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기술 팔라' 거절, 당뇨 환자 채혈 공포 극복한 한국 기술
라메디텍 최종석 대표
하루에도 몇 번씩 피를 봐야 하는 이들이 있다. 식전·후마다 혈당을 확인하기 위해 채혈하는 당뇨 환자들이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생살을 찔러야 한다는 두려움과 함께, 소독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경우 2차 감염 위험을 안고 산다.
라메디텍 최종석 대표(49)는 당뇨를 앓고 있는 조카를 보며 ‘바늘 없는 채혈기기’를 고안했다. 바늘로 찌르는 고통은 차치하고라도 조카의 손 곳곳에 박인 굳은살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개발한 레이저 채혈기 핸디레이(HandyRay)는 최 대표의 인생이 됐다. 채혈할 때 고통이 없고, 상처 부위가 보이지 않는다. 2차 감염의 우려도 없다.
2022년 매출은 20억원을 넘어섰고 2023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자제품 박람회 CES에도 초청됐다. 2013년부터 꾸준히 특허를 등록해 손에 쥔 특허증은 30개가 넘는다. 최 대표를 만나 10년간 ‘레이저’라는 한 우물만 판 이유를 들었다.
◇묵묵히 일하던 연구원이 ‘사장님’을 꿈꿀 때
2000년 아주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반도체 장비회사 세메스에서 기계 설계 연구원으로 일했다. “반도체 전 공정인 포토리소그래피(Photolithography)를 맡았어요. 반도체 표면에 사진을 인쇄하듯 회로·부품·배선을 설계하는 일이죠. 비교적 차분한 성격인 제게 꼭 맞는 일이었습니다.”
결혼 이후 그의 삶은 가정 위주로 바뀌었다. “가정을 꾸리고 나니 교육 등 인프라 때문에 수도권과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습니다. 2002년 경기도 수원의 삼성종합기술원 의료기기사업부에서 개발자를 모집하는 공고를 보고는 곧장 지원서를 내고 이직했죠.”
의료용 장비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개발하는 일이 주어졌다. “레이저를 이용해 치아의 상한 부분을 긁어내는 제품이나 지방을 레이저로 녹여 땀·소변으로 배출되게 하는 제품을 만들었어요. 요즘은 여러 병원에서 보편적으로 쓰는 장비지만 당시엔 ‘레이저’ 의료기기가 흔치 않았어요. 말 그대로 블루오션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 굴지의 대기업을 중심으로 스핀오프(기업분할) 열풍이 불었다. “인터넷 사업이나 신기술 분야를 분사(分社)해 자회사로 두면서, 모기업의 가치까지 높이겠다는 전략이었죠. 이때 삼성종합기술원 의료기기사업부도 2006년 ‘비앤비시스템’이라는 새 이름을 달고 분사했습니다. 여전히 대기업의 그늘 아래 있긴 했지만 벤처기업의 탄생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어쩌면 나도?’ 하는 생각이 들었죠.”
주변엔 바람잡이가 즐비했다. “주변 동료들과 거래처 지인들이 ‘자네도 창업해 봐’라며 바람을 넣었어요. 일단 회사만 차리면 무조건 힘을 보태겠노라고 약속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창업이 그렇게 쉬울 리가 없죠. 나만의 아이템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주저하게 되더군요.”
때를 기다리다가 무릎을 ‘탁’ 치게 만든 사람은 조카였다. “조카가 태어날 때부터 당뇨를 앓았습니다. 당수치를 확인하기 위해 하루에도 5~6차례 채혈해야 하는데요.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손과 팔 곳곳에 박인 굳은살이 안타까웠어요. 그걸 가리려고 여름에도 긴팔 셔츠만 고집했죠. 제가 수십년간 만들어온 레이저 장비를 조금만 변형한다면, 고통 없고 상처가 작은 채혈 도구를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개발 후에도 이어진 첩첩산중
2012년 1월 꿈만 꾸던 창업을 실행에 옮겼다. 함께 따라나선 동료 직원 3명과 함께 ‘라메디텍’을 세웠다. “각자의 종잣돈을 긁어모아 1억4000만원의 초기자본으로 3평 남짓의 사무실을 구했습니다. 다른 동료들이 경영관리·영업·인허가 등을 맡아준 덕분에 저는 제품 개발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어요.”
