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귀환' 쿠드롱 8년만의 세계선수권 제패, 통산 4번째

벨기에 앤트워프의 새벽 공기가 아직 차가울 때, 당구장 안은 뜨거웠다. ‘왕의 귀환’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프레드릭 쿠드롱이 스스로 증명했다. 세계3쿠션선수권 결승, 상대는 같은 벨기에의 에디 멕스. 스코어는 50 대 47, 32이닝. 기록만 놓고 보면 접전이었지만, 흐름을 들여다보면 한순간의 폭발과 그 뒤의 노련함이 승부를 갈랐다. 멕스가 전반 중반 9점 하이런을 터뜨려 12점 차까지 벌렸을 때만 해도, 분위기는 완전히 멕스 쪽으로 기울었다. 관중석도 술렁였고, 멕스 특유의 단단한 템포가 경기장을 압도했다. 그런데 23이닝, 쿠드롱이 12점을 몰아치며 단숨에 34-34를 만들어버렸다. 그게 이 결승의 분수령이었다. 그다음부터는 서로 작은 실수를 줄다리기하듯 주고받았고, 쿠드롱이 27·28이닝에 7점을 연달아 보태며 48-44로 앞서 나가자 멕스가 다시 1점 차로 따라 붙었다. 마지막 32이닝, 쿠드롱은 남은 두 점을 말끔히 처리하며 8년 만에 세계 챔피언 자리에 복귀했다. 2017년 산타크루스에서 멕스를 꺾고 우승했던 그가, 8년 뒤 다시 멕스를 넘고 통산 네 번째 왕관을 썼다는 점도 이야기의 묘미다.

쿠드롱의 우승이 더 크게 다가오는 이유는 단순히 트로피 숫자 때문이 아니다. PBA로 건너갔다가 UMB 무대로 돌아온 뒤, 그는 월드컵에서 꾸준히 상위 라운드에 오르며 감을 끌어올렸지만 마지막 한 고비에서 번번이 막혔다. 6년여의 공백과 환경 변화는 세계 정상급 선수에게도 적응이 필요한 일이다. 이번 대회 초반 조별리그에서조차 김행직에게 패하며 흔들리는 듯했지만, 결국 그룹 1위로 토너먼트에 올라 여유 있게 흐름을 다잡았다. 8강에서 마틴 호른을 애버리지 3점대 경기로 밀어낸 장면, 준결승에서 카호퍼를 상대로 깔끔하게 경기를 끝낸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결승의 대역전극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반짝이 아니라, 컨디션과 감각을 끝까지 끌어올린 결과였다. 그래서 이번 우승은 “한 번 더 해냈다”는 확인이라기보다 “다시 시대를 연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결승의 흐름을 조금 더 뜯어보자. 멕스는 초반에 큐스피드와 스트로크 길이를 짧게 가져가며 테이블을 혹사시키지 않는 안정형으로 시작했다. 쿠드롱은 그 템포에 굳이 맞서지 않았다. 초반엔 무리한 회전과 힘을 자제하고, 공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찬스가 오자 한 번에 12점을 쏟아 넣었다. 이게 쿠드롱의 무서움이다. 단타로 적립하는 선수들이 많은 반면, 그는 흐름을 읽다가 한 번의 큰 물결로 경기를 뒤집을 줄 안다. 하이런을 만든 뒤에도 바로 다음 이닝에 5점을 보태며 멘탈 싸움의 주도권을 가져온 장면은 정말 교과서적이었다. 반대로 멕스는 마지막 31이닝에 1점 따라붙고도, 이어지는 타석에서 마무리 해법을 찾지 못했다. 코너 근처에서 쿠드롱이 의도적으로 길게 빼놓은 수구의 궤적을 끝내 풀지 못한 것이다. 고비에서의 해법, 그 한 끗이 승부를 갈랐다.

쿠드롱의 장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팬들이 가장 먼저 이야기하는 건 ‘부드러운 스트로크’다. 끌어치기나 밀어치기를 할 때도 공을 때려내는 소리보다, 쓰다듬듯 밀어주는 감각이 묻어난다. 이 덕분에 라인을 크게 망가뜨리지 않고 연속 득점을 만들 수 있고, 다음 공을 위한 포지셔닝도 자연스럽다. 빠른 루틴도 강점이다. 괜히 서두르는 게 아니라, 생각할 건 이미 몸이 다 알고 있으니 주저할 일이 없다. 그래서 난구가 와도 공이 서면 바로 셋업, 바로 큐. 이 템포가 상대의 호흡을 흔든다. 결승에서도 멕스가 잠깐 멈칫하는 순간, 쿠드롱은 이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게 ‘왕의 경기 운영’이다.

