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없는 10년…우리가 신해철을 계속 소환하는 이유
“동시대를 살던 뛰어난 아티스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잖아요. 내 곁에 늘 같이 있던 소중한 물건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거죠. 저 같은 중장년층들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해서 신해철을 추억하는 이유일 겁니다.”
2014년 10월27일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마왕’ 신해철의 10주기를 앞두고 그와 친분을 맺었던 ‘찐팬’ 조승원 문화방송(MBC) 기자가 한 말이다. 신해철의 부재 상황이 10년이 됐지만, 여전히 그를 놓아주지 못하고 소환하는 이유가 바로 동경의 대상이 사라진 허망함 때문이라는 얘기다.
조 기자는 “많은 사람이 비틀스를 기억하지만, 대부분 동시대를 살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다. 하지만 신해철은 다르다. 그의 최전성기 때 우리는 함께 그의 음악을 즐겼다”며 “갑자기 소멸해버린 고인의 10주기를 앞두고 아쉬움의 목소리들이 모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는 27일 신해철 10주기를 맞아 추모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벌써 방송가는 이달 초부터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 그를 반추하고 있다. 2회에 걸쳐 내보낸 문화방송 특집 다큐멘터리 ‘우리 형, 신해철’은 손석희, 싸이, 김동완 등 그와 인연이 있던 여러 인물을 등장시켜 주목받았다. 이 방송에서 ‘100분 토론’ 진행자였던 손석희 전 제이티비시(JTBC) 사장은 “신해철은 매우 훌륭한 토론자였다. 훌륭한 토론자의 요건 가운데 하나가 적극적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건데, 신해철이 그랬다”고 말했다. 싸이는 자신의 음악 실력 기초를 쌓게 해준 선배라고 신해철을 기억했다.
이 밖에 에스비에스(SBS) ‘과몰입 인생사 2’, 한국방송2(KBS2) ‘불후의 명곡’, 티브이엔(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등에서도 신해철을 다뤘다. ‘불후의 명곡’에선 밴드 크라잉넛이 고인의 아들 동원씨와 ‘그대에게’를 함께 불러 화제가 됐다. 먼저 간 선배를 기리는 동료·후배들의 헌정 콘서트 ‘마왕 텐스(10th): 고스트 스테이지’도 오는 26~27일 인천 영종도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열린다. 싸이, 넬, 국카스텐, 이승환, 전인권 등 쟁쟁한 출연진이 대기 중이다.
높은 추모 분위기에는 ‘10년’이라는 숫자의 영향도 있다. 하지만 신해철이 현재 대중음악계에서 찾기 힘든 독보적인 존재였다는 이유가 더 크다.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음악가로서 신해철이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해서 재평가되고 있다”며 “오버그라운드에서 인기 정점에 있던 그가 갑자기 밴드를 결성해 하고 싶었던 음악을 추구하는 모습은 지금도 흔하지 않은 사례다. 대중이 10년 동안 그의 존재감을 확인해온 이유”라고 짚었다.
신해철은 1988년 엠비시 대학가요제에 밴드 무한궤도의 리더로 참가해 ‘그대에게’로 대상을 받으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조용필이 전주 키보드 소리만 듣고 대상을 결정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탁월했다. 이후 솔로로 전향한 그는 발라드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등을 히트시키며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돌연 록 밴드 넥스트를 결성하며 로커로 돌아섰다. 음악성과 대중성 모두 사로잡으며 인기 정상에 있을 때 갑자기 넥스트 활동을 접고, 영국으로 건너가 모노크롬이라는 프로젝트 밴드를 만들기도 했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같은 당시 국내에서 찾기 힘든 인더스트리얼 록을 시도하며 또 한번 대중을 놀라게 했다. 이런 그의 음악 궤적 자체가 현재 국내 가요계에선 찾기 힘들다는 평가다.
음악만이 아니다. 지금 청년층에게도 신해철의 존재가 부각되고 있다. 신해철의 ‘말’ 때문이다. 이들에게 신해철의 음악은 동시대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효순이·미선이 사건, 간통죄 폐지 등에 대한 언급,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 연설 같은 신해철의 소신 어록은 틱톡 등 쇼트폼을 타고 계속해서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순위 프로그램에서 1등 하면 기분 좋은 게 2주 가요. 연말에 상 받으면 3주 가고요. 그런데 앨범 녹음하고 콘서트 준비하면서 고생한 기억은 평생 가요. 행복하려면 과정을 즐겨야 돼요”라는 그의 말은 유튜브에서 100만회 넘는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서정민갑 평론가는 “최근 엔터테인먼트 업계 특성상 아티스트가 신해철처럼 사회 억압이나 부조리에 대한 언급을 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 그를 더욱 그립게 만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독립음반제작사 영기획의 하박국 대표는 “아티스트가 사회적 발언을 하면 공격받는 시대가 됐다. 오히려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던 과거에 당당하게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힌 신해철의 모습에 젊은 세대들이 공감하고 있다”고 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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