가 뜰 예정이었던 지난 21일(현지시각) 잉글랜드와 이란 경기에서 잉글랜드 주장 해리 케인은 피파가 준비한 별도의 ‘차별 금지’ 캠페인 완장을 대신 찼다.

이후 사태는 전방위로 비화했다. 경기장 곳곳에서 출입 기자나 관중을 상태로 한 ‘무지개 검열’ 제보가 쏟아진 것. 기자도 보았다. 잉글랜드-이란전 종료 뒤 경기장을 나오는데 현지 보안요원이 무지개색 목줄을 찬 한 독일 기자를 향해 “다음부터는 그것을 가져오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독일 <빌트>지 소속의 스포츠 기자인 하이코 니더러는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그는 기자에게 “웃기는 일이다. 이건 그냥 색깔일 뿐이다”라고 불쾌감을 표했다.

무지개 목줄을 걸었다가 보안요원으로부터 “다음부터는 가져오지 말라”는 말을 들은 독일 <빌트>의 기자 하이코 니더러. 도하/박강수 기자

결국 피파가 “무지개 모자와 깃발의 경기장 반입을 허용”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됐으나 ‘축구와 정치’라는 화두에는 본격적으로 불이 붙은 모양새다. 양상은 유럽의 일방적인 중동 비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영국 <가디언>은 이란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과 연대의 뜻에서 잉글랜드전 국가 제창을 하지 않은 이란 선수들의 ‘용기’와 완장을 포기한 잉글랜드를 대조하며 유약함을 비판한 바 있는데, 오히려 곤란해 한 건 이란 선수단이었다.

이란 대표팀의 카를루스 케이로스 감독은 웨일스전을 하루 앞둔 지난 25일 기자회견에서 선수들을 향해 이란 반정부 시위 관련 질문이 쏟아지자 회견 종료 뒤 직접 <비비시> 기자를 찾아가 “당신은 왜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에 대해 개러스 사우스게이트(잉글랜드 감독)에게 질문하지 않느냐”고 따지며 설전을 벌였다. 축구와 정치를 무람없이 연결짓는 질문이 유독 중동 국가 선수단에 집중되는데 이 또한 문화적 차별이 아니냐는 항의였다.

피파의 무지개 탄압을 비판하며 입을 가리고 단체사진을 찍은 독일 대표팀은 직후 경기에서 수비수 안토니오 뤼디거가 일본 선수를 조롱하는 듯한 플레이를 해 앞선 퍼포먼스의 의미를 퇴색시키기도 했다. 일부 아랍 팬들은 4년 전 러시아대회에서 독일의 조별리그 탈락 뒤 인종 차별적인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터키계 독일 축구선수 메주트 외칠을 다시 소환하며 독일의 이중성을 비웃기도 한다.

지난 25일 기자회견에서 영국 <비비시> 기자와 설전을 벌이는 카를로스 케이로스 이란 대표팀 감독. 영국 아이티비(ITV) 누리집 갈무리
지난 23일 일본과 경기에 앞서 입을 가리고 단체사진을 찍은 독일 선수들. 도하/UPI 연합뉴스

이 뿐만이 아니다. 세르비아 대표팀 라커룸에는 코소보를 겨냥해 “영토를 내줄 수 없다”고 직격하는 문구가 담긴 깃발이 내걸려 피파에서 징계 절차에 나섰고, 이란과 경기(29일)를 앞둔 미국 대표팀의 그레그 버할터 감독은 미리 기자회견에서 “정치적 문제나 양국 관계와 관계없이 선수들의 의지로 치열한 경기가 될 것”이라고 차단막을 쳤다.

스코틀랜드와 리버풀을 대표하는 축구 전설 빌 섕클리의 유명한 격언, “사람들은 축구가 생사의 문제와 같다고 여기는데 나는 그런 태도에 실망한다. 축구는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라는 말은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축구보다 중요한 것’을 외치는 목소리가 축구를 뒤덮으면서 최초의 중동 월드컵은 축구 국가대항전을 넘어 전례 없이 어수선한 정치적·문화적 대리전으로 치닫고 있다.

도하/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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