먼저 채혈에 관한 국내·외 논문을 섭렵했다. “안전하고 편리한 채혈에 대한 수요가 생각보다 광범위하더군요. 이를테면 갓난아기의 황달 검사를 할 때 발뒤꿈치에 삼각형 형태로 상처를 냅니다. 아직 손끝의 모세혈관이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가장 보편적으로 쓰는 일회용 바늘을 ‘란셋’이라고 하는데요. 회당 비용이 60~300원으로 다양한데, 저렴한 중국산은 불량품이 많았습니다.”
레이저 채혈기기 개발에 ‘1년’이면 충분하다고 장담했다. “하고 보니 1년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큰 장비를 작게 만드는 과정에서 광학 부품 코팅이 벗겨지거나 레이저에서 열이 발생하는 등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어요. 문제를 하나 개선하고 나면, 새로운 샘플을 받아보기까지 3~4개월이 걸렸으니 개발이 더딜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모든 오류를 잡아내고 1m짜리 레이저 발진기를 5㎝로 줄이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제품을 다 개발하고 나니 인허가 과정이 발목을 잡았다. “우리나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레이저 채혈기기에 대한 규정이 전혀 없었어요. 의료기기 승인을 위해 대학병원과 함께한 임상시험 결과자료는 물론이고 ‘레이저 수술과 의학(laser surgery and medicine)’ 등 SCI급 논문을 세 편 냈습니다. 란셋 채혈과 레이저 채혈을 했을 때 아이들의 산소포화도를 측정해 통증 점수를 매겼습니다. 레이저로 채혈하면 통증이 75%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죠.”
2017년 레이저 채혈기기 ‘핸디레이’를 출시했다. “피부과에서 피부재생에 주로 쓰는 프락셔널 레이저를 사용합니다. 레이저 조사 부위가 빨리 아물도록 고안된 레이저예요. 레이저가 피부에 접촉할 때 순간 강한 에너지가 발생하는데 0.00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주변 피부를 증발시켜 구멍을 내는 원리입니다. 레이저를 쏘는 동시에 살균이 되기 때문에 바늘로 하는 채혈보다 훨씬 안전합니다. 고통도 상처도 없고요.”
채혈 과정에서 일어나는 2차 감염 문제를 없앤 것은 물론, 비용 면에서도 장점이 뚜렷하다. “의료폐기물은 란셋 채혈의 10분의 1 수준이죠. 유일한 단점은 가정용 제품이 20만원대로 초기 비용이 비싼 편이라는 점인데요. 개별 채혈 단가는 비슷하거나 더 저렴합니다. 핸디레이 수명은 약 2만회로 채혈 한 번에 40원꼴입니다.” 현재 온라인몰 메타샵(https://metashop.co.kr/)에서 한정 최저가 공동구매 행사를 하고 있다.
장점을 내세워 국내외 홍보를 열심히 했다. “유럽·북미·동남아 등 세계 각지에서 관심을 보였지만 개별 국가의 인허가를 받아야 했어요. 이때 SBA(서울산업진흥원)의 도움이 컸습니다. SBA 산하 서울지식재산센터를 통해 ‘IP바로지원사업’으로 해외 권리 사업을 무사히 마쳤어요. 덕분에 국내 30건 이상, 해외 20건 이상의 특허를 취득할 수 있었죠.”
모든 절차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영업을 하려고 하니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했다. “국내에서 드문드문 들어오는 주문으로 직원들 월급을 겨우 마련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중국의 한 의료기기 회사에서 투자하겠다고 접근해서 기술을 넘겨달라고 한 일도 있었어요. 단 1%의 마음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한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블루오션에서 레드오션까지
엔데믹(풍토병) 시대에 접어들면서 하늘길이 다시 열렸다. “도약을 위해 한동안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이 화장품 흡수를 돕는 레이저 미용기기 ‘퓨라셀’도 개발했어요. 홍콩,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와 수출 계약도 맺었죠. 최근엔 미국 출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전자제품 박람회 CES 2023에 초청돼 ‘혁신상’을 받으러 갑니다.”
지난 20년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레이저 의료기기는 레드오션이 됐다. “미국, 독일,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레이저’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처치가 언젠간 모두 레이저로 대체될 것이라고 봐요. 최근엔 약을 주입하는 레이저 주사기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레드오션 속에서도 먹잇감이 될 아이템은 분명히 있어요. 먼저 찾아 먹는 사람이 임자죠.”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