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재벌은 아닌데 억만장자만큼 쓴다… 美 경제 바꾸는 ‘숨은 부자들’
주택 대신 ‘주식·지분’ 선택한 실속파
전용기·럭셔리 시장 큰손 부상
억만장자처럼 대중의 주목을 받지는 않지만, 자산 규모가 수천만 달러에서 수억 달러에 이르는 이른바 ‘숨은 부자들’이 미국 경제를 바꾸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들이 소비와 투자 흐름을 바꾸며 미국 경제 전반에 새로운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을 움직이는 주체가 소수 억만장자에서 수십만 명 규모의 초고액 자산가로 넓어졌다고 입을 모은다.

◇ “옆집 아저씨가 알고 보니 500억 자산가”
프린스턴 대학교의 오웬 지다르(Owen Zidar) 경제학 교수가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자산 3000만 달러(약 452억 원) 이상의 ‘초부유층’은 미국에만 약 43만 가구에 달한다. 이 중 1억 달러(약 1501억 원)를 넘게 가진 ‘찐 부자’도 7만4000가구나 된다. 숨은 부자의 증가는 단순한 인구 증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WSJ은 설명했다. 지난 수십 년간 이들 초부유층 가구의 증가율은 전체 인구 증가율을 앞질렀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정체다. 이들은 모두가 아는 빅테크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아니다. 지다르 교수는 “이들 중 상당수는 대도시 화이트칼라가 아니라 지방에서 자동차 대리점을 운영하거나 중소 제조업을 영위하는 사업가들”이라고 분석했다.
이름은 생소하지만 탄탄한 자산을 쌓아온 이들은 지난 수십 년간 자산 가격 폭등기를 거치며 ‘조용한 부의 거인’으로 성장했다. 대중적 인지도는 낮지만, 실질적인 부의 규모는 억만장자에 준하는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 부자는 ‘집’에만 올인하지 않는다
이들의 부가 급증한 배경에는 전략적인 자산 포트폴리오가 있다. 일반적인 미국 가정은 자산의 대부분이 내 집 한 채에 묶여 있다. 집값이 오르면 기분은 좋지만 실질적인 현금 흐름이나 자산 증식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
반면 상위 0.1% 부자들은 달랐다. 이들 자산의 72%는 주식과 뮤추얼 펀드,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비상장 기업의 지분이다. UC버클리의 에마뉘엘 사에즈 교수와 파리경제대학의 가브리엘 주크만 교수가 만든 ‘실시간 불평등 추적기’에 따르면 지난 50년 동안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가 3배 이상 폭등하는 동안 미국 상위 0.1% 가구의 자산은 인플레이션을 반영하고도 13배 이상 불어났다. 2024년 기준 순자산 4300만 달러(약 648억원) 이상이면 이 그룹에 속한다.
WSJ은 특히 수십 년 전부터 자본 시장에 참여해 온 베이비부머 세대가 이 거대한 자산 팽창의 최대 수혜자라고 짚었다. WSJ에 따르면 자산 3000만 달러(약 452억원) 이상 가구 3곳 중 2곳은 베이비부머가 세대주다.

◇ 명품 시장도 ‘양극화’
‘숨은 부자’의 막강한 화력은 소비 시장의 판도도 바꾸고 있다. 에르메스, 부르넬로 쿠치넬리, 페라리 등 초고가 브랜드는 이들 고객층을 기반으로 견조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반면 중산층을 겨냥한 브랜드는 수요 감소로 고전하며 소비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는 최고급 주택과 초고가 여행 수요도 빠르게 증가했다. 특히 넷젯(NetJets)과 같은 전용기 지분 공유 서비스 이용이 크게 늘었다. 이는 전용기를 직접 소유하는 부담은 줄이면서도 동일한 특권을 누리려는 이들의 소비 성향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이제 경제를 움직이는 축이 일부 억만장자가 아니라 훨씬 더 넓어진 초고액 자산가 집단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본다. 과거에는 억만장자 몇 명이 시장을 좌우했다면, 이제는 수십만 명 규모의 ‘숨은 부자들’이 소비와 투자 흐름을 결정짓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자산 시장과 소비 시장 곳곳에서 이미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부자’들이 경제의 판을 바꾸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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