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전은 늘 우리를 설레게 한다. 그러나 그 도전을 향한 길은 언제나 멀고 험하다. 남극으로 향하는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인천공항을 떠난 순간부터 우리는 아시아를 넘어 북미와 남미로 이어지는 하늘길에 올랐고, 시차가 네 번 바뀌는 장거리 여정 속으로 밀려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비행과 환승, 대륙마다 다른 공기와 풍경을 지나며 남극은 조금씩 가까워졌다. 지도로만 보던 긴 항로가 하나씩 현실의 길로 이어지고, 마침내 우리가 발을 디딜 남극세종과학기지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 3일간 하늘길을 달리다
2024년 12월 11일 오전 9시 45분,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에서 대한항공 비행편에 탑승했다. 비행기는 구름을 뚫고 날아올랐고, 약 13시간 20분후 미국 애틀랜타 하츠필드-잭슨 공항에 12월 11일 오전 9시 05분(이하 현지시각) 도착했다.
시차 덕분에 ‘도착했는데도 또 아침’인 기묘한 시간대에 접어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시련이 시작됐다. 다음 환승까지 무려 11시간의 공백이 존재했다. 이틀 가까이 이어질 비행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고, 몸은 이미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대기 시간보다 더 큰 걱정은 따로 있었다. 바로 수하물이었다. 남극 취재의 절반은 장비다.
카메라, 영상기기, 방한복, 노트북까지 하나라도 어긋나면 한 달간의 취재 계획 전체가 흔들린다.
공항에서 짐이 사라지는 건 뉴스 속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남극을 앞두고 보니 모든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쳤다. 짐표를 부착할 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짐 태그를 다시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혹시나’ ‘만약에’가 계속 따라붙었다.


애틀랜타에서 긴 대기를 마친 뒤, 12월 11일 오후 8시 10분 델타항공을 이용해 칠레 산티아고로 향했다. 비행은 또다시 9시간을 넘겼고, 몸은 의자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다는 신호를 보냈다.
12월 12일 오전 7시 20분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했지만, 도착했다는 사실보다 앞으로 또 기다려야 한다는 현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남극 관문도시인 푼타아레나스행 비행기까지 다시 8시간의 대기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틀 동안 씻지 못한 상태라 샤워 욕구가 극에 달했다. 남극특별취재팀 박설민 기자가 미리 예약한 라운지를 찾아 나섰지만, 예약 앱에서 안내받은 라운지는 없었다.
동공 지진이 발생하는 순간이었다. 한국에 있는 데스크(국장)에게 인터넷 검색을 요청하고 현지에서 우리는 몸으로 뛰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공항 구석구석을 헤맸다. 문의하는 직원들마다 제각각 다른 위치를 알려줬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은 스페인어권 공항에서 길 찾기는 생존 게임에 가까웠다.
한 시간 가까이 헤맨 끝에 온라인으로 구매한 라운지 티켓을 사용할 수 있는 장소를 겨우 찾아냈다.
샤워실은 단 한 칸이었지만 그 한 칸의 온수는 이틀간의 고단함을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라운지에 놓인 빵과 치즈·과일 같은 간단한 음식들은 사진으로 보면 먹음직해 보이지만, 국밥을 즐기는 기자의 기준에서는 한 번이면 족한 맛이었다.
그래도 씻고 허기를 채우고 나니 졸음이 밀려왔다. 눕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라운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의자를 침대 삼아 쪽잠을 청했다.

잠깐의 휴식 끝에 다시 비행기 탑승 시간. 12월 12일 오후 3시 47분, 이번엔 라탐항공 비행편에 올라타 칠레 푼타아레나스로 향했다. 4시간 반의 비행 끝에 오후 7시 13분, 드디어 지구 남부 끝자락인 칠레 푼타아레나스에 도착했다.
걱정 반 두려움 반,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설렘이 뒤섞였다. 공항을 벗어나 찬바람을 맞는 순간 비로소 실감이 났다. ‘아, 여기서 남극으로 들어가는구나.’
◇ 관문 도시의 하루, 그리고 남극행
칠레 최남단 도시 푼타아레나스는 남극행 비행기들이 오가는 ‘마지막 경유지’로 불린다. 마젤란 해협을 마주한 브런즈윅 반도 끝자락에 자리한 도시로 남극 대륙과 가까운 세계 최남단 지역이다. 남반구 한여름인 1월에도 평균 기온은 10℃ 안팎이고, 한겨울에는 1~2℃까지 떨어진다.
우리가 도착했던 12월은 때로는 차갑고 때로는 서늘하게 느껴지는 날씨였다. 다만 바람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불었다. 그리고 잠시 해가 나다가는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변화무쌍한 날씨가 계속됐다.
고층 건물이 거의 없고 낮게 펼쳐진 주택가 사이로 바람이 회오리처럼 몰아쳤다. 이곳이 왜 ‘바람의 도시’라 불리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도시 곳곳에는 남극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마젤란 광장에는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동상이 서 있는데, 왼쪽 검지손가락이 유난히 반들거렸다.
수많은 선원과 여행자들이 ‘무사 항해’를 기원하며 만지고 간 흔적이라고 했다. 근처 박물관과 전망대에서는 마젤란 해협의 항로와 이 지역의 개척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해변도로에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연구원과 탐험가 그리고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짐을 끌고 이동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조용하고 작은 도시였지만 쨍하게 비치는 태양 빛 사이로 파란 물감을 뿌려놓은 듯 펼쳐지는 푸른 하늘은 이곳에 온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우리는 남극행 DAP 항공편을 기다리기 위해 이틀 먼저 푼타아레나스에 도착했다.
극지연구소는 “남극의 날씨는 예측이 어렵고, 비행 예정일보다 앞당겨지거나 늦어질 수 있다”며 반드시 사전에 대기할 것을 당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곳에 머무는 동안 취재팀은 하루에도 여러 번 기상 상황과 이메일을 확인했다. 바람이 강할 때면 ‘남극을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스쳤고, 잠시 잦아들면 혹시나 하는 기대가 밀려왔다.
남극을 눈앞에 두고도 언제 출발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이 시간이야말로 푼타아레나스만의 독특한 긴장감이었다.

그런데 푼타아레나스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던 날 극지연구소에서 예상보다 이른 연락이 왔다.
“내일 남극 비행기 뜰 예정입니다. 바로 준비해주십시오” 당초 계획보다 하루 먼저 남극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흐린 하늘 아래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마음은 더 빠르게 남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둘러 짐을 정리해 공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펭귄 이미지가 새겨진 남극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킹조지섬 상공에 진입하자 창밖으로 눈 덮인 백색의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푸른 바다 위에 듬성듬성 떠다니는 얼음 조각들이 여기가 남극임을 알리고 있었다. 두세 시간 남짓한 짧은 비행 끝에 우리는 마침내 남극 땅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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