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 민주주의자 아니거나 민주주의 모르거나
[이철희의 돌아보고 내다보고] 15 _‘패왕적 스트롱맨’의 등장
문화나 제도적 영향보다는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정치 행위자들의 민주주의, 특히 의회에 대한 생각이 매우 중요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엿장수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이유도 제왕적 제도나 권위주의 문화가 아니라 그의 민주주의관, 즉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에서 찾는 게 합리적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2022년 인수위 때부터 줄곧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대통령 임기 5년이 뭐가 대단하다고, 너무 겁이 없다.” 이 말을 한 그가 대통령이 되더니 겁이 없어도 너무 없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해놓고 자신에게 무조건 복종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내친다. “검사가 수사권 가지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냐”고 일갈했던 사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 검찰수사를 통한 보복에 여념이 없다. 왜 이러는 걸까?
기디언 래크먼은 자신의 책 ‘스트롱맨’(strongman)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아니 무너뜨리는 지도자를 스트롱맨이라고 개념화했다. 스트롱맨은 개인화된 통치방식으로 국가를 이끌고, 법과 제도보다 자신의 본능을 앞세운다. 스트롱맨에게 법은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반대파를 탄압할 때 사용하는 정치 무기일 뿐이다. 이 특징을 설명하면서 래크먼은 스탈린 시대 비밀경찰의 수장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의 발언을 소환한다. “누군지 알려주면, 내가 그 사람의 범죄를 찾아내겠다.” 스트롱맨은 비판 언론을 극도로 싫어하고 통제하려 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바로 그 현상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사 출신이다. 수사를 통해 세상을 바꾸자 하는 특수부 검사,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정체성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정의 중독’에 중독되어 있다. 게다가 특수 수사를 할 때 으레 겪는 외압과 저항의 경험으로 인해 이런 고난과 반대를 뚫고 정면돌파해야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일종의 헤라클레스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듯하다. 매사를 선악의 대결로 보는 세계관을 갖고 있으니 그에게 타협과 양보는 금기다.
문제는 이런 ‘만들어진 캐릭터’가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제도나 문화가 이런 성격이나 품성을 제어할 수도 있고, 증폭시킬 수도 있다. 그럼 제도 탓일까, 아니면 문화 때문일까? 흔히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대통령의 권력이 지나치게 센 건 맞다. 최근 우리가 실감하고 있듯이 대통령이 검찰과 경찰 등을 동원한 사정권력으로 겁박하면 ‘제왕적’이란 수식어조차 부족해 보인다. ‘패왕적’이란 형용사가 제격이다.
그런데 제도적 권한으로 보면 한국의 대통령은 제왕적이지 않다. 단적으로, 미국 대통령의 행정명령이나 브라질 대통령의 포고령같이 국회의 교착상태를 돌파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한국에서 제왕적 대통령 현상은 대통령이나 행정부의 행정입법인 시행령에 대한 재량권 행사에 입법통제나 사법통제가 어렵고, 검찰이나 국정원과 같은 권력기관의 선별적 동원에 대한 견제가 어려울 때 가능하다.”(박용수,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론에 대한 비판적 시론’) 따라서 제도나 권력의 편법적 활용, 비공식적 관행이 엄연한 건 사실이나 그것만으로 지금의 황제놀음을 온전히 해명하기 어렵다.
2017~2022년의 7차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의회나 정당에 의해 견제되지 않는 강한 리더’에 대한 선호가 이례적으로 높은 나라다. 조사 결과 한국의 긍정 답변은 약 67%인데, 미국의 38%나 독일의 24%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이런 정서가 대통령을 제왕처럼 행세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해석도 가능하긴 하다. 그런데 이 수치는 1990년대 중반 조사의 31.7%에서 20여년 만에 2배 넘게 늘어난 것이다. 민주화 이후 겪는 혼란에 대한 반작용, 민주주의에 익숙해져 가는 적응 비용 등의 반영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문화적 접근은 틀렸다. 다만, 흔히 조폭에 비유하는 검찰 문화를 거론할 순 있겠다.
