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석의 남자의 물건] [37] 본질로 돌아가는 시간, 손목 위 작은 타임머신

손목시계가 돌아왔다. 시간을 확인하는 도구로써 필요가 사라진 이후, 손목시계는 지위와 취향, 부와 명예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남자의 액세서리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런데 최근 몇 해 전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롤렉스가 새롭게 받아들여졌고, 달리기 열풍은 기존 스마트워치의 편의성과 필요성을 증폭시켰다. 이제 손목에 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다시 익숙해졌다.
손목시계가 일상의 도구로 돌아오면서 달라진 분위기가 있다. 원래 시계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었다. 스마트워치처럼 수많은 정보와 업데이트, 동기화와 같은 관리도 필요하지 않았다. 점점 고도화되는 현대사회의 피로를 닮은 이런 모습 대신, 시계의 본질을 추구하는 흐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남자의 물건이 바로 카시오의 F-91 시리즈다. 1989년 출시 이후 37년 동안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를 지켜온 스테디셀러이자 군인시계로 익숙한 물건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손목시계로 알려진 만큼 관련 유명인도 여럿이다. 상극의 세계를 이끌던 오바마와 빈 라덴의 애착 시계이면서,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이 공식 석상에 종종 차고 나와 화제가 된 바 있다.
21g에 두께 8.5㎜의 가볍고 얇으며 뛰어난 방수 능력을 자랑하는 이 시계의 가장 큰 장점은 3만원을 넘지 않는 합리적인 가격이다. 별도의 충전이나 관리 없이 배터리 한 알로 7년은 거뜬하다. 그러나 이 제품이 사랑받는 건 가성비와 편의성이 전부가 아니다. 작은 시계판 위에 빼곡하게 쓰인 글씨의 폰트와 배색, 전자시계라는 물성은 90년대의 ‘모드’를 알라딘의 요술 램프처럼 오늘날의 시간, 일상 속에 불러낸다. 누군가가 알아봐 주는 시계, 누군가와 비교되는 시계, 누군가를 부러워할 시계가 아니라 지친 하루 우연히 마주친 옛 친구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나만의 시절인연이다.
남자들은 한 번씩 뒤를 돌아볼 때가 있다. 우리네 삶은 한번 출발하면 멈출 수 없는 경주다. 동기부여는 그다음 무대에 대한 동경이다. 성취의 도파민에 취해 잠을 줄이고, 부양의 책임감에 성질도 죽이며 앞만 보고 내달린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고 지나온 시간을 되감아 볼 때 따스한 추억에서 위로를, 잊고 살았던 감각과 기억에서 소년의 순수했던 꿈을 마주한다. 새로운 도약을 위해 본질로 돌아가는 시간, 카시오의 전자시계는 초심을 마주하는 손목 위 작은 타임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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