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미국 대통령 선거가 민주주의에 던지는 질문들
무엇보다도 이번 선거가 전례 없는 사건과 반전으로 얼룩진 선거라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공화당 후보인 트럼프가 지난 7월 피격당한 직후, 성조기를 배경으로 주먹을 불끈 쥔 사진을 남길 때만 하더라도 선거의 승자는 결정된 것으로 누구나 생각하였다. 폭력에 굴복하지 않는 강력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였을 뿐 아니라, 늘 주장해왔던 것처럼 자신을 제거하려는 심층국가(deep state) 음모론이 ‘입증’되었다고 지지자들에게 선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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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례 없는 사건·반전 얼룩진 선거
‘선거불복’ 트럼프의 대도전 보며
대의제 민주주의 기반 취약성 느껴
새로운 참여·거버넌스 만들어가야
」
인도계 어머니와 자메이카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해리스 후보는 정치공학적으로 보았을 때 매우 도전적인 승부수가 아닌가 생각한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2016년 모든 예상을 뒤엎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일등공신은 지난 수 십년에 걸쳐 진행된 세계화, 국제화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미국 ‘러스트벨트’의 백인 노동자층이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아시아로의 일자리 유출과 중남미 이민자 노동력의 유입이라는 이중적 도전에 직면하여 극빈층으로 전락한 이들은 사실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이었다. 이들은 2016년에는 트럼프에 열광하였고, 2020년에는 바이든으로 상당수 돌아갔던 반면, 이번에 해리스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민주당 입장에서 유리한 부분도 있다. 미국 정치지형에 매우 중요한 분계선인 낙태-생명권의 문제가 미국 대법원의 판결로 인해 요동치고 있고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1973년이래 미국 연방정부 수준에서 낙태권을 보호해왔던 로-웨이드 판례를, 트럼프 재임시 임명한 세 명의 보수성향 대법관들이 주축이 된 대법원에서 폐기한 것이다. 임신 중지와 관련된 논쟁이 직접적으로 ‘몸’에 와닿는 쉬운 이슈인 동시 종교적 믿음의 영역까지 건드린다는 점에서 그 파괴력은 이미 2022년 중간선거에서 입증되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이번 대통령 선거가 트럼프의 ‘부활’ 여부에 달려있는 선거라는 점이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트럼프라는 개인이 가지는 주목성과 흡인성을 뛰어넘을 수 있는 다른 후보가 없다는 것은 경선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미국 워싱턴 정가의 철저한 아웃사이더를 자처하고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기치 아래 철저한 대중선동노선을 지향했던 트럼프가 2016년 당선될 것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고 그저 미국 민주주의가 잠시 앓는 열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2020년의 낙선과 뒤이은 미국 의사당 점거 사태, 그리고 여러 건의 기소와 유죄판결을 뛰어넘어 2024년 공화당의 후보로 부활할 것을 예상한 사람도 많지 않았다. 이번 대선에서 만약 당선이 되면 미국 역사상 2번째로 백악관에 재입성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다.
2015년 처음 미국 정가에 나타나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던 트럼프를 바라보던 미국의 여론은 마치 어릿광대의 리얼리티 예능을 보는 듯 취급했다. 그러나 채 십년이 넘지 않는 시간에, 한 때 링컨의 정당이었던 미국 공화당이 MAGA와 이민자 적대의 정당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싫건 좋건 트럼프라는 현상이 민주주의 자체에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십년 간에 트럼프,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두드러진 민주주의의 퇴조현상(backsliding)이 새삼 우리에게 일깨워준 사실은, 근대적 정치질서로서 대의제적 민주주의가 서 있는 기반이 생각보다 훨씬 취약하다는 사실이었다. 협력과 타협, 대화와 관용의 규범이 한 번 무너지면 그 복원이 너무 어렵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양극화된 정치의 원심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한국정치에서도 절실하게 목격하고 있다.
선거 결과에 불복하여 폭력을 사용한 정치집단과 관련이 있는 트럼프가 공화당의 후보가 되었고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국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더 암울한 건 해리스가 대통령이 된다고 양극화된 미국 정치가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이다.
미국 민주주의가 겪고 있는 위기는 우리의 위기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처음 출범하던 200년 전 미국 유권자들의 모습과 오늘의 유권자들이 매우 다른 것처럼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식의 참여와 거버넌스 규칙들을 만들어가야 할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는 터널의 입구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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