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죄·배상 없는 일본, 한일 관계 지속에 “한국 정부 더 노력해야”
12년 만에 열린 한일 정상회담을 두고 일본은 관계 정상화를 통한 안보·경제 협력에 기대감을 드러냈지만, 한국인 강제징용 문제 등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배상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일본은 17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한국 초청,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혜택을 주는 백색국가) 복구 등도 협의 중이라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일본 매체들도 앞으로의 한일 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한국 정부의 노력’에 달렸다고 주장하며 한국의 이해와 양보를 대놓고 요구하는 논조를 펼쳤다. 산케이는 “강제징용은 없었다”며 역사 인식에서 퇴행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사죄 없는 일본, 한국에 ‘더 많은 이해와 양보’ 기대
일본 지지통신에 따르면, 일본 정부 대변인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17일 오전 정례 기자회견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 및 한일 정상회담은 한일 관계 정상회의 큰 걸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앞으로도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우호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한일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오는 5월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윤 대통령을 초청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초청국에 대해서는 현재 검토 중이며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교도통신은 전날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윤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G7 정상회의에 윤 대통령을 초청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고 보도했지만, 일본 정부는 협의 중이라는 입장을 되풀이하며 초청 여부를 확정하지 않은 것이다.
지난 6일 한국인 강제징용 문제 배상안과 관련해 한국 정부가 사실상 일본에 면죄부를 주는 결정을 했음에도 일본은 지속적인 한국 정부의 노력을 요구하며 ‘더 많은 양보’를 바라고 있다. 니시무라 야스토시 일본 경제산업상은 이날 각의 후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원상회복과 관련해 협의중이라며 “(한국의) 자세를 신중하게 지켜보겠다”고 했다.
앞서 일본 정부는 2019년 7월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를 단행했고, 그해 8월에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이 조치들은 사실상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해석됐지만 한국 정부가 한 발 물러선 해결책을 내놓은 뒤에도 일본은 즉각적인 보복 조치 해제를 하지 않다가 정상회담 직전 반도체 수출 규제 완화를 발표했다.
위안부 소녀상, 원전 오염수 방류 등 양국 간 갈등 요소에서 한국의 일방적인 양보를 요구하는 분위기는 더 짙어졌다. 일본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의 이즈미 겐타 대표는 이날 윤 대통령과 만나 한일 갈등 현안인 ‘레이더-초계기’ 문제와 ‘위안부 소녀상’ 건립 문제를 언급했다고 밝혔다. 입헌민주당은 그동안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요구해왔다. 윤 대통령은 이에 대해 구체적 답변은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NHK는 이날 일본의 초당파 의원 모임인 일한의원연맹은 윤 대통령을 만나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오염수 해양 방류와 관련해 이해를 구했다고 보도했다. 윤 대통령은 이에 대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의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견해를 중시하겠다는 생각을 나타냈다고 NHK는 전했다.
한국 여당 간부가 한일 정상회담에 앞서 비밀리 일본을 방문해 일본 집권당 유력 정치인들에게 기시다 총리가 일제강점기 역사와 관련된 ‘사과’와 ‘반성’을 언급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지지통신은 윤 대통령과 가까운 여당 간부가 지난주 일본을 찾아 집권 자민당 유력자들과 접촉하면서 강제징용 해법에 대한 한국 여론을 전하면서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총리의 입에서 직접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는 과거 한일 공동선언 문구를 언급해 달라고 주문했다고 이날 보도했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는 한국 정부가 지난 6일 징용 해법을 발표했을 때 “1998년 한일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고 말했을 뿐 ‘사과’와 ‘반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전날 한일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도 “일본 정부는 1998년 10월에 발표한 한일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라고 기존 표현을 반복했다.
일본 언론 “관계 개선 낙관 금물...한국 정부, 여론 설득 노력해야”
일본 언론들은 한일 관계 정상화를 반겼지만, 한국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이 앞으로의 한일 관계를 좌우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요미우리, 아사히 등 일본 주요 신문들은 한일 관계 정상화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며 “일본을 둘러싼 불안한 안보 환경으로 인해 한일 관계의 중요성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양국 정상이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취하와 수출규제 해제, 지소미아(GSOMIA·군사정보보호협정) 정상화, 경제안보대화 출범 등 성과를 내기도 했으나 징용 해법에 대한 한국 내 부정적 여론 등 지속적인 관계 개선의 걸림돌도 있다고 짚었다. 요미우리는 “한국에서는 일본 피고 기업 대신 자국 정부 산하 재단이 판결금을 지급하는 해결책을 일본에 양보한 것이라고 보는 평가가 강하다”며 “이번 회담의 성과가 한국 내 반대 여론을 진정시킬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고 전했다.
진보 성향인 아사히조차 “관계 개선 낙관은 금물”이라며 “한국 정부가 한국 내 여론을 강력하게 계속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재단 기부에 피고 기업을 포함한 일본 기업의 유연한 대응을 바란다”고 전했다.
산케이신문은 “한국에서 반일 분위기가 높아지거나 정권 교체가 일어나면 또다시 역사 문제가 불거질 것”이라며 한일관계가 다시 얼어붙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산케이는 “징용 문제의 불가역적인 해결책을 찾아낼 수 없었다”며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구상권 포기에 대한 확약을 받지 않고 관계 개선을 우선시한 형국”이라고 보도했다.
산케이는 별도의 기사를 통해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 조선소에서 받은 급여봉투를 발견했다며 ‘강제징용’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산케이는 1917년부터 1920년까지 효고현의 조선소에서 일했던 경상남도 출신 조선인이 받았던 급여봉투를 그의 자녀가 발견해 도쿄에 있는 산업유산정보센터에 기증했다며 “조선인 노동자도 적절한 급여를 받고 일했다”고 주장했다.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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