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보배를 지키자...대구 간송미술관
[정연복과 손잡고, 세계의 미술관으로]
대구로 옮아온 간송미술관..최대 전시
혜원 신윤복의 그림, 줄 서서 기다려야
『훈민정음 해례본』만날 소중한 기회
간송 전형필과 오세창의 깊은 뜻 새기길
역사의 혼란 속에 지켜낸 문화재
파리에 루브르 박물관이 없다면 어떨까요? 문화대국으로서 프랑스가 갖는 위상이 흔들리지 않을까요? 놀랍게도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루브르 궁전과 그 안에 있던 진귀한 예술품들은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의 상징으로 파괴되거나 흩어질 위험에 놓여 있었습니다. 파리의 노틀담 성당 서쪽 파사드에 있던 ‘왕들의 갤러리’나 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에 서 있던 ‘루이 15세 기마상’도 무참히 파괴되었죠. 생 드니 성당에 있던 프랑스 왕들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약탈당했습니다. 야만적 문화파괴행위를 일컫던 ‘반달리즘’이 극에 달했습니다.
이렇게 오래된 기념물이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이들이 ‘문화유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견을 모았고, 그 뜻을 살려 ‘민중의 것을 민중에게 돌려준다’는 정신에 의해 루브르 박물관이 1793년 8월 10일 문을 엽니다. 왕정폐지 1주년 기념일에 맞춘 상징적 개관이었습니다. 이로써 일부 특권층만 독점 향유하던 예술작품이 흩어지거나 파괴되지 않고 ‘공공이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프랑스의 역사와 문화강국으로서의 위상을 과시할 수 있게 된 거고요.
우리 옆에 보물이 있도록...'간송' 전형필
혁명이 일어난 어수선한 시대에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자각하면서 뜻을 모은 사람들이 프랑스에 있었다면,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빼돌려지거나 불쏘시개로 사라질 뻔한 귀중한 작품들을 수집하고 소장하고 연구에 바친 인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입니다. 우리에겐 세계의 어떤 콜렉터보다도 위대하고 소중한 콜렉터입니다.
간송은 거부의 아들로 태어나 문화의 힘이 바로 그 나라의 힘이라는 신념 아래에 귀한 자료라는 확신이 들면 어떻게 해서든 작품을 사모았습니다. 그렇게 모은 작품이 4,600여 건, 개별 작품수로 따지면 3만 점 정도라고 합니다.
간송은 이렇게 수집한 예술품과 자료를 보관하고 연구할 목적으로 1938년 성북동에 건물을 짓습니다. 조선 건축가 박길룡(1898~1943)이 설계한 2층 건물로 우아한 단순미가 돋보입니다. 이름은 보화각(葆華閣). ‘빛나는 보물을 모아놓은 집’이라는 뜻입니다.
간송은 무엇보다 보존과 연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일반공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일반공개는 1971년부터 시작되었는데요. 1년에 두 번, 그것도 2주(현재는 한 달 반씩, 1년에 세 달)라는 짧은 기간 관람객을 맞이했습니다. 일반 공개 기간은 짧았지만 1971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간송문화』는 2024년 4월 어느덧 94권까지 나왔습니다.
봄, 가을로 열리는 전시에 맟춰 간행된 『간송문화』는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현재 심사정, 오원 장승업 등에 관한 꾸준한 연구로, 우리 미술사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아쉬운 점은 소장품에 비해 보화각의 전시공간이 좁다는 점인데요. 게다가 사립 미술관이다 보니 많은 소장품을 유지, 보수하는 데 드는 재원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아 소장품을 매각한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었습니다.
대구시가 정성들여 품은 '간송미술관'
이렇듯 간송미술관의 행보는 우려와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2024년 9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10여 년의 준비 끝에 <대구 간송미술관>이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성북동 '보화각'의 협소한 전시공간의 불편함, 서울 이외의 지역민들도 다 함께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의 확충, 간송미술관이 축적한 문화재 보존과 복원 기술의 활용과 교육 등에 대한 고민 속에 상설전시관이 마련된 것입니다.
다행히 대구시와 협의하여 사립미술관이면서 시의 지원과 보조를 받는 독특한 관계 아래에 미술관이 세워지게 된 겁니다. 개관 특별 전시회가 9월 3일부터 12월 1일까지 개최되고 있는데요. 간송미술관 개관 이래 최대 규모의 전시로, 국보와 보물이 포함된 40건, 97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대구간송미술관으로 가볼까요?
