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인류’야말로 자연의 기식자가 아닐까…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 공연 ‘푸드’ 리뷰

미 작가 제프 소벨 음식 모티브로 자연과의 공생 공연

그는 공연 중 의자에 앉아 한동안 연초를 태웠다. 대담하고 대단하다. ‘푸드’라는 제목에도 불구, 식욕을 감퇴시키는 연무를 보니 이날 공연이 평범한 다이닝 쇼가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관객들 앞에는 말의 안장 맛이 나는 북부 프랑스 와인 ‘러스티 아머(녹슨 갑옷)’와 화약 향이 깃든 ‘용의 해’ 등이 전달됐다. 시음은 자유. 셰프 역을 맡은 제프 소벨은 스쿠버로 분장한 뒤 ‘손님’들의 주문에 따라 식재료로 쓸 물고기를 잡거나, 돔형 접시에 음식을 소환하는 마술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이윽고 제프가 30인용 대형 식탁보를 잡아당기자 그 아래에 잔뜩 쌓여있던 흙더미, 기름을 옮기는 차량들, 모형 집 등이 정체를 드러낸다. 수저를 쉽게 움직이기 어려운 기류가 감돌고, 베일에 싸여 있던 인류세(人類世)적 화두가 ‘메인 앙트레’로 서빙된다. 음식을 모티브로 인류 문명의 본말과 자연과의 공생이라는 화두를 던지는 공연, ‘푸드(FOOD)’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이하 ACC재단)이 지난 19~21일 ACC 극장1에서 선보인 관객 참여형 연극 ‘푸드’는 일상적 소재인 ‘음식’으로 인류사를 성찰하는 초현실적 작품이었다. 공동 연출을 맡은 제프 소벨이 연기했는데,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과 링컨 센터, 워싱턴DC 등에서 공연했으며 베스트 에든버러 어워드를 수상하며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아티스트다.

테이블보를 벗기자 인류 문명의 이기들이 관객들에게 ‘메뉴’처럼 전해지는 2부.

“얼마 전 광주 양림동 펭귄마을에 설치된 예술작품 ‘고장난 시계들’과 시화를 감상했어요. 멈춰 있는 시계들이 상처받은 광주의 마음을 은유하는 것 같았죠. 지역성이 깃든 예술을 통해 이번 퍼포먼스의 영감을 받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공연에 앞서 지난 18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만난 제프 소벨의 말이다. 그는 “인류의 파괴성에 대해 성찰하는 이번 작품은 특히 5·18의 상흔을 간직한 광주 관객들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갈 것이다”며 “공연에 전위적인 측면이 있지만 그저 와서 보고, 즐길 수 있도록 ‘쉽고 재밌는 공연’을 만들겠다”고 했다.

이전 무대에서 그는 샐러드 보울에 머리를 파묻거나, 스파게티를 머리 위에 올리는 등 파격적인 연출로 이목을 끌었다. 이번에는 어떤 메뉴를 서빙할 것이냐는 질문에 ‘Secret’으로 답했지만, 실제로 공연을 관람하니 그 이유를 가늠할 수 있었다.

공연에서 손님(관객)들은 ‘애호박 찌개’, ‘버섯 들깨탕’, ‘갈비찜’, ‘미나리무침’ 등 한국적인 음식을 주문했다. 제프는 요청에 따라 즉석에서 재료를 손질하고 밥과 국을 내어줬다. 참여형 공연이라는 테마답게 관객들의 역할도 중요했는데 일부는 주방장의 일일 수셰프(Sous chef·부주방장)가 돼 식재료를 나르거나 테이블 위에서 자동차 모형을 굴리는 배역을 수행했다.

모래 속에 숨겨져 있다 솟아 오른 빌딩들, 미니어쳐 건축물 등의 모습.

‘만찬회’를 표방하는 1부가 끝나자 거대한 테이블보가 벗겨지고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가 사과 네 개, 푸릇한 셀러리 하나를 입속으로 밀어 넣은 뒤다.

공연장에 앞치마를 두른 셰프는 더는 없다. 찬란하던 샹들리에는 금방 떨어져 파편을 만들 것처럼 위태로운 장면을 연출했다.

벽면에 걸려 시종일관 시선을 사로잡은 그림은 윌리엄 홀브룩 비어드의 ‘The bear dance’. 다 빈치의 성결한 프레스코화 ‘최후의 만찬’ 대신에 이 작품이 내걸린 것은 일종의 복선이었을 거다. ‘곰’들이 음식 앞에서 열맞춰 춤추는 화폭은 인간의 식탐 가득한 ‘검은 입’처럼 보였다. 역사와 자연 위에 군림해 온 인간에 대한 알레고리로 다가왔다.

제프는 식탁에 올라 미니어처 카, 건물, 석유 시추기 등 인류 문명의 이기를 전시했다. 테이블 위를 기어다니면서 사자, 코뿔소의 몸짓을 흉내 내거나 신이 인간에게 불꽃을 선사하는 모습을 재현하듯 불도 지폈다. 모든 동작은 ‘매직 쇼’와 같았는데, 마술 파트를 담당한 스티브 쿠이포(Stevce Cuiffo·공동창작자)의 공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공연에 앞서 ACC에서 만난 제프 소벨. 그는 양림동 펭귄마을에서 찍은 시화를 보여주며 “광주의 음식, 문화 예술에서 이번 퍼포먼스의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테이블 아래에 숨겨져 있던 ‘빌딩’들이 모래를 뚫고 솟아오르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전율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사각형 테이블을 수놓은 마천루, 녹슨 첨탑 모형은 인간에게 “이것이 인류가 바라는 탐(貪)의 형상인가”라고 반문하는 듯했다.

피날레는 제프가 모래 아래로 빨려들어가는 장면으로 장식했다. 기괴하게 솟은 빌딩과 그 위에서 점멸하는 붉은 항공 표시등만이 관객들을 응시하는 듯해 허무한 느낌도 들었다. 지구의 최고 포식자로 군림한 인류야말로 ‘자연의 기식자’가 아닐까 하는 공포가 손님들에게 ‘디저트’로 제공된 셈이다.

이날 ‘FOOD’는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 최고의 화제작으로 손꼽힐 만한 저력을 과시했다.

/글·사진=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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