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크라운 귀걸이는 아직도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을 가르쳤다. 나의 첫 학생들이었다. 아이들은 17살, 난 26살이었다. 내가 뭘 알기나 했을까. 그런데도 난 겸손하기는커녕 아이들 앞에서 한없이 경력 많은 교사처럼 굴었다. 아이들은 잔뜩 겁을 먹은 채로 내 말을 잘 따라주었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겁을 먹은 척해 주었던 것 같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며 집을 나서는 아이에게 "그래, 오늘도 공부 열심히 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라며 으레 부모는 말한다. 그 문장 하나에 기대어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아이들을 지도했다. 아이들은 나를 선생님이라 불러주었고, 그 단어 안에 깃들어 있는 권위를 의심 없이 인정했다. 교실이라는 작은 왕국 안에서 나는 왕이었다. 수업은 우리가 함께 만드는 제1막 제1장, 한 편의 드라마였다. 무대 그 자체였다.

나는 대학에 다니며 배웠던 각종의 수업 방식을 다 써보았다. 물을 만난 고기였다. 지역구 선거사무실에 들러 후보자를 인터뷰해 오게 하지를 않았나, 모둠 발표와 토론은 매일, 4컷 시사 만화 그리기, 콜라주 만들기, 신문을 읽히고 만들기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사회참여 체험이 중요하다며 내 고장의 불편한 구석을 찾아오라고 했다. 나는 너희가 잘 배워서 사회의 참된 일꾼이, 시민이 되어야 한다며 닦달했다.

그렇게 선생님의 철학이 담긴 수행평가를 열심히 좇아와서 아이들이 받아가는 점수의 비율은 고작 20퍼센트 정도였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반영 비율을 따지지 않았다.

나는 행복했다. 수업은 재미있었다. 나에게 배정된 수업 시간이 너무 적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이들이 하교할 때면 우울했다. 아침 출근길에 아이들을 만나면 그들과 나누는 이야기에 나는 또 금세 즐거워졌다. 사랑도 이런 사랑이 없었다.

그런데 아주 그냥 사회 선생님티를 팍팍 냈던, 자비라곤 1도 없던, 새내기 선생님에게 아이들은 많은 추억을 남겨주었다. X재팬 노래를 CD로 구워주어 제이팝을 알게 해준 녀석, 사내 녀석들이 또박또박 예쁜 글씨로 쓴 편지는 또 뭐라니.

시골에 하나 있던 팬시점에서 용돈을 아껴 샀다며 어느 녀석이 선물한 귀걸이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공주님이나 쓸법한 왕관 모양의 앙증맞은, 선생님이 귀를 뚫었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건넨 귀걸이 한 쌍. 여학생이 없던 남고에서 아가씨 선생님이 예뻐 보였을거나? 그 팬시 귀걸이는 25년이 지난 지금도 반짝거리고 있다. 이사를 몇 번씩 하고 학교를 몇 번을 옮기는 동안에도 그 무심한 녀석의 귀걸이 한 쌍을 버릴 수가 없었다. 봉투에 담아 고이고이 모셔놓았다. 내가 뭐 그리 예쁘다고, 스승이라고 선물을 줬다니.

지난 스승의 날. 책상 위에는 외로운 카네이션 한 송이가 놓여있었다. 내돈내산이다. 내가 스승이 될 자격이 있는지 자문했다. 학생들에게 자주 내뱉었던 그 무수한 말, 참되거라 바르거라. 나는 잘 실천하고 있는지 반문한다. 한없이 부끄럽다. 작아진다. 말을 줄일 걸 그랬다. 젊어서 그랬다. 미안하다. 그리하여 올해 스승의 날은 부처님오신날과 겹친 휴일이라는 게 오히려 마음 편했다.

보고 싶은 제자들. 우리의 학교, 교실 곳곳에 너와 나의 찬란한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 함께한 사회 수업, 함께했던 그 시간은 이렇게 아로새겨져 잊히지 않고 추억된다. 교권을, 학생 인권을 서로 밀어내듯 말하지 않아도 된다. 녀석이 수줍게 건네 주었던 크라운 귀걸이는 한 쌍으로 남아 마냥 반짝일 것이므로.

/황선영 의령교육청 장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