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수왕국'을 정리한 괴짜 루키…1999년 신인왕 홍성흔

[이재국의 베팬알백] ②두산 베어스의 출발과 ‘신(新) 에너지’ 홍성흔의 출현

1999년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신인 포수 홍성흔 ⓒ두산베어스

종말론으로 떠들썩했던 1999년, KBO리그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사상 처음으로 양대리그(드림리그·매직리그) 제도가 도입되고, 최초로 프리에이전트(FA) 제도가 시행됐다. 쌍방울 레이더스가 해체되기 전 마지막 시즌이었고, 현대 유니콘스가 인천 연고지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시즌이기도 했다. ‘라이온킹’ 이승엽은 KBO리그 최초로 50홈런 고지를 돌파하며 홈런 열풍을 일으켰고, 한화 이글스는 구단 역사상 유일한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1999년은 OB 베어스가 두산 베어스로 간판을 바꿔 달고 새롭게 출항한 해였다. 이에 발맞춰 등장한 홍성흔은 ‘신인왕의 산실’ 베어스 역사에서 최초로 포수 신인왕에 오르며 ‘허슬두’의 새로운 상징 인물로 급부상했다.

[베팬알백-베어스 팬이라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시즌2’ 두 번째 주제는 두산 베어스 시대 첫 신인왕 홍성흔 이야기다.

1999년 홍성흔 신인 시절 탄생한 팬클럽 '아도니스'가 플래카드를 잠실구장에 걸고 응원을 보내는 모습 ⓒ두산베어스

◆ 예능으로 먼저 알려진 대학가의 ‘스포테이너’

그의 이름 석 자가 팬들에게 먼저 알려진 것은 1998년 초여름, 야구가 아닌 TV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KBS 2TV의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의 인기 코너였던 ‘캠퍼스 영상가요’. MC 강호동이 진행하는 이 장기자랑 코너에서 경희대 체육학과 4학년 야구선수 홍성흔은 무대에 오르자마자 넘치는 끼와 에너지를 발산했고, 대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그때만 해도 일반인들에게는 ‘좀 놀 줄 아는’ 대학가 야구선수 정도로 비쳐졌다. 그런데 이 선수는 그해 10월 8일 OB 베어스 1차지명 대상자로 발표된다. 사흘 후(10월 11일)에는 12월에 열리는 방콕아시안게임 국가대표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놀 줄만 아는 게 아니라 ‘야구 좀 하는’ 선수로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방콕아시안게임 당시 한국야구는 이른바 ‘드림팀’을 처음 구성했다. 박찬호(LA 다저스)를 비롯한 메이저리거와 김원형(쌍방울) 김동주(OB) 박재홍(현대) 이병규(LG) 등이 포함된 KBO리그 선수, 김병현(성균관대) 박한이(동국대) 강혁(현대전자) 등 대학과 실업 최고 선수들이 골고루 선발됐다. 포수는 3명. 조인성(LG) 진갑용(OB)과 함께 대학 포수로는 유일하게 홍성흔이 발탁됐다.

홍성흔은 사실 고교 시절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다. 중앙고 졸업반 당시 OB 베어스에서 “프로에 바로 들어올 의사가 있느냐”는 오퍼가 오긴 했지만, 기본 연봉 1200만 원 수준의 제안이었다. 홍성흔은 대학을 선택했다. 결국 1995년 고졸 연고 지명으로 OB가 정수근을 포함해 7명을 선택했지만, 홍성흔의 이름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체격이 작았어요. 그때도 파이팅은 넘치고 어깨는 좋았지만 힘이 부족했죠. 고등학교 졸업 후 이대로 프로에 들어갔다가는 살아남기 쉽지 않다고 판단했어요. 대학에 가서 일단 체격과 힘을 키워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체육교사 자격증을 따서 체육선생님을 하려고 했죠.”

홍성흔의 말이다.

