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거진천… 용이 내려앉은 풍요의 호수를 바라보다[박경일기자의 여행]

박경일 기자 2024. 10. 17.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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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일기자의 여행 - 눈도 몸도 즐거운 진천의 가을 걷기코스
용이 보이는 한반도지형 전망대
‘ㄹ’자 초평호 경관 감상 명소
낚시용 수상 좌대가 운치 더해
초평호 가로지르는 미르309
주탑 없는 309m길이 출렁다리
초롱길-미르숲 잇는 코스 완성
한옥 장인들이 지은 보탑사
아파트 14층 높이 거대한 목탑
못 안쓴 29개 기둥이 건물지탱
정철 위패 봉안한 정송강사
정치적 의도로 진천에 묘 이장
선조가 하사한 은 술잔도 전시
두타산 자락의 한반도지형 전망대. 초평저수지를 한눈에 전망하는 자리다. 저수지 수변의 지형이 한반도 형상을 닮았다는 데는 쉽게 동의할 수 없지만, 전망대가 보여주는 파노라마 경관은 훌륭하다.

진천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운치 있는 호반 길이 진천에 있다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 충북 진천을 말할 때 들먹여지곤 하는 말이다. ‘살아서는 진천이요, 죽어서는 용인’이란 뜻이다. 왜 하필 진천이고 용인일까. 전해지는 몇 개의 이야기가 있다. 먼저 ‘추천석’이란 이름을 쓰는 동명이인 얘기부터. ‘용인 사는 추천석’을 데려와야 하는 저승사자가, 그만 ‘진천 사는 추천석’을 끌고 오면서 소동이 벌어진다. 잘못 데려온 진천 사는 추천석을 되돌려보내긴 했는데, 문제는 장사를 지내 육신이 사라지고 없어졌다는 것. 갈 곳 없어진 추천석은 관아를 찾아가 ‘나는 어디서 살아야 하나’를 묻는다. 이때 내린 사또의 판결이 ‘살아서는 진천에, 죽어서는 용인으로’ 가라고 했다던가.

다른 버전 이야기도 있다. 이번에는 진천 사는 ‘허생원의 딸’이 주인공이다. 용인으로 시집간 허생원의 딸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큰아들은 진천에서, 작은아들은 용인에서 살았다. 남편이 죽고 허생원 딸이 진천으로 개가하자 두 아들이 서로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다투다 송사를 벌였단다. 어머니의 거처를 놓고 내린 관아의 판결이 ‘살아서는 새아버지가 있는 진천에서 살고, 죽은 뒤에는 용인에 모시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판결은 싱겁다. 무릎을 치게 하는 반전도, 격한 공감도 없다. 사실 주인공이 추천석이든, 허생원 딸이든 무슨 상관일까. 생거진천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들이 넓고 기름지며 가뭄과 큰물이 들지 않아 농사가 잘돼 ‘살려거든 진천 땅에서 살라’는 뜻일 테니. 정황상 생거진천의 유포자는 진천인 듯하다. 그랬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제 땅에 대한 자신감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수 있으니까. 덧붙여 사거용인이란 ‘죽어서는 산세가 준수해 사대부들의 유택이 많은 용인 땅에 묻히라’는 이야기다.

‘살아서 진천’이란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계절이 가을이다. 봄도 못지않지만 진천이 가진 아름다움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계절은 단연 가을이다. 진천에서 가을 경관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걷는 것’이다. 가을의 한복판을 걷는 길이 진천에 있다. 초평저수지 수변 덱을 따라 이어지는 ‘초롱길’이다.

초평저수지를 건너가는 출렁다리 ‘미르309’. ‘미르’는 용을 이르는 순우리말이다.

# 출렁다리로 순환코스가 완성되다

초롱길은 걷기 좋은 길이다. ‘걷기 좋다’고 말할 때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진짜 ‘걷기가’ 좋다는 뜻. 몸과 발이 편하다는 얘기다. 다른 하나는 길 주변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걷기 즐겁다는 의미다. 오르막이나 내리막 구간이 아주 없진 않지만, 초롱길은 거의 대부분 구간이 평지와 다름없이 순하다. 부드러운 흙길이라 걷는 내내 발밑을 보지 않고 걸어도 될 만큼 편안하다. 게다가 초평저수지를 끼고 있는 수변 길 주변의 풍경이 빼어나다. 몸도, 눈도 즐거운 길이란 얘기다. 누구를 데려와도 ‘아 좋다’고 감탄할 만한 길이다.

