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하나 차이로 나뉜 ‘흑상권’과 ‘백상권’ [2030 중심으로 재편되는 외식업]
거리 하나 차이지만 확연히 다른 두 상권
재편되는 외식업계 현실 뚜렷하게 반영
고물가, 고금리 등의 영향으로 한국 경제 곳곳이 크게 위축돼 있다는 진단이 적지 않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배달로 힘겹게 버틴 외식업계도 그중 한 곳이다. 외식업체를 운영하는 업주로서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무섭게 오르는 식자재 가격과 부담스러운 대출 금리뿐 아니라, 점점 얇아지는 지갑에 꺾이지 않고 오르는 외식비 등으로 식당을 찾지 않는 이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외식업계에서 그나마 활기가 띠는 곳은 주로 20·30세대가 찾는 가게다. 전문가들은 외식산업이 20·30세대 위주로 재편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서울의 대표적인 외식 발달상권 중 20·30세대가 주로 찾는 용리단길과, 용리단길과 맞닿아 있는 삼각지역 상권을 통해 달라지는 외식산업의 흐름을 짚어봤다.
이웃 상권이지만 매출은 2배 차이
신용산역 상권 동쪽(용리단길)과, 삼각지역 상권 남쪽(삼각지역)은 외식업이 집중된 서울의 대표적인 발달상권이다. 발달상권의 기준은 기관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주로 대규모 상업시설이 집중된 역세권이나 대로변 중심으로 여러 프랜차이즈 업종이 집중된 상권을 뜻한다.
지난달 13일 오후 5시30분,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자 용리단길에 오가는 이들이 늘기 시작했다. 금요일 저녁, 친구 혹은 연인과 외식을 즐기려는 듯 한껏 차려입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연령대는 주로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추석 연휴 직전이라, 일찍 귀성하거나 여행을 떠나는 이들 때문에 오가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란 예상과는 달랐다. 일부 유명 식당과 카페 앞에 줄을 서 있는 이들도 볼 수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삼각지역 분위기는 용리단길과 크게 달랐다. 거리에 오가는 이들도 적을 뿐 아니라 인근 대통령실·국방부 청사 등을 경비하는 경찰 인력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연령대는 40대 이상으로 보였다. 언론에 자주 소개된 수십년 이상 영업한 유명 노포 몇 곳에는 손님들로 북적였지만 비어 있는 점포들이 적지 않았다.
삼각지역 인근에 거주하며 외식업체를 운영하는 30대 A씨는 “여기(삼각지역)와 용리단길은 연령대와 고객층이 확연히 다르다”며 “용리단길은 20대 후반에서 30대까지 많이 찾고, 여기는 주로 경찰·국방부·대통령실 직원들이 대부분이고 그 외에는 다 중장년층 이상”이라고 말했다.
삼각지역과 용리단길 상권의 중심지 간 거리는 약 200~300m, 도보 5분 거리에 불과하다. 상권 가장자리 경계선으로 보면 길 하나 차이다. 삼각지역은 지하철 4호선·6호선 환승역이라 대중교통 접근성도 4호선밖에 없는 용리단길보다 낫다. 그런데도 두 상권 간 분위기 차이는 확연했다.
이는 데이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신용보증재단이 운영하는 ‘서울시 상권 분석 서비스’를 활용해 임의로 두 상권을 비교해보면 올해 2분기 기준 외식 점포 수는 삼각지역 76개, 용리단길 73개로 거의 같았다.
그러나 유동인구, 매출 등은 크게 차이를 보였다. 삼각지역의 유동인구는 하루 평균 2079명으로 용리단길(8016명)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삼각지역의 외식업체 월평균 매출액은 1314만원으로, 용리단길 상권(2722만원)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연령대별 매출 비중을 보면 삼각지역은 40대가 21.3%, 50대 18.8%, 60대 이상은 14.9%였다. 40대 이상 매출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용리단길의 경우 40대 이상 매출은 24.8%였다.