그는 그 시절 스스로를 “멘탈도 약했던 선수”라고 기억했다. 경희대 2학년 시절 약한 멘탈을 극복하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 절에 갔다. 거기서 스님에게 108배를 배웠다. 그때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도 빠짐없이 108배를 했다(훗날 프로에 들어가서도 108배만큼은 매일 반복하는 그만의 루틴이 됐다).

처음엔 정신 수양을 위해 시작한 108배였지만, 매일 하다 보니 하체까지 힘이 생겼다. 3학년 시절이던 1997년부터 대학 무대에서 타격과 수비를 겸비한 포수로 두각을 나타냈고, 국가대표에 발탁되기 시작했다.

신인 홍성흔의 호쾌한 타격 모습 ⓒ두산베어스

◆ ‘OB 시대’ 마지막 1차지명…‘두산 시대’ 첫 신인

잠실 라이벌 LG(전신 MBC 포함)와 OB는 1986년부터 ‘동전 던지기’와 ‘주사위 던지기’를 통해 1차지명 우선권을 가려 왔다. 그러나 OB는 늘 재미를 보지 못했다.

1980년대에 두 차례 이겼지만 그것마저 실패한 카드가 됐다. 1986년에는 아마추어 최고 스타 박노준(MBC는 김건우), 1989년에는 잠재력이 컸던 좌완 이진(MBC는 김기범)을 먼저 뽑았지만 결말은 신통치 않았다. 1990년대 들어서는 번번이 주사위 던지기에서 패해 그해 최대어를 LG에 넘겨주고 말았다.

1990년 김동수, 1991년 송구홍, 1992년 임선동, 1993년 이상훈, 1995년 심재학, 1997년 이병규 모두 우선권이 있는 LG 유니폼을 입었다. 1994년에는 각자 원하는 1차지명 선수 이름을 써내는 방식을 선택했는데 OB는 류택현, LG는 유지현(개명 후 류지현)을 써내면서 주사위 던지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8년 1차지명을 앞두고 두 팀은 격년제로 우선권을 갖기로 합의했다. 일단 1998년에는 주사위를 던져 우선권을 가리고, 이듬해에는 진 팀이 우선권을 가져가는 조건. 여기서 OB가 1990년대 들어 처음으로 이겼다. 주사위 2개를 3회 던졌는데 23-12로 앞선 것. OB는 4년 전 영입에 공을 들이다 고려대에 빼앗긴 김동주를 마침내 품에 안았고, LG는 포수 조인성을 찍었다.

그리고 1999년. 우선권을 가진 LG는 투수 김상태(덕수고-중앙대)를 선택했다. 당시 LG는 최고 포수 김동수를 보유한 데다 1년 전 국가대표 출신 포수 조인성을 선택했기에 대학 최고 포수 홍성흔을 뽑지 않았다. OB는 과거부터 소문난 ‘포수 왕국’. 포수가 넘쳤지만 홍성흔을 1차지명 선수로 호명했다.

홍성흔의 입단은 베어스 역사의 과도기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LG와 격년제 1차지명 첫 대상자였다는 점 외에도 OB 베어스 시대의 마지막 1차지명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4년 전 연봉 1200만 원만 제시받았던 홍성흔은 계약금 2억 원, 연봉 2000만 원을 받고 OB 베어스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1999년 1월 5일 두산 베어스로 구단 명칭이 변경되면서 홍성흔은 두산 베어스의 첫 출발을 함께한 상징적인 선수가 됐다.

“대학 졸업반 때 1차지명을 받고 OB 베어스 유니폼을 지급받았어요. 그런데 해가 바뀌고 스프링캠프에 갈 때는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게 되더라고요. OB 베어스에 입단해서 한 시즌도 치르지 못하고 두산 베어스 선수가 된 거죠.”

홍성흔은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승리 후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는 루키 포수 홍성흔 ⓒ두산베어스

◆ 이만수 이후 가장 시끄러운 포수

“나이스 볼!”

“오케이~! 좋아! 좋아!”

“팔이 먼저 나와요!”

