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천리’ 개사곡, 4.19혁명 불씨 지폈다

[이영훈의 노래가 품은 역사]

오늘 4월 19일은 1960년 4.19혁명이 발생한 지 65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런데 대중가요를 개사한 노래가 전국으로 구전되며 4.19혁명의 불씨를 지펴 올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노래는 바로 '유정천리'이다.

1959년 남홍일 감독의 영화 ‘유정천리’가 개봉된다. 배우 김진규, 이민자, 박암, 안성기 등이 출연한 이 영화는 강원도 산골에 살던 세 식구가 시골생활이 싫어 무작정 서울로 떠나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고향 선배의 소개로 운전학원을 다녀 택시기사가 된 남편(김진규)은 새 직업을 갖게 된 기쁨을 아내(이민자)와 함께 나눈다. 하지만 곧 교통사고를 내고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남편 옥바라지를 해야 할 아내는 남편 택시회사 동료(박암)와 바람이 나서 어린 아들(안성기)을 버려둔 채 자취를 감춘다. 아들은 부모 모두와 헤어져 거리를 헤매는 거지소년이 된다.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남편은 어느 날 거리에서 아들과 극적으로 만난다. 그간의 정황을 알게 된 남편은 몹쓸 아내를 원망하지만 모든 것을 잊고 굳세게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는 아들의 손목을 잡고 황혼이 비끼는 언덕길을 오르며 이렇게 외친다. ‘가자!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으로’

이 영화는 많은 관객들의 손수건을 흥건히 적시게 만들며 많은 화제를 모았지만, 영화보다 더 유명해진 것은 주제가 ‘유정천리(반야월 작사, 김부해 작곡, 박재홍 노래)’다. 노래 가사에는 1950년대 후반, 전쟁을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한국인들의 고달픈 삶과 막막하던 심정이 실감나게 담겨져 있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고향에
못 살아도 나는좋아 외로워도 나는좋아
눈물 어린 보따리에 황혼빛이 젖어드네

세상을 원망하랴 내 아내를 원망하랴
누이동생 혜숙이야 행복하게 살아다오
가도 가도 끝이없는 인생길은 몇 구비냐
유정천리 꽃이 피네 무정천리 눈이 오네

그리고 이 노래는 1960년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에 맞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조병옥의 예기치 않는 병사(病死)와 함께 다시 한번 대중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작사 반야월, 작곡 김부해, 노래 박재홍의 '유정천리'

조병옥의 도미… 자유당의 ‘꼼수’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라는 유력한 후보를 내고도 신 후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대선을 치러보지도 못한 민주당은 와신상담하게 된다. 민주당이 우여곡절 끝에 꺼낸 새로운 카드는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 미 군정 경무부장과 6․25때 내무장관을 지낸 ‘조병옥’이었다.

1959년 11월 26일 서울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 표결 결과 조병옥은 총 투표자 966명 가운데 484표를 얻어 481표를 획득한 장면을 3표차로 누르고 대통령 후보가 된다. 부통령 후보로는 차점자인 장면이 또다시 뽑혔다.

하지만 민주당 전당대회는 신·구파의 갈등으로 생채기를 남겼다. 이런 민주당의 당내 갈등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자유당은 3월 조기선거를 추진한다. 표면상의 이유는 농번기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다. 민주당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선거를 치름으로써 야당의 붐 조성과 선거공세에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뒤늦게 선거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민주당은 대통령 선거 사무장에 김도연, 부통령 선거 사무장에 오위영을 선임했고, 신파와 구파 사이에 선거자금과 전략에 대한 협의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병옥 후보가 신병 치료차 도미(渡美)할 계획을 하고 있어 만약 3월 이전에 선거가 실시되면 제대로 된 유세도 못할 형편이었다.

마침내 신병 치료를 위해 미국을 방문하는 조병옥은 도미 인사를 겸해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고 조기 선거를 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사실상 제안을 거부당한 민주당은 1월 24일 확대간부회의를 열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다음의 4개 항목을 제시하고 회신을 요구한다.

① 3월 선거는 임기만료 30일전에 선거를 실시한다는 헌법정신을 곡해하는 것이다.
② 5월 중순은 농번기가 아니다.
③ 선거관례에 따라 3월 선거는 부당하다.
④ 조병옥 후보의 신병으로 3월 선거는 페어플레이가 될 수 없다.

이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1월 28일 민주당에 회신을 보내 “지금도 나는 선거는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에 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생각한다”며 민주당의 주장을 일축한다.

