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카드, 업의 전환 가능케 한 질문…“기술을 쓸 것인가, 점령당할 것인가”
[비즈니스 포커스]
“어느 회사가 AI 기반으로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까?” 올 한 해 월가를 장악한 주제는 AI의 수익성이었다. 빅테크 기업들이 AI에 천문학적 비용을 투자하지만 투자비용을 회수하는 기업은 몇 없고 천문학적 구멍에 신음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런데 이 도발적 질문에 당당히 대답할 수 있는 한국 기업이 등장했다. 빅테크도 아닌 금융회사, 현대카드가 그 스타트를 끊었다.
2024년
“데이터 사이언스의 강을 건너다”
“어떤 알고리즘을 반영해도 원하는 데이터를 산출해낼 수 있도록 현대카드의 데이터 플랫폼을 궤도에 올려놓았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데이터 플랫폼을 판매하는, 데이터 설계에 강한 ‘테크 기업’으로 거듭나게 됐다.”
지난 5월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기자들을 만나 테크 기업으로서의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데이터 플랫폼을 판매하는 기업. 꽤나 추상적이었다. 더더욱 당시엔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었기에 정 부회장의 말을 주목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5개월이 지난 10월 17일 언론들은 그의 말을 다시 불러와야 했다. 현대카드는 이날 자사의 데이터 사이언스 기반 AI 플랫폼인 ‘유니버스’를 일본 빅3 신용카드사인 스미토모미쓰이카드(SMCC)에 판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계약 규모만 수백억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국내 단일 소프트웨어 계약으로는 전 산업군을 통틀어 사상 최대의 수출이었다.
금융업계에서도 최초의 성과였다. 빅테크도 아닌 금융사가 독자 개발한 AI 소프트웨어 수출에 성공했다는 것은 일반적 금융회사의 해외 진출과는 결이 다르다. 지금까지 금융사들이 금융서비스를 통해 해외에 진출하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태영 부회장은 이를 염두에 둔 듯 “현대카드가 데이터 사이언스의 강을 건넜다”고 말했다. 업의 전환을 선언한 셈이다.
2015년
“‘다른 회사’가 되는 수밖에 없다”
금융사에서 테크 기업으로의 전환, 이는 10년에 걸친 현대카드 투자의 결실이었다. 정 부회장은 “산업혁명보다 더욱 거센 데이터 혁명의 시대”라며 “현대카드는 그 강을 거의 넘어왔고 이를 위해 지금까지 AI에만 1조원을 투자해왔다”고 말했다.
이런 성과를 내는 출발점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5년 정 부회장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구글과 같은 글로벌 빅테크뿐 아니라 네이버, 카카오 등 국내 정보기술(IT) 기업까지 금융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카드사의 영역이 침해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와 동시에 당시 카드사들은 가맹점 수수료율 인하라는 상황에 내몰렸다. 상생이 사회적 화두였기 때문에 카드사는 수익성 악화를 피할 수 없었다. 그해 하반기 출범 예정인 인터넷전문은행은 또 다른 위기요인이었다. 카드가 갖고 있던 중금리 대출 시장을 나눠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기술적으로는 핀테크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카드사들은 앞다퉈 디지털전환을 선언하며 모바일 전용카드나 O2O 서비스를 내놓기 시작했다.
정 부회장은 카드사의 위기를 기회를 바꿀 방안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업의 전환이었다. 영업이익의 30%가량을 AI와 데이터 사이언스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정 부회장은 “현대카드만의 페이스로 발전시키겠다”며 모두가 가는 길 대신에 현대카드만의 길을 찾기로 했다.
그가 선택한 건 ‘데이터’였다. 그는 현대카드가 축적한 고객의 소비 데이터는 테크 기업이 쉽게 확보할 수 없는 값진 ‘원석’이라고 확신했다. 그때부터 “1년에 2000억원 정도만 벌고 나머지는 모두 AI와 데이터 기술에 쏟아붓는다”는 파격 실험에 나섰다.
지금 와서 보면 선제적 투자였지만 당시만 해도 뜻밖의 선택이었다. 그는 “업계에 내려앉은 안개를 뚫기 위해서는 이제는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회사’가 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카드업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업의 전환을 이루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듬해(2016년)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조금은 낯설지만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며 현대카드를 ‘카드사’에서 ‘디지털 IT 기업’으로 변신시키기 위해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디지털이라면 행여 뒤떨어질까 무조건 다 하는 게 아니라 판단력을 갖고 우리 페이스대로 추진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는 AI 시대에 무조건 많은 데이터를 모으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비즈니스를 위한 목적을 설정하고, 그 목적에 걸맞은 핵심적인 데이터를 추려내고, 그 데이터에서 유의미한 패턴을 추출하는 것. 특히 그 모든 과정을 AI가 수행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곧 데이터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데이터를 어떻게 해석하고 활용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현대카드의 철학으로 정립됐다.
