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16 총 맞은 후 번듯한 공업사 접고 여기저기 도망치며 살아야 했어요"

박준배 기자 이수민 기자 2022. 10. 1.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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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정신적 손해배상㊶] 광주역 집단발포 피해자 류관열씨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9월27일 전남 순천시 서면의 한 주택에서 만난 5·18 피해자 류관열씨(71)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2022.10.1/뉴스1 ⓒ News1

(광주=뉴스1) 박준배 이수민 기자 = M16 총알이 왼팔을 관통한 이후 그의 삶은 망가졌다. 기관의 감시는 끊이지 않았고 사업체는 문을 닫아야 했다. 감시가 없는 곳, 아무도 모르는 곳을 찾아 떠나야 했다. 5·18 민주유공자 류관열씨(71)의 파란만장한 삶이다.

지난달 27일 오후 류씨를 만나기 위해 전남 순천시로 향했다. 광주에서 1시간가량 고속도로를 달려 순천 서면의 한 주택에 도착했다. 류씨가 대문을 열며 반갑게 맞이했다.

"집안이 엉망이라 마을회관서 얘기를 할라고 했는디, 회관 열쇠가 없단 말이요."

난감해하는 류씨에게 취재진은 괜찮다며 집에서 하자고 했다. 조그만 마당과 텃밭이 있는 30평 남짓한 허름한 기와집에 들어섰다. 월세가 아닌 연세로 200만원을 내고 산다고 했다. 마당에 있던 강아지 한 마리가 낯선 이들을 경계하듯 짖어댔다.

류씨는 이 집에서 부인과 장애가 있는 남동생과 함께 산다. 두 아들과 딸은 독립해 타지역에서 생활한다. 부인은 출근했고 남동생은 잠시 일 보러 나갔다고 했다.

"내가 일을 못 항께, 집사람이 일하고 생계를 책임지고 있죠. 그거만 생각하믄 마음이 아프고 참…."

류씨가 오른쪽 손으로 왼쪽 위 팔뚝을 주무르며 한숨을 쉬었다.

1980년 5월, 서른 살이던 류씨는 광주 동구 계림1동에서 '삼영공업사'를 운영하는 '젊은 사장'이었다. 서울에서 일을 배워 스무 살 무렵부터 직원으로 일하다 몇 년 뒤 인수했다.

주로 축산기구를 전문으로 제작했다. 직원 8명을 두고 주문을 받아 돈사와 우사를 만들었다. 부화기도 제작했다. 류씨가 만든 축산기구들은 광주농고와 나주원예고 등 전문학교에서도 쓰였다.

그해 5월18일, 일요일이었지만 류씨는 주문받은 기계를 제작하느라 바빴다. 양계장 축사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고 동구 지원동에 있는 지인의 공장에서 잠시 일을 했다. 지인이 "밖에 난리가 났다"고 했지만 류씨는 일을 마쳐야 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날 저녁 퇴근 후 약속이 있어 금남로 전일빌딩 지하에 있는 전일다방에 들렀다 거리로 나왔다. 금남로엔 학생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때는 광주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맨날 데모하던 시절이라 이번 시위도 금방 끝날 줄 알았지. 그날은 '인자 좀 그만 했으믄 쓰겄네' 속으로 생각함시로 집으로 갔죠."

이틀 뒤인 20일 오후 서너시쯤이었다. 그날 역시 지인의 공장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금남로로 나왔다. 거리에선 군인들이 시위를 진압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상시와 달랐다.

군인들은 길을 가는 시민 중 대학생으로 보이면 무차별 폭행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2m 가까이 돼 보이는 긴 곤봉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검붉은 피가 퍽퍽 튀었다.

젊은이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 군인들은 질질 끌고 가 트럭 위로 던지듯 실었다. 의식이 있는 이들은 금남로 길가 한곳에 모아 바지를 무릎 밑까지 벗겨 놓았다.