4년 전 신익희에 이어 조병옥 마저…

자유당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부정선거 시도가 노골화되는 가운데 조병옥 대통령 후보는 1월 29일 부득이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난다. 그는 지병인 위장병이 악화되어 국내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자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위 수술을 받기로 결심한다.

조병옥은 도미길에 오르면서 당 간부들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조기선거만은 안되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하며, 환송객들에게 “낫는 대로 곧 달려 오리다”는 짤막한 말을 남기고 떠난다.

그러나 민주당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은 선거를 예년보다 두 달이나 앞당겨 3월 15일에 실시한다고 전격 발표한다. 미국에서 이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조병옥은 “이것은 페어플레이 정신을 망각하고 등 뒤에서 총을 쏘는 격”이라고 비난성명을 발표하지만 선거일은 조정되지 않았다.

조병옥은 2월 6일 수술을 받고 경과가 좋아져, 직접 한국에 전화를 걸어 병세가 좋아지면 열흘 뒤에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식을 전한 뒤 귀국 일자만 초조하게 기다린다. 그러나 조병옥은 2월 15일 아침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병원에서 급서(急逝)한다.

민주당은 이로써 4년전 해공 신익희에 이어 또다시 선거도 해보기 전에 대통령 후보를 잃게 되는 불운을 맞는다. 조병옥의 유해는 미국으로 떠난 지 22일 만에 환국했다.

국민들의 애통함은 너무나 컸다. 국민들은 박재홍의 노래 ‘유정천리’를 개사해 부르면서 슬픈 마음을 달랬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네
가도가도 끝이 없는 당선길이 몇 구비냐
자유당에 꽃이 피고 민주당에 비가 오네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춘삼월 십오일의 조기선거 원망하랴
천리만리 타국에서 박사 죽음 웬말이냐
설움 어린 신문 들고 백성들이 울고 있네

‘유정천리’ 노래가 퍼지면 퍼질수록 자유당은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나 경상도를 중심으로 시작된 반(反) 자유당 운동은 대구의 2․28 학생봉기와 마산의 3․15의거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4․19혁명의 불씨를 지피게 된다.

김철웅 님이 올린 '유정천리' 연주곡. 뒷부분 3절에 개사곡이 나온다.

'유정천리' 개사곡에 맞선 '이승만 찬가'

대중들의 ‘유정천리’ 개사곡에 맞서 자유당은 ‘이승만 박사 찬가’와 함께 ‘이기붕 선생’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국민학교(현재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쳤다.

일제시대 미국 아이오와주 헌팅턴 호텔에서 일했고, 귀국해서는 대형 유흥음식점인 ‘국일관’에서 지배인을 지낸 이기붕에 대해 ‘일제의 탄압을 물리쳤다’고 표현한 노래 가사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다음은 ‘이기붕 선생’ 노래 가사다.

서기 어린 태백산 정기를 받아
대한의 한복판 기상에 나셔
그 이름 찬란하다 이기붕 선생
이 박사를 보필하실 애국자시네
일제의 탄압을 물리치시고
조국의 광복을 이루었으니
그 이름 찬란하다 이기붕 선생
이 박사를 보필하실 애국자시네

3.15부정선거에 반발, 자유, 정의, 진리를 외치며 시민혁명으로 출발한 4.19혁명.

4․19 혁명으로 자유당이 몰락하고 ‘유정천리’의 가사는 다시 한 번 바뀌어서 불린다. 혁명의 성공으로 ‘유정천리’ 개사곡이 폭발적인 호응을 얻자 신세기레코드사는 이를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가고자 정식 개사곡 음반을 제작했다.

원곡 가수인 박재홍이 녹음한 ‘4․19와 유정천리’는 대중이 만든 개작가사 두 절에 새로 한 절을 덧붙인 형태였다.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는 ‘민주당에 꽃이 피네 자유당에 비가 오네’로 가사가 바뀌었다.

그러나 음반사의 기대와는 달리 이 음반은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혁명 분위기에 편승한 ‘상업 기획’이 오히려 거부감을 유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과 이기붕과 자유당은 이미 죽은 권력이었다. 대중들은 죽은 권력보다 서슬 퍼렇게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 풍자하고 비판할 때 쾌감을 느끼는 법이다.


※ 이영훈 가요연구가는 국제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신문기자로 20여 년간 근무하다 방송으로 옮겨 10년째 기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채널A 보도본부에 근무하면서 메인뉴스 편집데스크와 디지털뉴스부장을 지냈고 쾌도난마, 뉴스톱텐 등 여러 시사 프로그램의 제작데스크로 일해 왔다. 보도본부 선임기자를 거쳐 현재는 심의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한국정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유행가는 역사다>,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