두 상권이 이처럼 차이가 나는 이유는 명확했다.용리단길은 상대적으로 오래된 점포가 많은 데 비해, 용리단길은 최근 3~4년 내 생긴 점포가 대부분이다. 점포 특성 또한 용리단길은 20·30세대가 선호할 특색 있는 메뉴와 콘셉트로 구성돼 있다. 이규민 경희대 조리외식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은 외식업과 같은 서비스 산업의 유행이 굉장히 빨리 변하는 사회”라며 “주로 가는 곳만 가는 중장년층과 달리 20·30세대는 적극적으로 유행을 소비하려는 성향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이 때문에 외식업계가 20·30세대 위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며 “용리단길처럼 20·30세대를 주 대상으로 상권이 형성된 지역에 더 많은 이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모호해지는 두 상권 경계…양극화·젠트리피케이션 나타나
용리단길이 활성화된 건 불과 3~4년 전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소규모 점포들이 들어섰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용리단길의 장점으로는 접근성과 풍부한 수요가 꼽힌다. 지리적으로 서울의 중심에 있어 강북 지역과 강남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이 약속 장소로 잡기 좋다. 점심 때는 아모레퍼시픽 등 인근 대기업 직장인 수요가 있고, 최근에는 대단지 아파트들이 들어서 고정 수요층의 폭도 넓다.
이러한 장점으로 용리단길의 범주가 점차 커졌고, 삼각지역과 맞물리게 됐다. 최근에는 전통적으로 삼각지역으로 불리는 지역에 용리단길에 어울리는 특색 있는 점포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해 두 상권을 가르는 기준도 모호해졌다. 삼각지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자리한 외국 콘셉트 식당은 용리단길에서 유명 식당을 운영하는 이가 지난해 다른 콘셉트로 문을 연 곳이었다.
이처럼 주목받는 상권이 되면서 임대료와 권리금 등 비용도 상승했다. 예전과 달리 개업하려면 적지 않은 자본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주택을 고쳐 소규모로 문을 여는 예전 점포 형태와 달리 최근 문을 여는 점포는 건물 전체를 꾸미는 등 규모 면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용리단길 인근 공인중개사 B씨는 “18평(약 59㎡) 점포 월세가 700만~1000만원이고, 권리금은 2억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삼각지역은 재개발 이슈가 있어 새 점포가 비싼 권리금을 내지 않으려 하지만, 용리단길이 더 활성화되면 삼각지역까지 확산할 것이라고 B씨는 말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높은 임대료와 권리금으로 확산하는 데 한계에 도달했고, 젠트리피케이션도 나타나고 있다고 봤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영세 기업이 주를 이루던 지역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대형 문화·상업 시설이 들어서며 원주민이 쫓겨나는 현상을 뜻한다.
삼각지역에서 25년째 식당을 운영하는 C씨도 최근 3~4년간 용리단길의 유동 인구가 늘었지만, 삼각지역은 크게 변화가 없다고 했다. C씨는 “용리단길은 잠깐 왔다 빠지는 사람들”이라며 “집값이랑 임대료만 높였다”고 말했다.
20·30세대가 선호하는 유행이 워낙 빠르게 변화하다 보니, 용리단길의 특색 있는 콘셉트가 물렸고 대부분 외식 점포라 즐길거리가 없다는 부정적 전망도 있었다. 용리단길 외식업체에서 일하는 직원 D씨는 “용리단길은 올해 여름 이후 조금 시들해졌다”며 “여기는 교통은 좋을지 몰라도 다른 동네와 달리 즐길거리가 없고 음식점과 술집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성수동은 팝업 스토어가 매번 바뀌는 데 비해 여기는 코인노래방도 없어 코인노래방을 가려면 (지하철 한 정거장 떨어진) 숙대입구까지 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학 기자 gomgo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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