"쉽게 도망을 못 치게 바지를 무릎 아래까지 벗겨논 거죠. 금남로에 빤쓰만 입은 시민들이 겁나 많았어요. '이것이 뭔 일이다냐' 싶드라고. 그 모습을 본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그라드라고요. '6·25 때도 이라고는 안했는디 참말로 너무한다', '누가 가서 좀 말려보라'고…. 근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죠."

80년 5월18일 전후 전일빌딩에서 시위대를 진압하는 계엄군들. ⓒ News1

류씨가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류씨의 공업사 옆에서 조그만 가구공장을 운영하는 친구가 집으로 찾아왔다.

"그 친구가 '도저히 안 되겄다. 시내 나가서 같이 싸워야하지 않겄냐'고 하드라고요. 나도 낮에 젊은 사람들이 맞은 것을 보고 '너무하네' 생각하던 차라 친구하고 나갔죠."

친구와 함께 당시 계림동 광주시청 앞으로 향했다. 이미 많은 시민이 모여 시위를 하고 있었다.

류씨와 친구는 시위대에 합류해 '계림국민학교-광주고등학교-계림동 오거리-한미쇼핑 사거리-중앙국민학교'까지 걸었다. 행렬이 이동할 때마다 시위대는 몇 배로 불어났다.

당시 궁동 광주문화방송(MBC방송국) 앞을 지날 때였다. MBC 건물에 누군가 불을 붙였다.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가 불을 껐다.

이때부터 시위대 내에서는 의견이 갈리며 티격태격했다. 방송국이 현 사태를 축소, 왜곡 보도하고 있으니 불을 질러버려야 한다는 강경파와 그래선 안 된다는 온건파로 갈렸다.

광주MBC는 전날(5월19일) 오후 10시36분 계엄군의 지시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자막을 내보냈는데 그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한쪽에서는 불을 지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불을 끄고 두 번 반복이 됐는데 결국 강경파가 이겼죠. 세 번째 화염병이 날아들었고 광주MBC 건물이 불에 탔어요."

시위대 선두에 선 스피커에서 "서울에서 데모대을 응원하러 온 많은 학생이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구금됐으니 구출하러 가자"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위 행렬은 광주신역(현 광주역)으로 이동했다.

오후 10시30분쯤 시위대는 광주역 앞 광장에 도착했다. 광주역엔 이미 수많은 시민과 군인이 대치하고 있었다.

류씨는 대열 맨 앞쪽으로 나갔다. 뒤에서 시민들이 인도 보도블록을 깨 앞으로 건넸다. 시민들은 보도블록 쪼가리를 군인들에게 던지며 투석전을 벌였다.

시위대가 몰고 온 트럭과 시내버스가 군인들 방향으로 위협 운전을 했다. 군인들과 시위대의 거리가 점점 넓어졌다.

차량에 가려 앞쪽 상황은 잘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 군인들이 보이지 않는 틈으로 '탕탕탕' 총소리가 들렸다.

시위대 뒤편에서는 "공포탄이니 겁내지 말고 돌진하자"고 했다. 류씨는 그때 시내버스에서 조그마한 불꽃이 튀는 걸 봤다.

"시내버스에서 철판에 부딪침시로 나는 불꽃 같은 게 보이드라고. 아, 공포탄이 아니고 실탄이구나, 나는 공업사를 한 사람잉께 그런 불빛을 보고 딱 알 수 있었제. '안 죽을라믄 뒤로 빠져야 쓰겄는디' 생각했는디 사람이 너무 많아 빠질 수가 없었어요."

앞으로 가면 죽게 생겼고 뒤로 빠질 수도 없는 상황. 류씨는 살기 위해 돌이라도 던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돌을 주우려고 숙이는데 왼쪽 팔에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다.

"하도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가 아프지도 않았는디 내가 옆으로 푹 쓰러지드라고요. 내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서 있었는가도 몰라요. 근데 쓰러지면서 인도 모서리 턱에 허리를 찍혔어요."

