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팬알기] ⑬KBO 역사 속에 빛나는 베어스의 ERA 역사

『24승4패7세이브, 승률 8할5푼7리, 방어율 1.84. 투수 부문 3관왕을 차지한 박철순에게 82년 프로야구 최우수선수라는 또 하나의 왕관을 씌워주는 데는 이론이 있을 수가 없었다.』 <1982년 10월 15일자 경향신문>
KBO 원년은 OB 베어스 박철순의 해였다. 아직도 깨지지 않는 22연승 신화와 함께 다승왕에 올랐고, 승률왕은 물론 방어율(현 평균자책점) 1위까지 휩쓸면서 투수 3관왕을 차지했다. 이런 원맨쇼를 통해 1982년 OB 베어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면서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 트로피까지 품에 안았다.
[베팬알기-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기록 이야기] 이번 편은 평균자책점 역사에 관한 이야기다.

◆방어율? 평균자책점? 그리고 트리플 크라운
‘투수 트리플 크라운’이라고 하면 한 투수가 당해 연도에 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 3개 부문 1위를 석권하는 것을 일컫는다. 하지만 1992년까지는 다승, 방어율에 '승률' 1위가 구성 요소였다.
이유가 있다. KBO리그에서는 탈삼진 1위에게 1993년부터 공식적으로 시상하기 시작했다. 요즘의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탈삼진은 1992년까지 KBO리그 개인 타이틀 항목이 아니었다. ‘참고 기록’에 불과했다.
과거 일본야구의 영향으로 우리나라도 한동안 ‘방어율’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KBO에서는 2015년 연감부터 공식적으로 ‘평균자책점(ERA)’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ERA’는 ‘Earned run(자책점) average(평균)’의 약자다. 엄밀히 말하자면 '1경기당 평균자책점'이 아니라 ‘9이닝당 평균자책점’을 뜻한다.
1경기는 연장전에 접어들 경우 10이닝 이상 펼쳐질 수도 있고, 때론 9이닝 이하(콜드게임 등)로도 정식경기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ERA는 '9이닝 기준 투수가 책임 점수를 몇 점 내주느냐'를 평가하는 항목이다.
참고로 평균자책점을 구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1.84…초대 방어율왕 박철순 ‘군계일학’
베어스는 원조 에이스 박철순 덕분에 초대 방어율왕을 보유한 구단이 됐다.
원년은 팀당 80경기를 소화하던 시절. 박철순은 팀 경기수의 절반에 가까운 36경기(선발 19경기, 구원 17경기)에 등판했다. 그해 규정이닝(경기수×1)이 80이닝이었지만 박철순은 무려 224.2이닝을 던졌다. 60실점 중 자책점은 46점. 그래서 평균자책점 1.84를 기록했다.
방어율 2위는 MBC 청룡의 에이스 하기룡(2.30)이었고, 삼성 라이온즈의 권영호(2.37)와 황규봉(2.47)이 3위와 4위에 자리 잡았다(하기룡과 황규봉은 이미 하늘로 떠나 이제 추억의 이름으로 남았다).
그 뒤로 눈에 띄는 선수가 있었으니 해태 타이거즈의 ‘투타 이도류’ 김성한이다. 투수로서 평균자책점(2.79) 5위에 랭크되면서 10승 고지를 밟았다. 타자로서는 3할대 타율(0.305)에 타점왕(69). 오늘날 일본인 메이저리거 오타니 쇼헤이(LA 다저스)가 ‘투타 이도류’로 각광 받고 있지만, KBO엔 이미 원년부터 이도류의 원조 격인 김성한이 있었다.
1980년대는 대체적으로 ‘투고타저’의 시대. 그런 상황 속에서 박철순은 원년 24승과 더불어 유일하게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할 정도로 군계일학의 활약을 펼쳤다.
베어스는 1982년 박철순부터 시작해 2021년 외국인선수 아리엘 미란다까지 총 7명의 평균자책점왕을 배출했다.


