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용 끌고 오는 ‘차 없는 거리’…‘전시행정, 강제동원’ 논란
'생색 내기', '일회성 반짝 이벤트', '탁상행정'…최근 제주도가 개최한 걷기 행사를 놓고 지역 환경단체들이 쓴 표현입니다.
탄소 배출을 줄여 환경도 지키고 건강도 챙기는, 그야말로 일석이조 행사에 왜 환경단체마저 매운 비판을 한 걸까요?
■ '시클로비아' 본떠 만든 제주판 '차 없는 거리 걷는 날'
제주도가 '차 없는 거리'를 예고한 건 추석 연휴가 끝난 이달 중순이었습니다. 9월 28일 오전에 시내 도로가 보행자와 자전거 이용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제주도가 벤치마킹한 모델은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서 시행하는 세계 최대 수준의 차 없는 거리 제도 '시클로비아(civlovia)'입니다. 128㎞에 이르는 도심 주요 도로 14개 구간을 일요일과 공휴일마다 자전거와 보행자 통로로 바꾸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시클로비아를 본떠 일시적으로 차로를 막아 자전거나 인라인스케이트 등을 탈 수 있게 하는 곳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제주판 '시클로비아' 행사가 열린 도로는 제주시 도심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간선 도로인 연북로 일부 2㎞ 구간입니다. 왕복 6차로 가운데 절반은 걷기, 2개 차로는 자전거 전용으로 나눴습니다. 나머지 1개 차로는 버스 통행이나 긴급 상황 등에 대비해 비워뒀습니다.
■ 차 끌고 와야 하는 '차 없는 거리' 행사?…"보여주기식 행사" 비판도
'사람 중심의 보행환경 조성과 탄소중립 달성, 에너지 대전환 정책 중 하나'라는 번드르르한 취지와는 달리 행사는 예고 단계서부터 극심한 반발 여론에 부딪힙니다.
우선 개최 장소가 제주에서 통행량이 많기로 손꼽히는 주요 간선도로 한가운데였습니다. 행사 장소에 접근하기 위한 시내버스 등 대중교통이 부족한 점도 지적됐습니다. 수도권이나 다른 광역시처럼 지하철이나 전철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접근성 문제까지 거론되자 걷기 행사 개최 장소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쇄도했습니다. 지역 언론에서도 우려 섞인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제주도 역시 행사를 열기 전, 이 같은 문제를 알고 있었습니다. 열악한 대중교통 등 접근성 문제로 인해, 개막식이 열리는 무대 인근에 임시 주차장 500여 면을 미리 마련했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차 없는 거리' 행사를 위해 자가용을 끌고 가야 하는 웃지 못할 모순이 벌어진 것입니다.
제주도는 "당초 시민들이 접근하기 좋은 곳을 검토했으나, 주택가와 상업시설이 많다는 문제가 있었다"며 "도로 통제 시 차량정체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는 도로는 제외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행사를 앞두고 지역 환경단체 등 시민사회단체에서는 "탁상행정"이라며 들고일어났습니다.
이들은 행사 전에 낸 논평에서 "취지에는 공감하나, 사람들이 관심을 끌 만한 '키워드' 일부만 벤치마킹하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꼬집었습니다. 제주 상황에 맞는 걷기 좋은 인프라와 정책을 만들기 보다, 일회성 생색내기 행사로 그칠 수 있다는 염려였습니다.
28일 걷기 행사 당일 아침 KBS 취재진이 현장을 둘러보니, 예상대로 행사장 일대 주차장은 개막식 1시간 전부터 참가자들이 끌고 온 자가용 수십 대로 일찌감치 가득 차 있었습니다.
■ "공무원·공공기관 직원 동원"…공직선거법 위반 논란까지
제주도의 '차 없는 거리 걷기' 행사가 열리기도 전부터 도마 위에 오른 이유는 또 있습니다. 제주도가 사전 참가 신청을 요청하는 공문을 모든 부서와 산하기관 등에 돌렸기 때문입니다.
행사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공무원과 제주도 출자·출연기관 등을 동원했다는 논란에 불씨를 심었습니다.
제주도가 발송한 공문에는 '가족과 함께 임직원들이 걷기 행사에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기 바란다'는 요청이 담겼습니다. '행사 참여 인원에 대한 사전 수요 조사'를 명목으로 기관별 참여 예정 인원을 회신에 첨부할 것도 요구했습니다.