“팔을 조금만 더 끌고 나와 던지세요!”

1999년 일본 오이타현 쓰쿠미. 두산 스프링캠프에 한 루키 포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훈련 시작부터 끝까지 한시도 입이 쉬지 않았다. 보통의 신인 포수들은 선배 투수들이 불펜피칭을 할 때 공만 받거나, 기껏해야 “나이스볼!” 정도의 추임새를 넣지만, 이 포수는 오지랖 넓게 선배 투수들 투구폼이 흐트러지면 그것까지 지적(?)하기도 했다.

원바운드 공을 블로킹한 뒤에는 “선배님, 얼마든지 원바운드로 던지세요. 제가 이렇게 다 막아낼게요”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러자 다들 “저놈 뭐냐”, “이만수 이후 가장 시끄러운 포수 아니냐”며 한마디씩 하며 배꼽을 잡았다.

한번은 평가전에 출전해 손을 휘저으며 외야수 수비 위치까지 이리저리 조정하자 유지훤 코치가 “야 이놈아, 니 할 거나 똑바로 해라. 내 밥그릇까지 뺏어갈 셈이냐”라며 꿀밤을 놓기도 했다.

이 포수는 바로 1999년 주전 포수로 발돋움하게 되는 홍성흔이었다. 그는 에너지가 넘쳤고, 파이팅이 남달랐다. 고된 전지훈련장의 ‘분위기 메이커’가 됐다.

시도 때도 없이 시끄럽게 떠드는 괴짜 루키. 처음엔 선배 투수들이 “또라이 아냐?”라며 웃었지만, 나중엔 하나둘씩 “홍성흔하고 호흡 좀 맞춰 보고 싶다”며 파트너로 불렀다. “팡!팡!” 소리가 나도록 찰지게 미트질까지 하자 투수들의 기분이 상승했다.

처음 홍성흔을 보고는 “야, 이거 선수 되겠나. 다듬을 게 많다”라며 냉정한 평가를 하던 김경문 배터리코치도 시간이 지날수록 홍성흔이 마음에 드는지 “가진 게 많다”며 장점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홈런을 친 홍성흔이 유지훤 3루 코치와 하이파이브를 한 뒤 홈으로 달려가고 있다. ⓒ두산베어스

◆ ‘포수 왕국’ 계보를 평정한 괴짜 루키

두산 베어스는 과거부터 포수 포지션 하나만큼은 남부러울 게 없는 구단이었다. 마르지 않는 샘이었고, 해가 지지 않는 ‘포수 왕국’이었다. 초창기인 1980년대에는 김경문(공주고-고려대)과 조범현(충암고-인하대)이라는 걸출한 포수를 보유해 든든한 안방을 구축했다. 1990년에 국가대표 출신의 김태형(신일고-단국대)이 입단했고, 1993년에는 공격력이 돋보이는 고졸 이도형(휘문고)이 들어왔다. 여기에 일발장타력을 보유한 박현영과 김광현 등도 백업포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두산의 포수 수집은 끝이 없었다. 1996년 국가대표 포수 출신의 최기문(충암고-원광대)을 1차지명했다. 그리고는 1997년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포수’라는 찬사를 듣던 진갑용(부산고-고려대)을 얻었다. 1995년 우승팀에서 1996년 꼴찌팀의 수모를 감수한 것도 2차지명 1순위 지명권을 받아 진갑용을 획득하기 위함이었다.

