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4)를 먼저 공급하면서 그동안 HBM 시장을 주도해온 SK하이닉스의 행보에도 관심이 쏠린다. HBM3E 시대에 사실상 절대강자였던 SK하이닉스가 이번 HBM4 세대 전환에서는 삼성에 선수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첫 공급' 타이틀보다 HBM3E의 주력 구도를 지키는 전략적 선택에 나섰다는 평가가 제기된다. 이와 함께 HBM4를 재설계한 뒤 기술완성도를 앞세워 중장기 주도권을 노린다는 해석도 나온다.
HBM3E 풀가동 속 늦어진 HBM4
SK하이닉스는 5세대 HBM인 HBM3E로 엔비디아를 비롯한 주요 인공지능(AI) 반도체 고객사를 확보하며 시장을 주도해왔다. 시장조사 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2분기 기준 HBM시장에서 SK하이닉스는 약 62%의 점유율을 보이며 경쟁사들을 크게 앞섰다. 마이크론과 삼성전자가 각각 약 21%, 17%로 2·3위라는 점을 고려하면 SK하이닉스의 독주에 가깝다.
올해 역시 HBM3E 중심의 출하로 수익성을 이끌 것으로 전망된다. AI 투자 확대와 함께 HBM 주문이 예상치를 크게 웃돌면서 생산라인은 사실상 풀가동 상태다.
SK하이닉스는 HBM3E 양산이 본격화되던 시점부터 차세대 HBM4 개발에 착수했다. 초기에는 HBM3E의 연장선에서 성능과 적층 수를 확대하는 방향이었고 당초 일정 또한 고객 검증과 양산전환을 비교적 빠르게 진행하는 시나리오가 검토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엔비디아를 비롯한 주요 고객사의 차세대 AI가속기 설계가 구체화되면서 HBM4에 요구되는 사양이 당초 예상보다 크게 높아져 인터페이스와 전력구조 전반의 추가 조정이 불가피해졌다. 이 과정에서 SK하이닉스는 기존 설계를 유지한 채 일정을 밀어붙이기보다 제품 구조를 재정비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술 난도가 높아진 차세대 제품을 경쟁사보다 일찍 공급한다는 상징성 대신 본격적인 양산 국면에서의 안정성과 수율을 택했다는 것이다.
속도 택한 삼성, 완성도 택한 하이닉스

반면 삼성전자는 정반대의 출발선에 서 있었다. HBM3E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뒤처졌던 삼성은 HBM4로 시장의 흐름을 돌려야 할 필요성이 컸다. 이에 HBM4에서 고객사의 요구를 넘어서는 대역폭과 속도 등을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첫 공급자'라는 상징성도 갖는 전략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엔비디아 퀄테스트(품질검증)를 빠르게 통과하고 초기 공급에 성공한 비결도 여기에 있다. HBM4는 차기 기술로만 거론되는 단계가 아니라 엔비디아의 차세대 AI가속기에 실제 탑재가 예정된 제품이라 삼성으로서는 HBM4를 가장 먼저 공급했다는 사실이 기술경쟁력과 신뢰도를 동시에 보여주는 신호가 될 수 있어 절치부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HBM4의 초반 주도권 경쟁은 기술의 우열보다 각 사가 처한 상황에서 택한 전략 차이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반도체 업계의 시각이다. 삼성은 HBM4로 판을 흔들 필요가 있었고, SK하이닉스는 이미 장악한 HBM3E 시장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에 HBM4에서 다른 결과가 나온 셈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SK하이닉스가 초기 HBM4 경쟁에서 삼성에 자리를 내준 것을 단순힌 전략적 선택에 따른 차이로만 볼 수는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HBM4부터 로직다이의 역할이 성능과 전력효율을 좌우할 핵심 요소로 부상한 가운데 이 지점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간의 구조적 차이가 드러났다는 시각이다.
삼성전자는 자체 파운드리를 활용해 HBM4 로직다이를 4nm(나노미터)급 첨단공정으로 생산해 설계와 공정최적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반면 SK하이닉스는 로직다이 생산을 대만 TSMC 등 외부 파운드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업계에서는 이런 차이가 인터페이스 최적화와 일정 대응, 공급안정성 측면에서 경쟁력 격차로 이어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여기에 HBM3E에 역량을 집중한 전략이 HBM4 개발속도를 제약했다는 시각도 있다. HBM 주문이 급증하면서 인력과 공정 자원이 HBM3E 대응에 쏠렸고 HBM4는 일정 조정과 재설계를 거치며 개발속도가 상대적으로 더뎠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재설계까지 거쳤다는 점은 초기 설계단계에서 경쟁사 대비 완성도가 충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평했다.
HBM4 세대전환이 본격화되면서 경쟁구도는 더욱 복잡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과 SK하이닉스의 양강구도에서 마이크론도 후발주자로서 시장 진입 시점을 저울질하고 있기 때문이다. HBM4 경쟁은 단순한 제품 출시를 넘어 AI 반도체 산업 전반의 주도권을 가를 장기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한동안 반도체 업계의 이목을 끌 것으로 보인다.
장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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