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런의 시대와 '홈런왕' 애런 저지

1994년 메이저리그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구단주 그룹과 선수 노조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시즌 완주에 실패했다. 8월13일부터 중단된 리그는 장기간 파업에 돌입하면서 포스트시즌도 하지 못했다. 월드시리즈 우승 팀 명단에서도 유일하게 공란(空欄)이다.

이듬해 메이저리그는 돌아왔다. 하지만 개막까지 갈등이 봉합되지 않아 144경기 체제로 이뤄졌다. 자신들의 이익만 고집한 대가는 혹독했다. 관중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경기 당 평균 관중 수가 전년 대비 약 20% 감소했다.

한동안 싸늘해진 메이저리그를 구한 건 '홈런'이었다. 1998년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의 홈런 대결로 인기를 회복했다. 전 세계가 주목했던 이 홈런 대결은 훗날 '스테로이드 시대'라는 민낯이 밝혀지면서 모두를 실망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홈런만한 만병통치약은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줬다.

홈런의 시대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홈런 버블
기록은 퇴색됐다. 그러나 흥행 공식은 분명해졌다. 사람들은 홈런에 열광하고, 리그는 홈런을 부추겼다. 투수가 던지는 공이 빨라지고 강해질수록 타자는 그 대응법을 홈런에서 찾았다. 2019년 경기 당 평균 1.39홈런은 스테로이드 시대를 넘어서는 수치다.

경기 당 평균 홈런 수 변화

1998 - 1.04개
1999 - 1.14개
2000 - 1.17개
2001 - 1.12개

2019 - 1.39개
2020 - 1.28개 <단축 시즌>
2021 - 1.22개
2022 - 1.07개
2023 - 1.21개


2019년 메이저리그는 홈런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너무 많이 나온 탓에 감흥이 없어질 정도였다. 그 해 나온 6,776홈런은 단일 시즌 최다 기록이었다.

비단 2019년뿐만이 아니다. 2021년 5,944홈런, 지난해 5,868홈런도 단일 시즌 3위와 4위에 해당했다(2위 2017년 6,105홈런). 2019년 미네소타와 뉴욕 양키스, 지난해 애틀랜타는 단일 시즌 300홈런을 넘게 때렸다(미네소타&애틀랜타 307홈런, 양키스 306홈런). 참고로, 스테로이드 시대 단일 시즌 팀 최다 홈런은 1997년 시애틀의 264개였다.

사무국도 홈런이 더 많아지는 건 경계했다. 인플레이 타구를 늘리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지난해 수비 시프트 제재가 대표적이다. 수비수 이동을 제한하면 타자들이 내야를 빠져나가는 타구를 양산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기울어진 접근법은 쉽게 바뀌진 않았다. 발사각도 이론이 정립된 타자들은 여전히 어퍼스윙을 앞세워 홈런을 노린다. 이로 인해 리그 타율은 계속 하락하는 반면, 홈런 생산력은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홈런 폭발의 시발점은 2017년이다. 2019년 홈런 기록은 대다수가 2017년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해 홈런 역사를 뒤흔드는 선수가 등장했다. 애런 저지였다.

애런 저지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홈런왕
저지는 처음부터 범상치 않았다. 2016년 8월14일 메이저리그 데뷔 첫 타석부터 홈런을 쏘아 올렸다. 양키스타디움 중앙 담장을 훌쩍 넘겼다. 예상 홈런 비거리 446피트는 <스탯캐스트>가 측정한 이래 양키스 최장거리 홈런 타이 기록이었다.

메이저리그 야수 신인 자격은 직전 시즌 130타수를 넘기지 않으면 유지된다(로스터 등록일수 45일 미만). 2016년 저지는 84타수만 소화하면서 2017년에 신인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예열을 마친 저지는 2017년 본격적인 첫 시즌에 155경기 52홈런을 터뜨렸다. 1987년 마크 맥과이어의 49홈런을 넘어서는 신인 최다 기록이었다.

저지는 신인왕을 비롯해 MVP 투표에서도 2위에 올랐다. 역사적인 출발이었다.

*2017년 MVP는 휴스턴 호세 알투베였다. 알투베는 204안타로 타격왕(.346)에 올랐다. 1위표 30장 중 27장을 획득했다(저지 2장, 호세 라미레스 1장). 하지만 이후 세부지표가 부각되면서 "저지가 MVP를 받았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저지는 <레퍼런스>와 <팬그래프> 승리기여도, 조정득점생산력에서 모두 알투베에게 앞섰다.

저지가 한 단계 더 올라선 건 2022년이다. 리그 지배력이 정점을 찍었다. FA를 앞두고 대폭발했다. 초반부터 무섭게 홈런을 몰아치더니 아메리칸리그 홈런 역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4월부터 10월까지 가장 큰 관심사가 저지의 홈런 신기록이었다.