초롱길이란 길 이름은 ‘초평저수지’와 ‘농다리’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지었다. 이름처럼 초롱길은 진천의 명소인 초평저수지와 농다리를 잇는다. 초롱길은 농다리에서 시작해 초평저수지 수변 길을 따라간다. 길 끝에는 저수지의 가장 좁은 목을 건너는 93m 길이의 ‘하늘 다리’가 있다. 초롱길을 걷는 이들은 하늘 다리를 ‘반환점처럼’ 썼다. 초롱길을 걷는 이들은 누구나 하늘 다리까지 가서 다리를 건너갔다가 간 길을 되짚어 돌아왔다.

초롱길이 참 좋긴 했는데, 짧기도 한데다 원점회귀도 할 수 없어 아쉬웠다. 그런데 지난 2월 초평저수지에 출렁다리 ‘미르309’가 완공됐다. 저수지 양쪽에 와이어를 이어서 만든 자그마치 309m 길이의 출렁다리다. 다리만 놓았다면 따라붙는 수식어가 ‘국내 최장’이다. 미르309도 타이틀을 하나 가지고 있다. ‘주탑이 없는 출렁다리 중 최장’이다. 가운데 하중을 지탱하는 주탑이 없으니 출렁거림이 심한 편이다.

미르309가 놓이면서 초롱길은 원점회귀의 순환길로 이어졌다. 이쪽과 저쪽에 하늘 다리와 미르309가 놓이면서 초롱길과 미르숲길이 한데 이어져 초평저수지 수변을 한 바퀴 도는 코스가 만들어진 것이다. 출렁다리를 놓고 시류에 편승한 무분별한 지자체의 베끼기식 사업이란 비판도 있지만, 미르309는 경우가 좀 다르다. 다리 자체보다는 ‘원점회귀 도보 코스 완성’이라는 목적이 있었으니까.

# 초롱길과 미르숲, 잘 걷는 법

미르309를 놓자 초롱길과 미르숲의 걷기 여행자 유입 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적하던 농다리 일대는 초롱길을 찾는 이들이 폭증하면서 관광객으로 붐빈다. 원점회귀의 순환코스가 만들어졌으니, 사실 굳이 붐비는 곳을 시작지점으로 택할 이유는 없다. 굳이 농다리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걷기 길 어디서 시작하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걷기 여행의 시작지점으로 추천하는 곳은 ‘진천군 청소년 수련원’이다. 여기서 호안을 따라 걷다가 미르309를 건너서 농다리를 본 뒤, 초롱길을 따라 하늘 다리를 건너 수련원으로 돌아오면 된다. 이 길이 짧아서 아쉽다면 뒤로 더 물러나서 ‘초평호 다목적광장’을 출발지로 삼아도 좋겠다. 널찍한 주차장이 마련돼 있어 걷기를 시작하고 마무리하기에 편하다.

다목적광장에서 청소년수련원까지 물을 끼고 걷는, 운치 있는 나무 덱 길이 이어진다. 이 길 위에 명소가 있다. ‘쥐꼬리명당’으로 불리는 외딴 음식점이다. 쥐꼬리명당이란 아마도 풍수지리에서 보이는 ‘서미혈(鼠尾穴)’이란 명당을 말하는 것이리라. 서미혈은 산줄기가 마치 쥐꼬리처럼 길게 이어져 내려온 지형의 명당을 말한다.

식당의 특별함은 배를 타고 들어가야만 하는 ‘물 건너편에 있다’는 것이다. 식당에 전화를 걸어서 마중 나오는 작은 모터보트를 타고 들어간다. 배를 타는 자리쯤의 수변길 나무 덱에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적은 유머러스한 식당소개와 전화 번호를 적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장사를 시작한 지는 을매 안됐슈, 45년 쪼매 넘었네유.(1973년부터 눈물로 버텨 왔어유) 음식은 1시간 정도 걸려유. 여유 많은 양반들은 넘어와유∼. 급한 분들은 꼭 예약 미리 허시고!”

그렇다면 음식 맛은 어떨까. 그 대답도 현수막에 있다. “음식 맛이유? 얼추 드실 만할 거예유. 으찌 그 까다로운 입맛을 다 맞춘대유? 안 그류? 근디 쌀이고 뭐고 찬거리는 앵간해서 손수 농사지은 거구유, 고추장이니 된장이니 각종 장류도 직접 담가 쓰는 거네유.”

식당의 주력은 닭볶음탕과 닭백숙. 주인은 ‘얼추 먹을 만하다’고 했지만, 그 수준은 훨씬 넘는다. 이곳의 음식이 아무리 맛있다 한들, 가을날 근사한 호반의 정취에 앞설까. 물가에 지은 정자의 야외 평상에 앉아 먹는 음식이라면 뭐든 맛있지 않을까.

쥐꼬리명당에서는 신발 끈 단단히 묶고 걷기에 나선 일행이 친구들과의 막걸리 몇 순배에 걷기를 작파하고 풍류나 즐기는 모습을 적잖이 목격할 수 있다.

