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스무 살의 일기장

김성중 소설가 2026. 3. 5.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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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바꾸며 발굴된 고대 유물
‘내가 쓴 책 독자가 읽어줬으면’
대목에… 초심 환기·용기 얻어
소원도 성취했는데 기운내자!


김성중 소설가

웅크려서 글 쓰는 버릇, 집중할수록 무너지는 자세, 그렇게 쭉 살아왔으니…. 결국 오십견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통증이 심한 것은 아니나 내 오른팔은 만세를 하지 못하고, 뒷짐을 질 때마다 곡소리가 난다. 도수치료를 받은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아무래도 책상을 바꿔야겠어’.

나는 결혼을 하면서 육인용 탁자 두 개를 사서 하나는 식탁으로, 하나는 책상으로 썼다. 식탁은 종종 가족과 지인들로 채울 때도 있지만 책상은 나만의 영토였다. 프린터기도 올려놓고, 책과 노트북과 독서대를 다 늘어놓을 수도 있어서 참 좋았다. 문제는 높이다. 이 탁자에 매달려서(?) 글을 쓰다보면 어깨가 치솟게 되고 발이 땅에 착 붙지 않는데, 하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자세가 무너진다는 게 물리치료 선생님의 말씀이다. 열두 해 동안 이 탁자에서 몇 권의 책을 캐내었으니 바꿀 때도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여겨봐둔 책상은 높낮이가 조절되는 것인데, 운 좋게 중고거래로 새거나 다름없는 책상을 장만하게 되었다. 내친김에 책꽂이에 의자까지 샀더니 내 서재는 새로 태어났다.

책상과 책장을 바꾸는 건 거기에 딸려있던 파일과 책들을 정리하는 일이기도 해서, 라면 박스 분량의 인쇄물을 버리고 펼쳐보지 않을 책들을 퇴출시켰다. 그 와중에 고대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다름 아닌 스무 살의 일기장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가운데서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릴 때 일기장을 펼쳐보면 글씨체도 다르고, 나라고 믿어왔던 자아상과 약간 차이가 난다. 실은 아주 많이 난다!

이렇게 허세가 심하고 자의식 과잉에 반 타스 정도 되는 남자친구 후보를 저울질하고 있을 줄이야. 대학에 떨어졌던 날에는 ‘이상하게도 감흥이 없다. 이번 주에 도스토옙스키를 읽은 것이 더 큰 충격이다’ 이런 식으로 짐짓 여유를 부려 놓았다. 여차저차 다른 대학에 들어가자, 친구와 먼 해남까지 여행 가서 ‘민족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한다. 일년 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문예창작학과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하며 엄마의 피눈물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날려먹은 등록금!)

이따금 진로에 대해서 문학이냐, 만화냐를 두고 고민을 한다. ‘만화를 그리기만 하면 크게 성공할 것처럼 구는 나 자신이 웃기다’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그래놓고는 귀퉁이에 아주 작은 글씨로, 속삭이듯이 이렇게 써 놓았다. ‘이 다음에 내가 쓴 책이 세상에 나와서 단 한명의 독자라도 읽어주고 나와 마음이 통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 대목에서 깜짝 놀랐다. 스무 살의 기준을 봤을 때 나는 소원을 이룬 사람이었다. “만세!”를 외치기에 비록 오른팔이 시원스레 올라가진 않지만. 갑자기 그 여자아이가 용기를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할 수 없이 수다스럽고, 고민도 너무 많고, 세상에 대해 두리번거리다가 며칠에 한번씩 일기를 쓰는 그 여자애가 러시아 인형처럼 내 속 어딘가에 들어있을 것이다.

그 애를 보니 나의 원단이랄까, 초심에 대한 환기가 되었다. 부쩍 중년이라는 중력에 짓눌려 있었으니까. 딸과의 대화 중에 무심코 “너는 젊은이가 될 거고 엄마는 늙은이가 될 예정이야”라고 말했다가 스스로에게 팩트 폭행을 맞아 울적해하기도 했다. 그런 내게 저 철부지가 일깨워준 것이다. 내가 얼마나 대책 없이 꿈을 꾸고 잘 부풀어 오르고 의기양양했는지 말이다.

‘소원도 성취했는데 기운내자!’ 이런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멋지고 깨끗한 새 책상에서 오늘의 일기장을 펼쳤다. 지금 쓰는 일기 또한 장차 늙은이가 될 나에게 용기를 줄 거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김성중 소설가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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