본즈의 73호 홈런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최다 홈런은 2001년 배리 본즈의 73홈런이다. 1998년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도 70홈런, 66홈런을 기록한 바 있다. 그런데 이들은 전부 내셔널리그 소속이었다.

아메리칸리그 단일 시즌 홈런 기록은 양키스의 전유물이다. 1921년 베이브 루스, 1961년 로저 매리스는 양키스에서 각각 59홈런, 61홈런을 때려냈다. 2022년 저지도 62홈런으로 루스와 매리스의 계보를 잇는 양키스의 홈런왕이 됐다. 내셔널리그 세 타자들이 금지약물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저지의 62홈런은 실질적인 최고 기록으로 인정 받았다.

저지는 5년 전에 놓친 MVP 수상도 성공했다. 저지가 꺾은 선수는 오타니 쇼헤이였다. 투타겸업을 장착한 오타니도 저지의 MVP는 막을 수 없었다. 홈런이 가진 힘이었다.

63
올해 저지는 또 다른 대업에 나선다. 2년 전 자신을 넘어서려고 한다. 시즌 첫 33경기에서 타율이 0.197에 그칠만큼 매우 부진했는데, 5월초 각성한 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타자가 됐다. 5월5일 이후 97경기 성적은 타율 0.381, OPS가 무려 1.367에 달한다.

5/5일 이후 OPS 순위

1.367 - 애런 저지
1.050 - 바비 위트 주니어
1.045 -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
1.027 - 후안 소토

저지 '홈런이 가장 쉬웠어요'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같은 기간 저지는 45홈런을 날렸다. 4경기 연속 홈런, 4경기 4홈런 구간을 여러 차례 선보인 데 이어 8월15일부터 26일까지 10경기 9홈런을 몰아쳤다. 밀어치고, 당겨치는 타격을 자유자재로 하면서 마치 남들이 안타를 치는 것처럼 홈런을 쳤다.

2024 MLB 홈런 순위

51 - 애런 저지
41 - 오타니 쇼헤이
38 - 앤서니 산탄데르
37 - 후안 소토
37 - 마르셀 오수나


후반기 35경기 17홈런, 8월 23경기 12홈런을 때려낸 저지는 시즌 홈런 예상 수를 62개로 맞췄다. 2년 전과 동일하다. 2년 전 자신을 이기려면 남은 30경기 동안 12개를 더 보태야 한다.

저지의 타격감은 5월초부터 올라왔다. 이후 97경기에서 9.6타석 당 홈런 하나를 추가했다. 그 사이 가장 오래 홈런이 없었던 기간은 7월4일부터 11일까지, 36타석 동안 홈런이 없었다. 2년 전에 비하면 홈런이 없는 구간이 짧은 편이었다. 2년 전에는 앞선 기준처럼 시즌 첫 33경기를 제외한 이후 홈런 하나 당 타석도 더 소모됐다(11.1타석).

현재 저지는 583타석에 들어섰다. <팬그래프>는 저지가 총 714타석에 나올 것으로 예측한다. 남은 131타석에서 지금의 홈런 페이스를 단순 대입하면 13개를 더 기대할 수 있다. 실제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미지수지만, 이 기세라면 최종 64홈런까지 가능하다.

관건은 체력, 그리고 정면 승부다. 2년 전에도 접했던 상황이다. 대기록에 희생되고 싶은 상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지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타석이 늘어날 것이다. 이 경우 양키스는 2년 전처럼 저지의 타순을 1번으로 올리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면 저지의 견제를 막아줄 뒷타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다행히 양키스는 저지 못지않게 두려운 후안 소토가 버티고 있다.

저지는 9월 이후 공격력이 뛰어났다. 통산 9월 이후 169경기 타율 0.274, 장타율 0.613, OPS는 1.020이었다. 62홈런을 달성한 2022년에도 9월 이후 30경기 타율 0.380, 장타율 0.790, OPS 1.323이었다. '양키스의 중압감'을 이겨낸 선수답게 기록에 대한 부담도 잘 극복하는 모습이었다. 2년 전에 한 번 겪어본 경험 역시 남은 시즌 도움이 될 전망이다.

과거 홈런왕들의 추락, 여기에 홈런의 지나친 증가는 홈런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시대 최고의 홈런 타자가 홈런의 특별함을 선사하고 있다. '야구의 꽃'으로 불리는 홈런의 향기가 더 짙어질 수 있을지는 저지의 손에 달렸다.

- 이창섭

현 <SPOTV> MLB 해설위원
전 <네이버> MLB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