류관열씨가 자신의 왼쪽 팔에 남은 총알 흉터를 보여주고 있다. 2022.10.1/뉴스1

서른살, 젊고 몸도 좋던 류씨였지만 총을 맞은 데다 허리를 다쳐 일어서지를 못했다. 옆에 있던 시민 두 명이 류씨를 부축해 일으켰다.

시민들은 "이 XX들이 참말로 총을 쏴부네"라면서 류씨를 부축해 공용터미널(현 롯데백화점 광주점 위치) 근처로 옮겼다.

그날 자정쯤 공용경기장 북쪽 건너편의 한 병원에 도착해 닫힌 병원 셔터를 두드려 자고 있던 의사와 간호사를 깨웠다.

의사와 간호사는 류씨를 응급처치했다. 조금 있으니 총상 환자 6명이 잇따라 실려 왔다. 무릎에 총 맞은 환자, 옆구리 총상 환자, 가슴 쪽에 총알이 박힌 환자도 있었다.

"내가 아마도 첫 탄을 맞은 거 아닌가 싶어요. 맨 앞에서 군인들이랑 대치하고 있었으니까. 아마 위협 사격에 맞은 듯싶긴 한데. 암튼 그때 광주역에서 몇 명이 죽었어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종합보고서(2007)와 80년 당시 보안사령부가 생산한 '광주 소요 사태 진행 상황' 자료 등을 보면 '광주역 발포'는 5·18민주화운동 기간 중 첫 '집단 발포'다.

문건에는 5월20일 9시50분쯤 광주역에서 경계 중인 제3공수여단 16대대 정관철 중사가 시위대의 차량에 깔려 사망하자 최세창 여단장(준장)이 각 대대에 M-16 실탄을 배부하고 장착하도록 지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3공수여단 출신 신순용 전 소령은 "20일 밤 광주시민들은 공수부대가 보이니 트럭을 몰고 왔다. 20살 정도로 보이는 젊은 사람이 트럭을 몰고 접근했는데 갑자기 운전병이 튀어 나가서 가로막다 치었다"며 "운전병이 숨지자 전남대에 있던 대대본부에서 실탄을 싣고 왔고 접근하는 차량 운전자를 조준 사격해서 죽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지난 5월 발표한 중간보고를 보면 광주역 집단 발포로 최소 4명이 숨지고 16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상황을 종합하면 류씨는 계엄군이 차량 운전자를 향해 쏜 집단 발포 과정에서 총상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응급 처치를 받은 류씨는 다음 날 '김영철 외과'에서 정식으로 총상 치료를 받았다. 그제야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진통제를 처방받고 왼팔에 삼각붕대를 둘렀다.

22일 류씨는 삼각붕대를 두르고 다시 금남로에 나가 시위대에 합류했다.

"총알을 맞긴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도 없고, 이대로 멈출 수도 없었죠. 끝장을 봐야겄다 생각한 거죠."

류씨는 이후 시위대 차량에 올라타 백운동 까치고개와 학동, 농성동, 말바우 시장 등 광주 곳곳을 다니며 활동했다.

계엄군의 마지막 전남도청 진압 작전이 벌어지기 전날인 26일 밤. 류씨는 전남도청을 지키기 위해 집을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가 결사적으로 만류했다. 죽을 수도 있으니 절대 나가선 안 된다며 온 집안을 솜이불로 두르고 류씨를 막아섰다. 아내의 애타는 만류를 뿌리칠 수 없었다.

27일 아침 일찍 금남로로 나갔다. 금남로와 전남도청 앞은 이미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9월27일 전남 순천시 서면의 한 주택에서 만난 5·18 피해자 류관열씨(71)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2022.10.1/뉴스1 ⓒ News1

10일간의 항쟁이 끝나고 류씨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공장 사정은 급격히 어려워졌다. 그 많던 주문이 끊기기 시작했다.