기술적으로 보면, 쿠드롱은 파이브앤하프 기본선 위에서 변주를 끝없이 만든다. 짧은 횡단, 길게 미는 뒤돌려치기, 얇게 비벼서 포지션을 남기는 더블레일, 거기에 테이블 컨디션에 따라 두께를 1~2mm씩 조절하는 손맛이 기가 막히다. 결승 23이닝 하이런 중중반부에 보여준 뒤돌려치기 연속 장면은, 역회전을 살짝만 더 주어 3쿠션 지점에서 서는 힘을 최소화한 교과서였다. 팬 입장에선 “저걸 왜 저렇게 얇게 치지?” 싶은 공인데, 결과를 보면 테이블이 열리며 다음 공이 오히려 쉬워진다. 이게 ‘득점과 포지셔닝을 동시에 만드는 샷’이다. 그래서 쿠드롱 경기를 보다 보면 한 점이 아니라 두 점, 세 점이 미리 보인다.

무대 밖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8년 만의 세계선수권 우승은 숫자 이상의 무게를 갖는다. 세계선수권 통산 4회 우승, 산체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 기록은 세대가 바뀌는 와중에도 그의 이름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뜻한다. 세계 랭킹도 크게 뛰어 10위권으로 복귀했다. 앞으로 월드컵 포인트가 더해지면 상위권 경쟁은 다시 혼전이 될 것이다. 준우승한 멕스가 세계 1위에 올라섰고, 조명우가 2위로 내려왔다는 소식은 한국 팬들에게 아쉬움이겠지만, 동시에 긴장감을 준다. 조명우는 3년 연속 시상대에 올랐다. 이건 실력의 뎁스가 단단하다는 증거다. 결승에서 만났다면 또 다른 그림이 펼쳐졌을 것이다. 그만큼 정상권의 간격은 촘촘하고, 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만든다.

왜 지금 쿠드롱의 우승이 중요한가를 묻는다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는 ‘당구의 해법’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보여줬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시대가 아니라, 라인과 두께, 회전과 속도를 섬세하게 엮어 한 박자 일찍 다음 공을 준비하는 방식. 팬들이 당구를 재밌게 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아도, 테이블 위에서 매 장면마다 “이렇게 풀면 돼”라고 말해주는 선수. 쿠드롱은 그 상징이다. 앤트워프의 결승 무대에서 12점 하이런이 터진 순간, 그는 단지 점수만 따라잡은 게 아니다. 관중의 마음과 경기의 맥, 그리고 상대의 템포까지 한꺼번에 가져왔다. 챔피언은 그렇게 경기를 뒤집는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건 마지막 장면의 태도다. 48-47로 쫓기는 상황에서, 많은 선수가 망설인다. 회전을 더 줄까, 두께를 조금 두껍게 잡을까, 혹은 안전하게 길게 돌릴까. 쿠드롱은 평소 하던 대로, 필요한 회전과 필요한 속도를 딱 맞춰 두 점을 끝냈다. 화려한 세리머니도, 감정의 과장도 없었다.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묵직하게 미소를 지은 정도. 이 정도 무대 경험을 쌓은 선수의 여유가 화면 너머로까지 전해졌다. 멕스도 준우승이 아쉬웠겠지만, 벨기에 팬들 입장에서는 두 레전드가 자국 대회 결승에서 명경기를 보여줬다는 것만으로도 선물 같은 밤이었다.

이번 우승이 쿠드롱의 ‘마지막 불꽃’이냐, ‘제3의 전성기’의 서막이냐를 묻는 질문에는, 그의 경기 내용을 보면 답이 보인다. 체력이나 집중력의 큰 하락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경기 운영의 노련함과 위기에서의 해법은 더 세련됐다. 월드컵에서 애버리지 3점대를 뽑아내는 장면이 여전히 나온다. 무엇보다 테이블 컨디션을 읽는 속도가 빠르다. 당구가 나이를 먹을수록 느려진다고들 말하지만, 쿠드롱은 그 나이의 당구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팬들로서는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없다. 시즌 내내 ‘쿠드롱 vs 멕스 vs 조명우’ 구도가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야스퍼스, 블롬달, 산체스 같은 이름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판에서, 세대와 세대가 교차하는 그 지점에 다시 쿠드롱이 서 있다.

정리하자면, 앤트워프의 결승은 점수표보다 이야기가 풍성한 경기였다. 큰 점수 차가 났을 때도 포기하지 않고, 한 방으로 흐름을 바꾸고, 끝에서는 평정심으로 마무리했다. 하이런 12점은 숫자 그 이상의 메시지였다. 8년 만의 왕관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팬들이 왜 쿠드롱에게 ‘황제’라는 별명을 붙였는지, 새벽의 화면 속 그 몇 장면이 충분히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 시즌, 이 황제가 어떤 방식으로 판을 흔들지 기대하게 됐다. 멕스의 반격도, 조명우의 재도전도, 다른 강자들의 끼어들기도 다 흥미롭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두 점을 남겨두고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 손끝의 감각, 그리고 조용한 미소로 돌아온 왕의 어깨를 오래 기억하고 싶다.

Copyright © 구독과 좋아요는 콘텐츠 제작에 큰 힘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