◆ “1-0으로 지는 것보다 10-9로 이기는 게 낫다”더니…1984년 ERA왕 장호연
OB 베어스는 1983년 접어들어 힘겨운 레이스를 이어갔다. 절대적인 에이스 박철순이 허리 부상으로 이탈했기 때문이었다. 전년도 우승팀에서 이듬해 전기리그 꼴찌(6위)로 주저앉았고, 후기리그에서도 5위에 그쳤다.
그해 KBO 평균자책점 1위는 MBC의 하기룡(2.34). 원년에 박철순에 이어 2위에 그쳐 아쉬움을 삼키더니 결국 이듬해에 KBO 역대 두 번째 방어율왕에 올랐다. 그리고 30승 신화를 쓴 삼미 슈퍼스타즈의 재일교포 투수 장명부(2.36)가 2위를 차지했다. 3위는 MBC의 좌완 유종겸(2.40). OB에서는 우완 사이드암 박상열(2.49)이 4위, 좌완 황태환이 8위에 자리를 잡아 체면을 지켰다.
1984년엔 베어스 구단 역사상 두 번째 방어율왕이 탄생했다. 바로 전년도인 1983년 OB 베어스에 입단한 동국대 출신의 장호연. 데뷔 두 번째 시즌 만에 1.58이라는 놀라운 수치로 방어율왕 자리에 앉았다.
“공 3개로 삼진을 잡는 것보다 공 1개로 맞혀 잡는 게 낫다”는 말과 더불어 “1-0으로 지는 것보다 10-9로 이기는 게 낫다”는 현역 시절 그의 말은 명언이 됐다.
이런 말이 인상적이다 보니 그가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 아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장호연은 KBO 역대 3번째 방어율왕이었다. 1984년의 장호연의 1.58은 1982년의 박철순보다 낮았으며, 이는 역대 베어스가 배출한 평균자책점왕 중에 가장 낮은 수치이기도 하다.

◆2004년 박명환이 마지막 토종 ERA왕
베어스 구단은 이처럼 평균자책점왕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KBO 출범 초창기 3년 중에 2명의 ERA 1위 투수를 배출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을 제외하면 OB 베어스 시대에는 더 이상 방어율왕과 연이 닿지 않았다. 1984년 장호연이 마지막 주인공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OB 베어스 시대는 저물고, 1999년부터 두산 베어스 시대를 맞이했지만 좀처럼 ERA 1위 투수는 나오지 않았다.
1988년 윤석환이 2.08, 1993년 김경원이 1.11로 2위에 올랐지만 아쉬움을 느낄 형편도 아니었다. 그해 선동열(1988년 1.21, 1993년 0.78)이라는 불세출의 투수와 격차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다 2004년 마침내 주인을 만났다. 토종 에이스로 불리던 박명환. 2004년 2.50의 기록으로 베어스 투수로는 장호연 이후 20년 만에 ERA 1위 투수가 됐다. 두산 팀 동료였던 외국인 투수 게리 레스(2.60), 그해 MVP에 오른 삼성 배영수(2.61)와 치열한 경쟁 끝에 선두를 수성했다. 박명환은 2004년 베어스 역대 투수로는 최초로 탈삼진왕까지 차지해 2관왕에 올랐다.
그 이후 베어스 구단에 한국인 ERA 1위 투수는 다시 나오지 않고 있다. 2024년까지 구단 역사상 토종 ERA왕은 1982년 박철순, 1984년 장호연, 2004년 박명환 세 명뿐이다. 다시 말해 아직까지 박명환이 베어스 구단의 마지막 토종 ERA 1위 투수로 남아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베어스 구단 역사상 토종 다승왕도 1982년 박철순이 유일했지만, 2024년 곽빈이 42년 만에 토종 다승왕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 ERA 1위에 오른 4명의 외국인 투수들
박명환 이후 두산 베어스에서는 외국인 투수들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두산이 지속적인 강팀으로 자리를 잡고 왕조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외국인 특급 에이스들의 활약이 절대적이었다.
2007년 다니엘 리오스(2.07)가 베어스 구단 최초로 ERA 1위 외구인 투수가 됐고, 2016년 더스틴 니퍼트(2.95)와 2018년 조쉬 린드블럼(2.88), 2021년 아리엘 미란다(2.33)가 뒤를 이었다.
두산은 역대로 토종 투수 3명에 이어 외국인 투수 4명까지 총 7명의 평균자책점 1위 투수를 내놓게 됐다.

◆‘국보투수’ 선동열에 가려진 김경원의 불운
KBO 역사에서 평균자책점 부문은 ‘국보 투수’로 불린 선동열을 빼놓고 설명할 수없다. 독보적이었다. 그 시절 대학생들 사이에 학점이 낮을 때 ‘선동열 학점’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선동열이 찍어댄 방어율의 수치는 기가 막혔다.
역대 단일 시즌 평균자책점을 놓고 보면 선동열은 3차례나 0점대를 찍었다.
해태 타이거즈 입단 이듬해인 1986년 사상 최초 0점대 평균자책점을 달성했다. 262.2이닝을 던지면서 29자책점으로 0.99를 기록했다.
1987년 0.89로 2년 연속 0점대를 기록한 선동열은 소방수로 변신한 1993년엔 0.78로 자신의 기록은 물론 KBO 역사에서 기념비가 될 만한 최저 ERA를 작성했다.