이를 위해 데이터를 단순히 수집하는 것을 넘어서 AI를 기반으로 분석하고 활용하는 알고리즘 전문 조직을 신설했다. 당시 다른 기업들이 단순히 빅데이터에 의존하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현대카드는 데이터의 양보다 이를 분석하고 활용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데이터 사이언스’ 역량을 강화해 나갔다.
2019년
“슈퍼 맞춤형 비즈니스를 구상하다”
회사는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2015년 20명 수준이었던 디지털 관련 인력은 2018년 350명으로 크게 증가했고 이 중 40%는 데이터 관련 인력으로 채웠다. 이들이 도출한 데이터의 값은 ‘초개인화 서비스’였다. 지금이야 고객별 맞춤형 서비스가 기본값이 된 시대이지만 그때만 해도 금융사의 고객별 맞춤형 서비스는 걸음마 단계였다.
정 부회장과 현대카드는 고객을 성별, 연령, 직업 등으로 구분하는 기존의 시장 세분화 방식으로는 고객들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을 더 이상 충족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2019년 IBM 회장이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는 인물을 초청해 진행하는 일대일 대담 프로그램에서 처음으로 ‘초개인화’ 서비스를 꺼내 들었다. 지니 로메티 IBM 회장이 “다음 혁신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묻자 정 부회장은 “슈퍼 맞춤형 비즈니스를 구상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어 “고객들은 요일마다 하는 일이 판이하게 다를 정도로 각각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이 매우 다향하다”며 “이렇게 다양한 고객 한 명 한 명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비즈니스가 슈퍼 맞춤형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카드가 보유한 데이터의 방향성이 ‘초개인화’로 명확해진 순간이었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트렌드코리아 2020’에서 초개인화를 그해의 트렌드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한발 앞선 인사이트였다.
방향성을 정하자 디지털전환에 가속도가 붙었다. 현대카드는 먼저 800만 명에 달하는 고객의 신용카드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장 크고 고도화된 ‘데이터 레이크(Data Lake)’를 구축했다. 데이터 레이크는 모든 데이터를 원시 형태 그대로 저장하는 중앙 저장소다. 현대카드는 이곳에 저장한 데이터들의 다양하고 반복적인 조합을 통해 정교한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고객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소비하는 행태를 구분할 수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공식을 구현한 것이다.
이러한 데이터 설계가 바로 현대카드 데이터 분석의 핵심인 ‘태그(tag)’다. 태그는 나이·직업·취향·소비습관 등 고객의 결제를 이끌어내는 요소인 수천여 개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생성한 데이터 분석체계인데, 이 태그를 통해 목표로 설정한 고객의 특성이나 마케팅 목적에 맞는 초개인화 서비스가 가능하다.
현대카드는 이 태그 조합들을 모아 산업 전 영역에 초개인화 서비스가 가능한 AI 플랫폼 ‘유니버스’를 개발했다. 일본 빅3 신용카드사인 SMCC가 최근 수백억원을 주고 구매한 소프트웨어가 바로 이 유니버스다.
유니버스는 데이터 사이언스 기반의 초개인화 AI 플랫폼이다. 현대카드 측은 이를 “지난 10년간 쌓아온 온 데이터 사이언스 및 AI 역량이 결집된 플랫폼”이라고 소개했다. 현대카드 데이터 분석의 정수인 태그를 통해 개인의 행동·성향·상태를 예측해 고객을 직접 목표 설정하고, 업종에 상관 없이 비즈니스의 전 영역에 적용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의 금융사도 이 점을 높이 샀다. SMCC는 6개월에 걸쳐 기술 실증을 진행한 뒤 구매 절차를 거쳤다. SMCC 측은 “철저한 검증 과정을 통해 현대카드가 세계 최고 수준의 데이터 분석 및 설계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도입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유니버스 도입을 통해 AI와 데이터 사이언스에 기반한 세밀한 타기팅을 통한 가맹점 판촉 고도화를 진행하는 한편 여신 업무, 고객 상담, 부정사용 감지 등 전사적인 영역에도 유니버스의 AI를 도입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2023년
“오로지 금융권의 자세에 달려 있다”
데이터와 이를 가공하는 역량은 이제 현대카드의 새로운 자산이다. 금융업에서 얻은 데이터를 기술과 융합시킨 데이터 사이언스는 기존 카드산업의 한계를 넘어 현대카드가 더 큰 성과를 내는 데 기여했다.
