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꺼비’로 유명한 진로그룹
무리한 사업다각화로 몰락
2005년 하이트맥주에 인수
5월 30일 국민 소주 기업이 무너지는 이야기를 다룬 ‘소주전쟁’(유해진, 이제훈 주연)이 개봉한다. 해당 영화는 소주 회사가 곧 인생인 재무이사 종록(유해진 분)과 오로지 성과만 추구하는 글로벌 투자사 솔퀸의 직원 인범(이제훈 분)이 대한민국 국민 소주의 운명을 걸고 맞서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해당 영화는 1997년 IMF 금융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실제 존재했던 소주 회사를 모티브로 했다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 회사는 바로 현재 ‘하이트진로그룹’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진로그룹’이다. 진로그룹은 지난 1924년 보통학교 교사였던 장학엽 창업주가 학교를 세우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평안남도 용강군에 동업자 2명과 함께 ‘진천양조 상회’를 설립한 것이 시초가 됐다.
그러나 진천양조가 처음부터 성공 가도를 달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소주는 청주와 주전자만 있으면 가정집에서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미 소주 사업을 선점하고 있는 회사가 존재해 고전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첫 사업은 적자를 지속하다 부채를 남기고 폐업했지만, 1927년 동업자인 조동식과 함께 기양양조장을 인수해 다시 소주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장 창업주는 한국 최초로 유리병에 소주를 담아 ‘진로’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하면서 보관의 용이성을 장점으로 해 도매 판매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이때 진로의 마스코트는 현재의 두꺼비가 아닌 원숭이였는데, 창립지인 서북 지역에서는 원숭이가 복을 가져다주는 동물이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장 창업주는 소주 사업의 성공을 계기로 1938년 명덕학원과 1946년 진지소학교, 진지중학교, 진지여고 등을 차례로 개설했다.
그러나 이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장 창업주는 이러한 성공을 뒤로하고 피난을 가게 된다. 그럼에도 사업을 포기하지 않은 장 창업주는 다른 사람이 시작한 동화양조를 시작으로 구포양조까지 거쳐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서광주조라는 이름의 소주 회사를 설립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원숭이를 회사의 마스코트로 사용했으나, 전국적으로 영업을 시작하면서 남한의 일부 지역에서는 원숭이가 ‘교활하고 음흉한’ 이미지였기 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원숭이 대신 ‘복을 가져다준다’라고 알려진 두꺼비로 마스코트를 변경했다. 이후에는 출시 약 10년 만에 점유율 10%를 달성하기도 했다.

진로그룹이 처음부터 소주 업계의 1위에 등극한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전남 목포에 위치한 삼학소주가 60% 넘는 시장점유율로 국내 소주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진로그룹이 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정부의 규제 때문이었다.
1965년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정부가 쌀로 만든 국내 증류식 소주 판매를 금지한 ‘양곡 관리법’이 시행됐다. 이를 대체하는 타피오카로 만든 주정에 물과 감미료를 추가한 희석식 소주가 대세가 되면서 진로는 증류식 소주를 고집하는 대신 희석식 소주 생산설비를 빠르게 늘리는 선택을 한다.
여기에 더해 경쟁 업체이던 삼학이 1971년 ‘납세 증지 위조’ 논란을 겪게 되면서 이에 대한 반사 이익을 얻기도 했다. 당시 술에는 최대 200%에 달하는 고율의 세금이 붙었기 때문에 탈세를 막고자 정부에서 세금을 낸 술병에 납세 증지를 부착했는데, 삼학에서 이 납세 증지를 위조한 것이다.
결국 소주계의 양대 산맥이던 삼학소주와의 경쟁에서 진로양조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1970년 국내 소주 시장 1위에 오른 이후 줄곧 시장을 석권하게 된다. 이 성공을 기반으로 진로는 여러 계열사를 거느리면서 1975년 (주)진로로 사명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사업을 확장에 나섰다. 중앙발효공업을 인수하고 수유유리공업, 도원관광, 성미쥬리아 등을 인수하고 설립하면서 사업 다각화를 모색했다.

장 창업주는 1975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당시 23세이던 아들 장진호 씨에게 경영권을 물려줄 수 없어 조카 장익용 씨에게 경영을 일임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아들 장진호 씨가 장익용 씨 몰래 주식을 매입하고 우호 지분을 모으면서 본격적인 경영권 분쟁이 시작됐다. 장진호 씨는 결국 1985년 10월 경영권을 가져와 3년 후인 1988년 진로그룹 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장익용 씨는 피혁 회사인 (주)서광, 이복형 장봉용 씨는 진로발효를 맡으며 분쟁이 마무리됐다.
그러나 장 회장이 자리에 오른 이후부터가 진정한 악재의 시작이었다. 36세의 이른 나이에 취임하게 된 장 회장은 탈 주류를 선언하며 유통업으로의 사업 다각화 진출을 꾀했다. 이에 분야를 가리지 않고 광고, 유통, 전선, 제약, 종합 식품, 건설, 유선방송 등으로 무리하게 사세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진로그룹은 1987년 4,100억 원의 총매출을 기록하던 회사에서 1996년 계열사 24개를 거느리며 3조 5,000억 원이라는 총매출을 달성했다. 문제는 다음 해 IMF 금융위기가 발발했다는 것이었다.
1995년 진로쿠어스맥주와 진로건설은 이미 자본 잠식에 빠져 있었고, 진로인더스트리즈의 부채 비율은 이미 60,000%에 달했다. 사실상 (주)진로를 제외한 대부분의 계열사가 경영 악화 상태였던 것이다. 1997년 초에는 진로그룹의 자기 자본 비율이 4.3%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396억 원의 어음을 결제하지 못하면서 부도 처리됐다.

2003년 4월 (주)진로는 법정 관리에 들어가게 되면서 2년 6개월 후인 2005년 10월, 하이트맥주에 매각되었다. 나머지 계열사들도 다른 회사에 인수되거나 공중분해 되면서 뿔뿔이 흩어지는 결말을 맞이했다.
한편, 장진호 회장은 몰락 이후에도 사업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2003년 5,696억 원어치를 사기 대출받고 비자금 75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지만, 2004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장 회장은 2005년 캄보디아로 도피해 여러 사업에 손을 댔지만, 캄보디아에서도 탈세 문제가 불거지면서 2010년 중국으로 거취를 옮겨 사업을 운영하다 2015년 중국 베이징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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