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남수의 視線] “오므라이스 나오셨습니다”
“화장실은 이쪽이세요” “찾으시는 옷은 없으세요” “커피 나오셨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색하지만, 뭔가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대화할 때 상대에 따라 존댓말을 하거나 편하게 반말을 하는 것이 우리말의 특징이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것도 존댓말과 반말이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절하게 응대하는 말 중에서 어색한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앞의 예를 든 경우다. 우리말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화장실이나 옷, 커피 등 사람이 아닌 사물을 존대하는 것을 두고 ‘사물존대’라고 한다. 주로 편의점이나 백화점 직원으로부터 듣게 되는데, 사물존대를 ‘백화점 높임말’이라고 하는 까닭이다. 물건을 사고 대금을 지불할 때 “3만 원 되시겠습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3만 원입니다”가 바른 표현이라고 정정하기도 하지만, 그 직원은 그렇게 얘기하면 손님들로부터 공손하지 못하다고 지적을 받는다고 했다. 사물존대는 소비자의 권리가 신장되면서 나타난 현상인 셈이다.
존댓말은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쓰는 언어 표현으로, 경어(敬語) 또는 높임말이라고도 한다. 자신보다 듣는 이가 나이가 더 많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경우에 쓴다. 물론 처음 만났거나, 친분이 없는 경우도 존댓말을 사용한다. 일본어에도 우리의 존댓말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표현이 있지만, 우리말처럼 쓰임새가 다양하고, 세분화되어 있지는 않다. 존댓말의 다양성을 증명하듯 우리말에는 반존댓말도 있다. “김 대리 잠깐 보자”라고 하는 대신에 “김 대리 잠깐 볼까요”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만큼 우리말의 복잡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객을 우선하는 고도화된 사회가 되면서 친절을 넘어, 고객이 만족하는 것에 이어 요즘은 고객이 감동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존댓말을 사용하는 언어습관이 그 정도를 넘어 결과적으로 사물에게도 존대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존댓말의 진화에 반비례해서 우리말에는 심한 욕설도 발달하고 있다. 지나친 존칭 혹은 왜곡된 존댓말의 반작용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욕설이 발전했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임은 틀림없다.
욕설은 기본적으로 남의 인격을 무시하거나 저주하는 말이다. 옛 동창을 만났을 때 친밀함을 드러내기 위해 욕설을 사용하지만, 이 역시 왜곡된 언어문화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욕설을 하게 되는 배경에는 자신의 안 좋은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기본적으로는 욕설을 통해 상대가 두려움을 갖게 함으로써 힘의 우위를 과시하려는 심리도 깔려있다. 그래서 욕설은 모욕죄 처벌의 대상이 된다.
요즘은 직접적 욕설보다는 상대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언어폭력’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차라리 욕을 하고 말지, 사람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조롱과 비난은 갈수록 진화해가는 느낌이다. 실시간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인터넷 시대, SNS 시대에는 언제든지 조롱하고 비난할 수 있게 됐다. 직접적 욕설보다는 인간적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말들의 잔치가 벌어질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된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수치심을 주는 표현과 마녀사냥식 여론몰이, 가짜뉴스에 근거한 비난 등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지난 16일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한일 정상회담에 대해 한일 관계 개선이라는 성과를 이뤘다는 평가와 굴욕 외교라는 양극단의 평가가 가파르게 갈린 채 막을 내렸다. 예상은 했지만, 뭔가 찜찜한 뒤끝을 남긴 결과였다. 어쩌면 예상을 이렇게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지, 답답함을 넘어 무력감과 참담함까지 느끼게 한다. 바로 이번 한일 정상회담 이후 벌어지는 양극단의 평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국론 분열은 자기주장에만 그치지 않고 서로를 향해 조롱과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의 주요 내용을 복기하면, 한일 정상 간 셔틀외교 부활, 일본의 한국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해재와 한국의 WTO 제소 취하 그리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인 지소미아 정상화였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강제징용 등 과거사 문제는 언급조차 없었다. 일본 총리는 “1998년 10월에 발표한 한일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만 언급했을 뿐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그 정도로 언급했으니, 알아서 해석하라는 뜻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양국 정상 간 우의를 다진다고 두 차례에 걸쳐 저녁식사를 했다. 2차 저녁자리에서는 도쿄 긴자거리에 있는 오므라이스 전문점에서 생맥주에 한국과 일본 소주를 섞어서 만든 폭탄주 시전도 있었다. 무엇을 마시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하필 은화를 찍어냈던 긴자거리냐? 은을 캐던 사도광산은 강제징용의 본산이 아니냐? 두 번째 저녁 메뉴였던 오므라이스는 일본 근대화의 상징인데, 일본 식민지로 인해 우리나라가 근대화됐다고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떠올리게 한다는 등의 비판도 함께 나왔다.
그럼 만약 한일 두 정상 간의 2차 저녁자리에서 “오므라이스 나오셨습니다”라고 한다면, 지나친 존댓말일까, 조롱일까.
강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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