업의 근간인 금융에서도 비약적 성과가 나왔다. 지난해 10월엔 현대카드가 개인 신용판매 부문에서 삼성카드를 제치고 업계 2위에 올라섰다. 개인 신용판매는 카드사 본연의 경쟁력을 평가하는 핵심 지표로 꼽힌다. 하지만 이미 성숙한 국내 카드 시장에서는 큰 폭의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현대카드도 2018년 3위 자리를 내준 뒤 4위에서 고전했다. 2위란 고무적 성적에 업계에선 현대카드 10년의 AI 투자가 결실을 봤다는 분석이 나왔다.
현대카드 측도 데이터 기반 마케팅이 고객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확신한다. 회사 관계자는 “데이터 사이언스 기반의 전략이 기존에 마케터가 추천할 때보다 6배 높은 마케팅 효율을 거뒀다”고 설명했다.
이를테면 상업자표시신용카드(PLCC)다. PLCC는 창고형 할인마트점인 코스트코에서 현대카드만 쓸 수 있는 것처럼 특정 브랜드나 기업과 카드사가 협업해 발행하는 신용카드다. 현대카드는 국내 카드업계에서 최초로 PLCC 사업에 AI와 데이터 사이언스를 적극 활용했다. PLCC 상품의 기획, 개발, 그리고 파트너사와의 마케팅 협업에 이 기술, 즉 유니버스를 접목해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현대카드는 파트너사의 다양한 문제 해결에도 유니버스를 활용하기 시작했고 데이터 동맹 초기인 2020년 10건에 지나지 않았던 마케팅 협업 건수는 현재 약 2000건을 넘어설 정도로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현재 네이버, 대한항공, 스타벅스, 이마트, 코스트코 등 다양한 파트너 기업들이 현대카드와 협업 중이다. 여기에 정 부회장이 선제적으로 추진한 애플페이 도입도 현대카드의 성과를 견인하고 있다.
각 업계를 대표하는 국내외 유수의 기업들은 현대카드와 PLCC 파트너십을 맺고 ‘데이터 동맹 회원’이 됨으로써 현대카드가 지닌 데이터 설계 역량과 플랫폼을 제공 받길 희망한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S&P는 지난해 6월 현대카드의 그룹 내 평가 지위를 한 단계 상향하며 “현대카드의 PLCC는 고객이 신차를 구매하는 과정에서 초기 계약금을 신용카드로 지불하고자 하는 니즈를 충족시키기 때문에 현대차·기아의 신차 판매 촉진을 위한 장기 전략에서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결국 데이터 사이언스 기술이 현대카드의 상품 경쟁력을 높이고 있는 셈이다. “기술을 쓸지 기술에 점령당할지는 오로지 금융권의 자세에 달려 있다”(2023년 6월 10일 페이스북)고 했던 그의 말이 실감 나는 사례다.
2024년
“이는 시작일 뿐이다”
PLCC 프로젝트를 넘어 데이터 플랫폼을 판매하는 일은 이제 현대카드의 주업이 될 전망이다. 현대카드는 “일본을 시작으로 북미·유럽·중동·아시아 등 각국에서 데이터 사이언스 협업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SMCC가 속한 일본 SMFG(Sumitomo Mitsui Financial Group) 산하의 다른 계열사뿐만 아니라 해외 유수의 금융사들도 유니버스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회사도 업의 전환을 마쳤다. 현재는 직원 4명 중 1명이 디지털 전문 인력일 정도다. “예전에는 어떻게 AI 인재를 데려올까 걱정했는데 이제는 우리 직원 뺏기면 어떻게 하나”라고 우려한 정 부회장의 말은 기우가 아니다.
그는 “이제는 우리가 뿌려놓은 데이터 사이언스의 성과가 올라오는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이번 계약은 시작일 뿐이다.
앞서 현대카드는 2011년 알파벳 카드, 플래티넘 시리즈, 국내 최초의 VVIP 카드인 컬러 카드 등 신용카드 시장을 뒤흔든 획기적인 카드 라인업을 소개하며 이 같은 메시지를 던졌다. 누가 카드의 이런 규칙을 만들었냐는 도발적 질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현대카드가 화두를 던지고 있다. AI 시대에 테크 기업으로 화려한 전환을 마치며 “WHO MAKES THE RULES?”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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