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시간이 머무는 자리, K 이발사의 향기
그 성실함에서 진정한 삶 배운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머리를 다듬기 위해 '헤어숍'이라 불리는 미장원을 찾는다. 하지만, 나는 굳이 십 리 밖 외진 이발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느덧 정수리가 허옇게 시어 머릿결이 제멋대로 꼬부라지고 숱마저 줄어드니, 기술 좋은 미용사라 한들 이 마모된 마음의 결까지 만져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무엇보다 낡고 오래된 물건들 속에서 지난날의 향수와 추억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나를 이곳으로 이끈다.
이발소의 미학은 어쩌면 그 '예스러움'에 맞닿아 있는지 모른다. 이발소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마중 나오는 것은 코끝에 아릿하게 감기는 익숙한 비누 거품 냄새다. 그 향은 순식간에 유년의 기억을 불러낸다. 가죽띠에 면도날을 '쓱싹쓱싹' 문지르던 이발사의 뒷모습, 차가운 물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던 서늘한 긴장감. 추운 겨울, 연탄난로 연통에 덥힌 비누 거품을 뒷덜미에 듬뿍 바르던 이발사의 두툼한 붓질은 어린 마음에도 참으로 따스하고 온유한 위로였다.
진해 남원로터리 한편,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껴안은 오래된 이발관에는 나의 '인생 스승'이 있다. 투박한 의자, 철 지난 잡지와 신문, 모서리가 반질반질 닳은 기구들, 선반 위에 정갈하게 놓인 해묵은 화장품까지. 세련된 도시의 미감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곳은 어깨를 맞대고 앉아 서로의 안부를 묻는 비좁고도 넉넉한 사랑방이다. 시설은 빛바랬어도 그 안을 채우는 공기는 어느 고급 살롱보다 청결하고 온화하다. 저마다 세월을 견뎌온 삶의 굴곡부터 시시콜콜한 세상사까지, 이곳의 대화는 마음의 허기를 달래주는 구수한 인생 드라마가 된다.
우리는 흔히 화려하고 거대한 것에만 경의를 표하곤 한다. 하지만, 진정한 삶의 가치는 남원로터리의 이 작은 이발소처럼, 낮고 좁은 곳에서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성실함 속에 깃들어 있다. 비록 영세한 환경일지라도 자신의 업(業)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K 이발사의 모습은, 오로지 속도와 효율에만 매몰된 우리 시대를 비추는 고요한 거울이다.
K 이발사의 손길은 경이롭다. 그가 가위를 잡는 순간, 낡은 공간은 최고의 예우를 받는 격조 높은 무대로 탈바꿈한다. 하얀 천이 몸을 감싸면 귀 뒤편에서 금속성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빗을 따라 리드미컬하게 춤추는 가위질은 마치 자장가처럼 마음의 빗장을 풀고 기분 좋은 졸음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섬세한 손놀림 끝에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직업적 소명이 서려 있다. 손님을 맞이하는 환한 미소와 상대의 모난 구석까지 온화하게 품어 안는 겸손은 한 평생을 올곧게 걸어온 이의 고결한 인격이다. 그는 단순히 머리칼을 만지는 기술자가 아니라, 타인의 고단함을 깎아내고 자존감을 아름답게 빚어내는 예술가다.
한 이발사의 생애가 담긴 작은 가위 소리에 다시금 귀를 기울여 본다. 정직한 노동으로 일구어낸 성실함, 그리고 타인을 향한 지극한 친절. K 이발사가 몸소 보여주는 겸양의 태도는 나로 하여금 내가 머문 자리에 남겨질 향기, 그 무게에 대하여 깊은 사유에 잠기게 한다.
오늘 내 머리칼과 함께 잘려나간 것은 단순한 털 뭉치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들어차 있던 해묵은 교만과 노욕이었으리라. 그의 성실한 삶이 많은 이들에게도 맑은 거울이 되어, 우리 사회가 조금 더 다정하고 겸손한 곳으로 나아가는 데 작은 보탬이 된다면 좋겠다.
/조광일 수필가·전 마산합포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