‘다다익선’, ‘포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지만, 차고 넘치는 포수 자원의 교통정리도 필요했다. 베테랑 김태형은 수비형 포수로 점점 경기 후반 승리를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기용되는 일이 잦았다. 문제는 주전급으로 성장시켜야 할 최기문과 진갑용, 여기에 홍성흔까지. 나이도 비슷한 1차지명 포수들을 동시에 기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롯데 쪽에서 줄기차게 포수 트레이드를 요청해왔다. “최기문을 달라”는 얘기였다. 1998년 시즌이 끝나자마자 10월 23일 최기문을 내주고 좌완 차명주를 받는 트레이드가 단행됐다. 차명주는 1996년 계약금 5억원을 받고 롯데에 입단한 특급 유망주. 포수가 부족했던 롯데와 왼손투수가 필요했던 OB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 트레이드를 성사시킨 배경에는 역시 진갑용이라는 최고 유망주 포수가 있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탄탄할 것만 같았던 진갑용의 입지도 1999년 루키 홍성흔 입단 이후 달라졌다. 파이팅 넘치는 홍성흔이 5월부터 주전으로 선발투입되기 시작했고, 실의에 빠진 진갑용은 트레이드 마감시한인 7월 31일에 맞춰 삼성 투수 이상훈과 맞트레이드됐다.

먹이사슬처럼 진갑용으로 인해 최기문이 롯데로 트레이드되고, 홍성흔으로 인해 진갑용이 삼성으로 이적한 셈이었다. 이로써 ‘포수 왕국’의 적자 계보는 루키 홍성흔의 입단으로 모두 정리가 됐다. 그리고 최기문과 진갑용은 각각 롯데와 삼성에서 주전 포수로 도약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때부터 베어스는 KBO리그 각 구단에 포수들을 분양(?)하는 대표적 구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뿐 아니라 조범현(SK~KIA~kt 감독), 김경문(두산~NC 감독), 김태형(두산 감독) 등 무려 포수 3명을 KBO리그 감독으로 내놓은 유일한 구단이기도 하다.

김인식 감독이 투수 이혜천과 포수 홍성흔을 마운드에 불러 얘기를 하고 있다. ⓒ두산베어스

◆ 베어스 시대 최초 포수 신인왕

시끄럽게 떠들어 주목받던 홍성흔은 점점 실력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를 거치면서 김인식 감독과 김경문 배터리코치의 눈도장을 받았다. 그리고는 진갑용, 김태형에 이어 제3의 포수로 개막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신인이었지만 뭐든 열심히 하더라고. 타격도 괜찮고. 하여튼 파이팅이 넘쳤어.”

신인 포수 홍성흔에 대한 김인식 감독의 회상이다.

1999년 개막전이 열린 4월 3일 사직 롯데전. 홍성흔은 9회초 대타로 프로 데뷔전을 치렀지만 삼진으로 물러났다. 4월 중순까지 간간이 대타와 대수비로 나섰지만 7타수 무안타. 4월 중순, 잠실 삼성전이 끝나고 김인식 감독은 쌍방울 원정경기를 치르기 위해 전주로 이동하려던 버스 앞에서 홍성흔을 불렀다.

“2군에 잠시 가 있어. 조만간에 빨리 부를 테니까 열심히 하다 와.”

그때까지 신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봤던 김인식 감독의 첫마디였다.

그런데 실제로 일주일 만에 다시 1군에 호출했다(당시엔 1군 엔트리에서 제외하면 7일 후 등록이 가능했다). 김인식 감독은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홍성흔은 자신감을 얻었다. 4월 30일 대구 삼성전에서 데뷔 첫 안타도 신고했다.

5월 5일 잠실 LG전. ‘어린이날 매치’로 잠실 라이벌 두 팀에게는 매우 중요한 경기였다. 이날 홍성흔이 데뷔 후 처음 선발출장(8번 포수)한 날이기도 했다. 사실은 그해 13승을 거두며 에이스로 떠오른 강병규가 김인식 감독에게 “홍성흔과 배터리로 호흡을 한번 맞춰보고 싶다”고 해서 이뤄진 선발출장이었다.

김경문 코치가 건넨 우황청심환 하나를 먹고 경기에 나섰지만 1회초부터 4실점. 눈앞이 캄캄했다. 정작 자신과 호흡을 맞추고자 했던 강병규가 1이닝 만에 강판되자 홍성흔은 자책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경기는 그대로 끝나지 않았다. 1회말 김동주가 LG 1차지명 신인투수 김상태를 상대로 3점홈런을 쏘아올리며 추격을 시작했다.