미술관은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대구시립미술관 옆 부지에 지어졌는데요. 국비와 시비가 400여 억원이 들었고 최문규 건축가가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로 연면적 8,003㎡에 달합니다. 연면적만 보면 상당한 규모이지만 지형지물을 이용해 2개층이 입구보다 아래에 있어 거대한 위용으로 다가오진 않습니다. 오히려 주건물의 외벽이 짙은 먹색의 벽돌로 이루어져 있고, 미술관 뒤에 있는 야트막한 대덕산과 거의 구별이 되지 않아 그야말로 자연 속의 미술관, 산세를 해치지 않고 살리는 정갈함이 일품입니다.
아, 혜원 신윤복의 여인들이 즐거워하고
미술관 외관의 화룡점정은 입구의 높은 나무기둥인데요. 11개의 기둥이 위풍당당하고 의연하게 서서 길게 뻗은 처마를 받치고 있습니다. 기둥 아래에는 자연석이 놓여 있고요. 기둥들 사이로 멀리 도시가 내려다보여 미술관이 고립되거나 홀로 돋보이지 않고 자연과 도시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지나침도 부족함도 없는 건축물은 미술관 안에 있는 소장품과 닮았습니다. 화려하거나 과시하지 않지만 ‘빛나는 보물.’
티켓을 사서 한 층을 내려가면 천창으로 빛이 가득 들어오는 중앙로비가 나오는데, 그곳이 1층입니다. 서점과 부티크, 3개의 전시실이 있습니다. 제1 전시실에서는 이징, 김득신, 김홍도, 정선 등 눈을 떼기 어려운 걸작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혜원 신윤복의 <혜원전신첩>(18세기 말~19세기 초)은 줄을 서서 한참 기다린 끝에 볼 수 있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화려하고 대담한 표현에 탄성이 절로 나오는 그림들이었습니다.
제2 전시실에는 신윤복의 <미인도>(18세기 말~19세기 초), 제3 전시실에는 『훈민정음 해례본』(1446)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 문화를 부정하고 말살하려던 일제 강점기 때, 간송이 어렵사리 구입한 ‘해례본’은 한글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감상하라'는 뜻으로
그리고 지하 1층 제4 전시실에서는 추사 김정희, 이광사 등의 서체와 도자기, 불상 등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13세기),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18세기) 등 걸작들 속에서 보는 내내 미소가 지어졌던 귀여운 연적이 관람객의 발길을 붙듭니다.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12세기 중기)인데요. 엄마 얼굴에 손을 뻗은 새끼 원숭이의 동작, 새끼를 두 팔로 꼭 껴안은 어미의 자세에서 모자간의 다정함이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이 연적을 보자마자 1270년경, 파리에서 제작된 <생트 샤펠의 성모자>(상아, 41cm, 루브르 박물관 소장)가 떠올랐습니다. 신이든, 동물이든 모자간의 사랑은 애틋하고 아름답습니다.
제4 전시실을 관람한 다음, 제5 전시실로 가기 전에 선물 같은 풍경을 만나게 됩니다. 길고 낮은 창문으로 미술관 마당의 작은 물의 정원이 보이고 정원 한 쪽 끝에는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정자가 있습니다. 오래된 우리 문화재가 시간의 간극을 넘어 미래로 나아간다는 것을 건축적으로 풀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제5 전시실에서는 ‘실감영상전시’를 볼 수 있습니다. 말러의 음악과 함께 간송미술관의 걸작을 38m 대형스크린으로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입니다. 전시관람의 벅찬 행복감이 증폭되는 곳이니 절대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구 간송미술관의 개관 전시 제목이 ‘여세동보(與世同寶)’입니다. ‘세상이 함께 보배 삼아’라는 뜻입니다. 1938년 간송의 스승 위창 오세창(1864~1953)이 ‘보화각’이 문을 열 때 머릿돌에 새긴 글의 마지막 글귀인데요. 86년이 흐른 2024년, 간송이 모은 보배가 그야말로 공공이 향유하게 된 것이니, 참으로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정연복 미술평론가는 서울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았으며, 프랑스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현재 중앙대에서 예술사 강의를 한다. 사조의 이해나 단순지식보다는 직관적인 경험으로서의 예술이해에 관심이 많다. 삶에서 예술이 나오고 예술이 곧 삶이 된다는 것,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만큼 느끼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림과 미술관에 관한 글을 쓰고 강연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