KBO리그 역사에서 선동열 외에는 누구도 0점대 평균자책점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에 가장 근접했던 선수가 있었으니 1993년 OB 마무리투수 김경원이었다. 김경원은 그해 ERA 1.11을 기록했다.
한편으로 보면 김경원은 불운한 선수가 됐다. 당시에는 구원왕을 세이브포인트(구원승+세이브)로 가렸는데 김경원은 1993년 9구원승 23세이브로 32세이브포인트를 올렸다. LG 트윈스의 전설적인 소방수 김용수(6구원승+26세이브)와 세이브포인트가 같았다. 하지만 김경원이나 김용수나 태산처럼 버틴 선동열(41세이브포인트=10구원승+31세이브)을 넘어서지 못했다. 공동 2위에 만족해야 했다.
더 억울한 것은 평균자책점 부문. 1.11(129.1이닝 16자책점)은 KBO 역사에서 역대 4위지만 0점대 평균자책점을 3차례나 기록한 선동열을 제외하면 가장 낮은 수치다. 다시 말해 KBO 역사에서 선동열이 없었다면 김경원의 1.11 이 기록은 역대 최저 ERA로 남아 있을 뻔했다.
하지만 선동열로 인해 김경원은 그해 평균자책점 부문에서도 2위에 그쳤다.
위너 테이크 올(winner-take-all). '승자독식'의 스포츠 세상에서 김경원의 1993년 기록을 기억해주고 있는 이는 거의 없다. 너무나 찬란하게 빛났던 태양(SUN)으로 인해 2인자는 그림자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KBO 역대 ERA 순위…선동열 최동원 빼면 김경원과 장호연
사실 과거와 현재의 평균자책점 숫자만 놓고 단순하게 줄을 세워서 직접적인 비교를 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타고투저’와 ‘투고타저’의 시대에 따라 숫자의 가치가 다른 무게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스포츠에서 기록을 비교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KBO의 역대 단일 시즌 평균자책점을 놓고 단순하게 줄을 세우면 1점대 이하 평균자책점은 총 26차례 나왔다.
앞서 설명했듯이 ERA 부문에서는 사실상 선동열의 독무대. 다른 부문보다 유독 더 그렇다.
선동열은 KBO리그에서 11시즌 활약했는데 역대 단일 시즌 평균자책점 10위 안에 혼자 7차례나 이름을 올렸다. 얼마나 압도적인 투수였는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선동열을 제외하면 남은 자리는 3개뿐. 한 자리는 1986년의 최동원(1.55)으로 역대 8위에 포진해 있다. 나머지 2명은 OB 베어스 투수들이다. 1993년 김경원(1.11)이 역대 4위, 1984년 장호연(1.5831)이 역대 10위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역대 단일시즌 최저 평균자책점을 20위까지 뽑아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눈에 띈다. 다른 투수는 모두 20세기(1980~1990년대) 투수들. 요즘과 비교하면 극심한 ‘투고타저’의 시대였다. 그런데 21세기 투수로 유일하게 포함된 투수가 있었으니 바로 2010년 한화 류현진이다.
류현진의 그해 평균자책점은 1.882(192.2이닝 39자책점). 1990년 빙그레 이글스 시절 송진우(1.883)에 약간 앞서 역대 17위에 있다.
만약 류현진이 ‘투고타저’의 시대인 20세기에 KBO리그에서 활약했다면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 선동열 최동원과 동시대에 던졌다면 어떤 위치에 있었을까. 팬들 사이에서 늘 논쟁의 주제로 오르고 있지만 상상만으로도 흥미롭다.
한편 이 부문 역대 20위 안에 베어스 투수는 2명 더 있다. 1986년 최일언(1.5835)이 11위이며, 원년 ERA 1위 박철순의 1.84는 역대 19위에 자리하고 있다.

●1000이닝 이상 투수…통산 ERA 순위는?
단일 시즌이 아닌 개인통산 평균자책점 부문은 어떨까. 이 역시 선동열이 독보적이다. 1985년부터 1995년까지 KBO 통산 11시즌을 뛰며 1.20을 기록했다.
역대 2위는 최동원으로 2.46이다. 6위에 있는 류현진은 현역 선수이기에 향후 기록과 순위 변동성이 있다. 2006년부터 2024년까지 KBO 8시즌(MLB 진출 2013~2023년 제외) 동안 2.92를 기록했는데, 은퇴할 때까지 2점대를 지켜낼지도 관심사다.
베어스에서 활약한 투수 중 최일언(1984~1989년 OB, 1990년 LG, 1991~1992년 삼성)이 통산 2.87로 KBO 역대 5위이며, 박철순(1982~1996년)이 2.95로 7위에 있다.
2002~2007년 KIA와 두산 두 팀에서 활약한 다니엘 리오스가 KBO 통산 ERA 3.01을 기록해 외국인 투수로는 유일하게 20위 이내에 포함돼 있다.
이밖에 한번이라도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선수 중 통산 ERA(1000이닝 이상) 부문 20위 이내에 이름을 올린 선수는 12위 조계현(3.17), 13위 진필중(3.20), 18위 장호연(3.26)까지 총 6명이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OBS라디오 프로야구 해설위원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