초평저수지에 떠 있는 낚시용 좌대. 수상마을 같은 이국적인 느낌이다.

# 호수를 내려다보는 근사한 자리

호반을 따라 걸으면서 보는 초평저수지도 좋지만, 뒤로 멀찌감치 물러서서 보는 초평저수지 경관도 훌륭하다. 초평저수지는 충북에서 가장 큰 저수지다. 만수면적이 77만7000여 평(256만8606㎡)에 달한다. 저수량이 1378만t으로 진천군은 물론이고, 청원군 6개 면에 물을 댄다. 저수지 본연의 목적은 홍수예방과 용수공급이지만, 나지막한 구릉성 산지에 둘러싸인 굴곡이 심한 ‘ㄹ’자 형상의 초평호는 산중호수를 닮은 경관 명소다. 관광지로도 톡톡히 이름값을 한다는 얘기다.

초평저수지를 보는 전망대가 있다. 저수지 남쪽 두타산(596m)자락에 있는 ‘한반도지형 전망대’다.

‘초평호 붕어마을’로 불리는 초평면 화산리에서 잘 포장된 시멘트 도로를 따라 단숨에 오르면 두타산 칠분 능선쯤에 한반도지형 전망공원을 만나게 된다. 이 공원 한복판에 우주선을 닮은 나선형의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의 높이는 해발 340m쯤 된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저수지 전체의 모습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수면 위에 점점이 떠 있는 낚시용 수상 좌대가 마치 남국 휴양지의 근사한 리조트처럼 보인다. 호수가 둘러싼 땅의 지형이 한반도 형상이라는데, 아무리 봐도 동의할 수 없다. ‘무엇과 닮았다’는 게 관광객의 눈길을 끌던 시절의 작명이다.

가장 경관이 좋은 자리에다 세우는 전망대가 전제하는 건 ‘이목 집중’이다. 훌륭한 경관을, 더 높은 곳에서 더 큰 스케일로 감상하기 위한 공간이 전망대다. 탄성을 부르는 경관의 정점인 셈이다. 그런데 한반도지형 전망대는 인기가 별로 없다. ‘주목받지 못하는 전망대’라니 어쩐지 쓸쓸한 느낌이지만, 이런 처지와 상관없이 전망대에서 보는 경관은 훌륭하다. 따로 시간을 내서 찾아가 보기를 추천한다.

전통건축 장인들이 세운 보탑사의 3층 목탑.

# 건축으로 만든 종교적 아름다움

진천에는 보탑사가 있다. 천년고찰은 물론 아니고, 전통사찰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른바 ‘신상(新商)’ 절집이다. 생각해보면 유서 깊은 절집의 종교와 미감을 지탱하는 건 대개 ‘오래된 시간’이다. 사찰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의 구할쯤은 ‘건너온 세월’에서 나온다. 묵은 시간이 건축에 스미고, 간절한 기원이 법당에 쌓여서 만들어진 미감이다. 새로 지은 절집은, 죽었다 깨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보탑사는 좀 다르다. 근래 지은 절인데 이상하게도 묵직한 종교적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그 중심에 건축이 있다. 그것도, 그냥 건축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건축이다.

사찰의 형태를 두루 갖춘 게 2003년의 일이나 보탑사는 고작 20년 내력의 절집이다. 본래 고려 시대 절터에 보탑사를 짓기 시작한 건 1992년. 절집을 짓는 데 내로라하는 최고의 인력을 투입했다. 신영훈 대목수를 비롯한 한옥의 각 분야 장인들이 보탑사 건축을 위해 모여들었다. 이른바 ‘전설의 인물’들이다. 단청화사 한석성, 도편수 조희환, 소목장 심용식, 와공 윤주동, 석공 김익진, 야철장 최교준, 조각장 이진형…. 이들이 의기투합해 1996년 보탑사의 중심 격인 3층 목탑을 완공했고, 이어 지장전, 영산전, 산신각 등을 차례로 지었다. 이렇게 사찰구성을 마친 게 2003년이다.

보탑사에서 가장 눈부신 게 3층 목탑이다.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을 모델 삼아 강원도산 소나무로 지은 3층 목탑은, 이름만 ‘탑’이지 실은 거대한 불전이다. 높이 42.7m로 아파트 14층 높이와 맞먹는다. 놀라운 건 이만한 건물을 만들면서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짜 맞춘 29개 기둥이 전체 건물을 지탱하고 있다. 회향식 때 1500명이 올라갔으나 견고한 짜맞춤으로 지은 목탑은 끄떡없었다. 3층 목탑 완공 당시 장인들은 ‘1000년’을 장담했단다.