계약하더라도 주문받은 물건을 다 만들어 놓을 때쯤 갑자기 계약을 파기하자는 연락을 받기 일쑤였다.

류씨는 자신의 몸이 불편해서 일감이 끊기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예 일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직원들이 있으니 문제 될 게 아니었다.

직원들 월급 주기도 빠듯해질 무렵에서야 어슴푸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직원들 숙식까지 제공하며 일을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주문도 줄고 계약도 파기되니까 쎄하드라고요. 그러다 정보요원이랑 마주친 거죠. 나를 몰래 감시했던 건데, 주위에도 '빨갱이니까 엮이지 말라'고 했던 것 같아요."

결국 류씨는 공장을 접었다. 직원들은 지인들의 공장에 재취업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류씨에게는 '부채'만 남았다.

사업을 접었지만 경찰의 요시찰은 계속됐다. 그들을 피하고자 풍향동으로 이사 갔지만 다른 경찰이 감시했다. 류씨가 하루만 보이지 않아도 집안으로 쳐들어와 '남편이 어디 갔냐'며 아내를 들들 볶았다.

"일도 제대로 못 하게 하고 일상생활 자체를 할 수가 없으니까 사람이 미치는 거예요. 견디다 못해 85년도에 혼자 순천으로 피했어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어서요."

가족들에게도 위치를 알리지 않았다. 가끔 전화를 할 때면 아내는 "애들 있는 집에 계속 군인들이 찾아온다"며 힘들어했다. 어쩔 수 없이 86년에 아내와 아이들을 순천으로 데리고 왔다.

순천에서도 요시찰이 시작됐다.

남의 공장에 나가 일을 했지만 업무시간에 경찰이 와 류씨를 감시하고 있으니 공장주도 부담스러워했다. 다른 일을 찾아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시절은 정신적인 고통으로 힘들었는데, 나이가 들자 신체적으로 힘들더라구요. 총 맞은 충격으로 어깨를 잘 못 썼고 쓰러지면서 다친 허리 통증도 심해졌고요."

1990년 정부로부터 5·18 피해자 장애 14급으로 인정받아 3800만원을 보상받았다. 하지만 그간 미리 당겨쓴 병원비로 갚고 나니 남은 것이 없었다.

"제가 어느 정도로 돈이 없었냐면요, 5·18 피해자 등록도 제가 한 게 아니에요. 몇 년 동안 병원비를 못 내니까 병원에서 '돈을 못 받았다'고 신고를 했고 신고필증과 총을 맞은 검진 기록지가 있어 유공자가 됐어요."

1995년부터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다. 적십자병원에서 디스크와 척추관협착증 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다.

누울 때도, 걸을 때도, 오래 앉아있는 것도 힘들어 일을 그만둬야 했다. 그때부터 아내가 생계를 책임졌다.

류씨 아내는 순천시청에서 추진하는 하천 정비 활동을 하며 월 200만원의 급여를 받는다. 아내의 급여와 동생의 장애 수당이 이들 가족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다.

담담하게 말하던 류씨는 아내 관련 얘기가 나오자 울컥했다.

"5·18에 가담한 것은 후회하지 않아요. 다만 그로 인해 가족들한테 너무 미안해요. 아내 혼자서 애들 키우고 대학 보내고 너무 고생했고, 여전히 일을 하니까…. 나도 인간인데 죽을 만큼 미안하죠."

눈물을 손으로 훔치던 류씨는 작은 소망이 있다고 했다. 이제라도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보상을 받고 아내를 쉬게 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조그만 집이라도 한 채 구입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 집도 곧 개발이 돼 쫓겨나면 우린 갈 데가 없어요. 거주할 곳이 생겨서 아내한테 미안함 없이, 걱정 없이 살고 싶어요."

9월27일 전남 순천시 서면의 한 주택에서 만난 5·18 피해자 류관열씨(71)가 아내 얘기를 하며 울먹이고 있다.2022.10.1/뉴스1 ⓒ News1 박준배 기자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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