사실상 '강제 참가'나 다름없다는 볼멘소리가 공무원 사회에 번져나갔습니다.
실제 걷기 행사가 열린 날 제주의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집안 행사가 있는데, 남편이 (제주도) 산하기관에 근무하다 보니 강제 동원으로 행사에 참여하러 갔다"며 하소연하는 댓글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이날 행사에는 제주지역 경제계 관계자들도 대거 참가했습니다. 개막식에선 제주에 본사를 둔 공기업과 민간 기업, 금융기관 등 8개 기관·기업이 '걷기 기부 캠페인' 업무협약서에 서명했습니다.
이에 대해 제주도 측은 28일 KBS와의 통화에서 "행사를 홍보했을 뿐"이라며 공무원과 공공기관 직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라고 해명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자전거, 등산 동아리 등을 위주로 행사를 알렸다. 도내 장애인 단체에서도 참가 의사를 밝혀오기도 했다"면서 "가족과 함께 온 사람도 많고, 공직자 역시 오고 싶은 사람 위주로 온 것으로 파악했다. '동원'이라는 표현은 억울한 면이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한편 이날 행사는 공직선거법 위반 논란에도 불씨를 심었습니다. 제주도는 28일 걷기 행사 4㎞를 완주한 참가자 일부에게 제주 지역화폐 '탐나는전' 상품권 5천 원권을 선착순 지급했습니다. 참가한 제주도 공무원들에게도 1인당 식대 1만 원을 지원했습니다.
국민의힘 제주도당은 지난 27일 이에 대한 논평에서 "공무원을 동원하는 것을 넘어 동원된 공무원들에게 도지사 재량으로 현금성 식비를 지급하겠다는 건 공직선거법상 기부행위에 어긋날 수도 있다"며 제주도선거관리위원회에 유권해석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제주판 '차 없는 거리' 걷기 행사에는 제주도 추산 참가자 1만 명이 참가해 반나절 동안 도심을 가로지르는 '차 없는 도로'를 걷고, 자전거로 달렸습니다.
참가자들은 대체로 호평했습니다. 휠체어 장애인뿐만 아니라 반려견을 데리고 오거나, 어린 자녀와 함께 걷는 가족 단위 참가자도 있었습니다. "평소 걸을 기회가 없는데, 가족과 나와서 함께 걸으니 좋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며 정기적으로 열리길 바라는 반응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날 걷기 행사에 곱지 않은 시선도 적지 않았습니다.행사장인 주요 간선 도로가 이날 아침 6시부터 낮 1시까지 통제되며, 시내 곳곳은 한때 극심한 정체를 빚기도 했습니다. 간선도로로 통하는 이면도로까지 통제되면서, 중간에 차를 돌려 빠져나오거나 통제 요원과 입씨름을 벌이는 광경도 벌어졌습니다.
"사전에 해당 도로에서 행사를 개최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도로 통제 정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문제를 지적하는 운전자도 있었습니다.
걷기 행사가 열린 도로 일대 사업장도 큰 불편과 손실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대중교통이 부족한 데다 넓은 도로 특성상 차를 몰고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상권이기 때문입니다. 행사로 통제된 구간에는 유명 식당과 카페, 대형 마트를 비롯해 여러 사업체가 모여 있습니다.
아침부터 낮까지 도로가 통제돼 손님을 받을 수 없었던 식당은 점심 장사를 공쳤고, 아예 영업을 포기하고 문을 닫은 상점도 더러 있었습니다. 여기에 제주에서 가장 큰 규모 장례식장도 도로 통제 구간 가운데 위치한 탓에 상주도, 조문객들도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불편을 겪었습니다.
제주도는 이날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렀다'며 자평했습니다. 생활 속 걷기를 도민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라며, '차 없는 거리 걷기'가 주목적은 아니라고 덧붙였습니다.
제주판 '시클로비아'는 지속 가능할 수 있을까요.
[연관 기사] 논란 속 ‘차 없는 거리’ 걷기 1만 명 참가…“걷기 문화 확산 노력”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069769
■ 제보하기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카카오 '마이뷰', 유튜브에서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민소영 기자 (missionalist@kbs.co.kr)
Copyright © K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이용(AI 학습 포함)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