목탑의 1층은 사방불전을 봉안한 대웅전이고, 2층은 한번 돌리는 것만으로 불경 한 권을 읽은 공덕으로 친다는 윤장대를 설치해놓은 법보전이다. 그리고 3층은 미륵삼존불을 봉안한 미륵전이다. 미륵불 위에는 티베트에서 가져온 금판을 붙였다. 목탑을 바깥에서 봐도 탄성이 나온다. 1, 2, 3층이 중첩되는 처마 곡선의 생동감과 화려함이 근사하다. 각 층마다 색과 무늬를 다르게 낸 단청은 또 어떻고….

보탑사의 다른 법당들도 저마다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지장전은 지붕 양 끝을 석조건물처럼 마무리해 고구려 장수왕릉을 재현했으며, 귀틀집 형식으로 지은 산신각은 너와 지붕을 얹었다.

# 송강 정철이 진천에 있다

송강 정철. 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생전의 그는 진천과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한양에서 났고, 담양에서 공부했으며 쉰여덟 나이에 강화도에서 죽었다. 그런데 그의 묘가 진천에 있다.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환희산 아래다.

죽어서 경기 고양에 묻힌 그를, 72년이 지난 뒤에 다시 꺼내 진천으로 옮긴 건 성리학의 거두 우암 송시열이었다. 정철의 후손으로부터 ‘묘에 물이 찬다’는 하소연을 듣고 송시열은 묘지 이장에 팔을 걷어붙였다. 뭐 그럴 수야 있는 일. 그런데 왜 하필 진천이었을까.

송시열이 정철의 묘를 진천으로 옮긴 건 정치적 행보였다. 우암은 영남계 서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충북 지역에다 서원 여러 개를 세웠다. 서인의 영수였던 묘소를 진천으로 옮긴 것도 같은 이유였다. 죽은 뒤에도 정철의 묘가 정치적 용도로 쓰였던 셈이다.

진천에는 송강 정철의 묘와 함께 그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사당 ‘정송강사(鄭松江祠)’가 있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정철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 또 있을까. 가사 문학의 대가로 손꼽히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선비를 죽음으로 내몬 잔혹한 정치가란 평가도 있다. 조선 최대의 정치적 참사로 꼽히는 기축옥사 때 그는 반대파인 동인 세력을 뿌리 뽑으려는 의도로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칼날 아래 1000명이 넘는 선비들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의 3대 사화’ 희생자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숫자였다.

그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엇갈렸는지를 당시의 기록을 통해 대화체로 구성해본다. 먼저 같은 편인 서인 신흠이 말하는 정철에 대한 평가. “평소 품격이 소탈하고 대범하고 타고난 성품이 맑고 밝았어요. 집에서는 효도하고, 벼슬할 때는 결백했습니다. 한 마디로 ‘옛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훌륭한 인물이지요.” 선조실록은 이와는 정반대의 평가를 담고 있다.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했습니다.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하기도 했지요.” 학자 기대승은 정철을 ‘청결한 수석(水石)’에 비유했는데, 율곡 이이는 정반대로 ‘강직하지만, 속이 좁아 병통’이란 박한 평가를 내렸다.

평가는 발언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지만, 같은 사람이 다른 말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정철에 찬사를 보내며 칭찬했던 이가 어떤 때는 독설을 쏟아부으며 비난했다. 대표적인 게 선조임금이다. 평소 정철을 강직하다며 칭찬해 마지않았던 선조는, 그가 죽자 ‘독기(毒氣)로 사람을 해친 자(者)’라고 형편없이 깎아내렸다.

훗날 선조는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고 힐난했지만, 그 전에 주위 신하들로부터 ‘정철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주벽이 심하다’는 얘길 듣곤 ‘이 잔으로 하루 한 잔만 마시라’는 뜻으로 은으로 만든 작은 술잔을 하사한 적도 있다. 신하 사랑이 이토록 애틋할 수 있을까. 과연 정철은 선조의 분부대로 술을 한 잔만 마셨을까. 여담이지만, 정철은 작은 은잔을 망치로 두드려 사발 크기로 늘린 뒤 거기 술을 담아 마셨다고 전한다. 정송강사의 기념관에는 선조가 하사한 은배가 전시돼 있다. 진짜는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고, 진열해놓은 넓적한 은배는 가품(假品)이라는데, 그게 두드려 크기를 늘린 건지, 본래 잔이 그만했는지는 알 수 없다.

■ 경건함으로 가득한 배티성지

충북 진천에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인 ‘배티성지’가 있다. 배티성지는 천주교 박해기에 형성된 신앙공동체로 출발한 공간. 조선인으로는 김대건 신부에 이은 두 번째 천주교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사목활동 거점이었기도 했다. 성지에는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을 비롯해 한국교회 박해사와 최양업 신부의 생애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박물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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