문화나 제도적 영향보다는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정치 행위자들의 민주주의, 특히 의회에 대한 생각이 매우 중요하다. 의회주의는 루소의 ‘일반의지’나 추상적인 민족정신 또는 국민 의사처럼 단일한 그 무엇이 아니라 “인민의 의지는 알기 어렵다는 전제 하에서 다양한 관점을 가진 정치 세력들이 이성에 기초한 숙의를 통해서 인민의 의지를 알아가고 형성해 가야 한다는 입장이다.”(권형기, ‘포스트나치 독일의 민주주의’) 윤석열 대통령이 엿장수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이유도 제왕적 제도나 권위주의 문화가 아니라 그의 민주주의관, 즉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에서 찾는 게 합리적이다.
민주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든 결국 ‘민’이 ‘주’라는 얘기다. 싫든 좋든, 옳든 그르든 공직자는 국민의 뜻을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 그 ‘뜻’을 읽는 지표로 흔히 여론조사가 활용된다. 그런데 조사기법을 핑계로 불신하거나 “역사와의 대화” 운운하며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태도도 가당찮지만, 많이 양보하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하지만 선거로 드러난 민심까지 거부해선 안 된다. 선거 결과를 부정하면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 없다. 아니 무너진다. 현실적으로 국민이 늘 주권을 행사할 수 없으니 그 권한을 의회에 위임해 놓는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 다른 말로 의회 민주주의다. 대통령은 국민을 대표하고 대신하는 의회에 성실하게 보고하고 설명해야 한다.
윤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이런 결론이 불가피하다. 그는 민주주의자가 아니거나 민주주의를 모른다! 스트롱맨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이런 말을 했다. “민주주의는 트램과 같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그 안에 타고 있어야 한다.” 도착, 즉 대통령이 된 후 윤 대통령은 트램에서 내렸다. 국민이 요구하든 의회가 견제하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공적 마인드는 품절이고 ‘메타 인지’는 사치다. 그에게 비판과 견제는 개구리 낯짝에 물 붓기에 불과해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의 생각을 선의로 촌탁해 보면 샤를 드골이나 마거릿 대처를 추종하는 듯하다. 헨리 키신저는 책 ‘리더십’에서 드골의 리더십을 ‘의지의 전략’으로, 대처의 그것을 ‘신념의 전략’으로 표현했다. 드골은 프랑스의 쇠퇴는 의회와 정당에 기초한 분파적 갈등 때문이므로 대통령이 단일한 인민의 의지를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드골과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이런 생각 때문에 프랑스는 민주주의 후퇴와 정치 불안을 한동안 겪어야 했다. 대처는 ‘사회 같은 것은 없다’며 영국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거칠게 밀어붙였다. 오늘날 영국이 겪고 있는 정치적 혼란과 국가적 쇠락은 대처로부터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다. 그래서 더 두렵고, 더 걱정된다.
래크먼에 따르면, 스트롱맨이 처음 등장할 때 많은 사람이 속았다고 한다. 그를 개혁가로 오인했다는 얘기다. “스트롱맨 지도자를 처음에 자유주의 개혁가로 오인하는 일은 하나의 패턴이다.” 튀르키예의 에르도안이 처음 집권했을 때 뉴욕타임스는 ‘민주적 다원주의를 지지하는 이슬람 정치인’으로 묘사했다. 시진핑이 ‘다시 경제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어쩌면 정치적 긴장도 완화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을 아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했고,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민주적 지도자’로 평가했다. 푸틴, 시진핑, 에르도안은 전형적인 스트롱맨이다. 우리도 속았다.
지난 8월25일~27일 실시한 ‘시사인’의 여론조사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2007년 조사 이후 처음으로 국가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대통령실이 국회에 뒤졌다. 10점 만점에 대통령실은 2.75, 국회는 3.38을 기록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고점 5.72나 문재인 대통령의 5.86에 비하면 한참 바닥이다. 그래서 심리적 탄핵이란 말까지 나온다. 하지만 그는 오불관언(어떤 일에 상관하지 않고 모르는 체함)이다.
그가 생각을 바꾸면 좋겠다. 5년짜리 대통령이란 두려움을 갖고, 국민에게 충성하고, 검찰을 놓아주면 좋겠다. 그게 그도, 우리도 사는 길이다. 헛될 기대인 줄 알지만 그래도….
이철희 | 방송에서 정치평론을 하다 정치에 나서 20대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 마지막 정무수석을 지냈다. 2020년 ‘대통령 탄핵 결정요인 분석: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 비교’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인자를 만든 참모들’ ‘정치가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등의 책을 냈고,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등의 역서가 있다. 우리 정치가 어쩌다 이렇게 나빠졌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나아질 것인지 등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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