홍성흔의 시간이 시작됐다. 5-4로 역전한 3회말 계속된 1사 만루에서 김상태를 상대로 2타점짜리 좌전 적시타를 때리며 프로 데뷔 첫 타점을 신고했다. 5회말 좌전안타와 도루까지 선보였다. 엎치락뒤치락하며 명승부를 펼쳤던 그날, 두산은 9회말 안경현의 끝내기 솔로홈런으로 10-9로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7회 수비 때 교체돼 나갔지만, 그날 3타수 2안타 2타점으로 맹활약하자 다음날에도 선발 마스크를 썼다.

1999년 신인왕 홍성흔과 MVP에 오른 이승엽. 둘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이승엽은 2023시즌부터 두산 감독으로 부임했다. ⓒ두산베어스

홍성흔은 5월부터 뒤늦게 레이스에 뛰어들었지만 신인왕 후보로 급부상했다. 시즌 타율 0.258로 평범했지만 16홈런을 때리면서 63타점을 올렸다. ‘공격형 포수’로서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후반기에 맹추격을 시작한 해태 타이거즈 고졸 신인 정성훈이 타율 0.292, 7홈런, 39타점으로 유일한 대항마로 떠올랐을 뿐 별다른 경쟁자가 없었다.

『99한국프로야구 최우수선수에 사상 처음으로 50홈런 고지를 넘어서며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54개)를 세운 이승엽(23·삼성 라이온즈)이 선정됐다. 두산 베어스의 홍성흔(22)은 포수로서는 9년 만에 처음으로 신인왕에 올랐다.』 <한겨레 1999년 11월 2일자>

홍성흔은 신인왕 투표에서 총 유효표 82표 중 55표(67.1%)를 얻어 27표(32.9%)를 획득한 정성훈을 여유 있게 따돌렸다. KBO리그를 통틀어서 포수로서는 1990년 LG 김동수 이후 역대 두 번째 신인왕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베어스 구단 역사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 신인왕이었다. OB 베어스 시절에는 두 명의 신인왕을 배출했다. 1983년 KBO리그 최초 신인왕 박종훈(외야수)에 이어 1984년 윤석환(투수)이 2년 연속 신인왕을 받았다. 이후 신인왕의 명맥이 끊겼다. 그리고 1999년 홍성흔이 마침내 구단 역사상 3번째 신인왕에 올랐다. 두산 베어스로 구단 이름이 바뀐 뒤 최초 신인왕이자 베어스 포수 최초 신인왕이라는 역사를 썼다.

베어스는 이후 2007년 임태훈(투수), 2009년 이용찬(투수), 2010년 양의지(포수), 2022년 정철원(투수)까지 신인왕을 탄생시켰다. 신인왕 7명은 KBO리그 최다 기록. 베어스가 ‘화수분 야구’, ‘신인왕의 산실’로 불리고 있는 이유다.

홍성흔은 그동안 KBO리그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선수. 시원한 마스크와 호쾌한 타격, 넘치는 에너지와 끼로 무장한 그는 야구에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가미하는 데 앞장선 ‘스포테이너’였다.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팬클럽 ‘아도니스’까지 결성될 정도로 단숨에 인기 스타로 떠올랐다.

경기장에서는 ‘이만수 이후 가장 시끄러운 포수’였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팬들에게 먼저 다가가 사인을 하는 팬서비스의 왕. 올스타전이나 골든글러브 시상식 때는 미리 준비한 깜짝 퍼포먼스로 늘 팬들을 즐겁게 했다. 때론 ‘오버맨’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쾌활한 성격과 넉살, 쇼맨십을 앞세워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홍성흔 입단 이후 두산 베어스의 야구 색깔도 OB 베어스 시절과는 크게 달라졌다.

1999년 스토리는 [베팬알백]③에서 이어집니다.

홍성흔을 응원하는 팬들의 모습 ⓒ두산베어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OBS라디오 프로야구 해설위원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