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 큐를 15년 이상 쥔 34세 선수가, 1·2세트를 모두 헌납한 최악의 출발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결국 7세트 결승에서 역전 우승을 완성했다. 2026-27시즌 프로당구(PBA) 개막전 '우리금융캐피탈 PBA-LPBA 챔피언십' 남자부 결승, 조건휘(34·웰컴저축은행)가 프로당구 간판 조재호(46·NH농협카드)를 세트스코어 4-3으로 제압하며 정상에 서는 순간, 고양 킨텍스 PBA 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관중은 그 집요한 뒤집기에 일제히 환호했다. 단순한 개막전 우승을 넘어, 이 경기는 PBA 차세대 주역 자리를 둔 세대 간 경쟁의 한 챕터를 조건휘가 또 한 번 자신의 손으로 썼음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조재호는 PBA 역사를 통틀어 가장 완성도 높은 선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남자부 대상 2회 연속 수상, 통산 5회 우승, 누적 상금 랭킹 3위(9억8250만 원)라는 숫자는 그가 단순히 '경험 많은 베테랑'이 아니라 여전히 현역 정점에 있는 선수임을 수치로 입증한다. 올 비시즌에는 다리 부상으로 훈련에 공백이 생겼음에도 헬스장을 다시 등록해 주 5~6일 체력을 끌어올렸다고 밝혔다. 실제로 결승 초반 그 준비는 고스란히 경기력으로 나왔다.
1세트는 19이닝에 걸친 장기 소모전이었다. 조재호가 12-15로 가져가며 기선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고, 2세트에서는 단 3이닝 만에 뱅크 샷 3개를 포함한 11점 하이런을 쏟아내며 3-15 완승, 세트스코어 2-0으로 달아났다. 이 시점에서 결승 분위기는 사실상 조재호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조건휘에게 이 국면은 낯설지 않았다. 지난 2024-25시즌 왕중왕전 '하나카드 하나캐피탈 제주특별자치도 PBA 월드 챔피언십' 결승에서 당시 18세였던 신예 김영원(하림)에게 2-4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역대 최연소 챔피언이 탄생하는 장면을 조건휘는 결승 맞은편에서 직접 목격해야 했다. 그 경험이 '벼랑 끝 상황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다잡느냐'에 대한 내공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번 대회에서 김영원은 32강에서 조기 탈락한 반면, 조건휘는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3세트부터 경기의 결은 완전히 달라졌다. 조건휘는 5이닝에서 7점 하이런을 앞세워 6이닝 만에 15-4로 세트를 따냈다. 단순한 1세트 만회가 아니라 조건휘가 리듬을 되찾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4세트는 이 경기의 하이라이트가 나온 세트다. 스코어 5-12, 포인트 차이로 보면 사실상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다. 여기서 조건휘는 8이닝에 하이런 10점을 터뜨려 15-12 역전을 만들어냈다. 한 이닝에 10점이라는 숫자가 이 장면의 무게를 설명해준다. 세트스코어 2-2 균형.
5세트에서도 조건휘는 초구에 하이런 5점을 꽂으며 템포를 주도했고, 8이닝 만에 15-12로 마무리하며 3-2 역전에 성공했다. 몰린 쪽은 이제 조재호였다. 조재호는 6세트를 8이닝 6점 하이런으로 탈환, 승부를 최종 7세트로 끌고 갔다.
운명의 7세트, 조재호가 4이닝째 4-3으로 앞선 상황에서 뒤돌리기 시도가 빗나갔다. 조건휘는 이 실수를 정확히 낚아채 뱅크 샷을 포함한 7점 하이런으로 11-4 완승, 대역전 드라마를 완성했다. 최종 세트스코어 4-3(12-15, 3-15, 15-4, 15-12, 15-12, 12-15, 11-4).

이번 우승으로 조건휘는 통산 3승을 쌓고, 우승 상금 1억 원을 더해 누적 상금 4억9550만 원, 상금 랭킹은 9위에서 6위로 껑충 뛰었다. 5억 원 돌파도 눈앞이다. 2024-25시즌 웰컴저축은행 챔피언십에서도 조재호를 결승에서 꺾고 2승을 기록했던 조건휘는 이번에도 같은 상대를 연파하며 'PBA 차세대 에이스' 타이틀의 실체를 다시 한번 증명했다.
조건휘는 우승 소감에서 눈에 띄는 말을 했다. "아침 운동, 오전 10시 훈련장 도착, 밤 9시 귀가, 씻고 넷플릭스"라는 일상. 화려한 전략도, 거창한 멘탈 관리 기법도 아니다. 매일 같은 루틴의 반복이 큰 무대의 압박을 덜어냈다는 고백이다. 명품에 관심이 없고, 초크 가루가 묻는 당구복 대신 저렴한 옷을 선호하고, 취미라 할 만한 것도 거의 없다는 그의 말에서 이 선수가 얼마나 일상의 무게 중심을 오로지 당구에 두고 있는지가 읽힌다.

이 점이 단순한 미담이 아니라 경기력의 구조적 원인으로 보인다. 0-2로 뒤진 상황, 4세트 5-12의 절벽에서 선수가 무너지는 이유는 대개 기술 부족이 아니라 심리적 과부하다. '훈련을 실전처럼, 실전을 훈련처럼'이라는 원칙을 반복 훈련으로 몸에 입혔기 때문에, 결승 무대가 그를 흔들기 어려웠던 것이다. 조재호의 상황도 주목할 만하다. 46세, 비시즌 부상, 그럼에도 6개 투어 만에 결승에 복귀한 것은 이 선수의 경쟁력이 아직 바닥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정말 우승할 줄 알았다"는 조재호의 말처럼, 7세트 뒤돌리기 실수 하나가 승부의 갈림길이었다.
바로 이 대목이 PBA 팬들이 두 선수의 라이벌 구도에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다. 세대교체라고 단정 짓기엔 조재호가 너무 강하고, 그렇다고 조건휘를 도전자로만 보기엔 이미 통산 3승이라는 커리어가 쌓였다. 팬 커뮤니티에서도 이미 다음 맞대결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으며, 두 선수가 서로를 자극하며 리그 전체 수준을 끌어올린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PBA 2026-27시즌은 이제 막 시작됐다. 6월 3일 강원도 정선 하이원리조트에서 열리는 2차 투어에서 조건휘가 시즌 연속 우승으로 달아날 것인지, 조재호가 빠르게 설욕전을 펼칠 것인지, 시즌 초반 주도권 싸움이 벌써부터 뜨겁다. 128강에서 애버리지 3.462를 기록하며 웰컴톱랭킹을 수상한 이태희 등 젊은 선수들의 성장도 또 다른 변수다. PBA의 권력 지형은 지금 이 순간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재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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