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그냥 후배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열한 가지 결혼 이야기 ⑨]

나경희 기자 2024. 10. 25.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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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부부 열한 쌍이 각자 구청에 혼인신고서를 내고 법원에 불수리 처분에 대한 불복 신청을 했다. 동성결혼 법제화를 위한 이른바 ‘혼인평등소송’이 시작됐다. 소송에 참여하는 열한 쌍 부부의 ‘사랑과 결혼’ 이야기를 전한다.

‘주여! 동성 커플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지옥을 맛보게 하소서.’ 2013년 9월7일 동성 부부인 김조광수·김승환씨가 결혼식을 올리자 ‘한국기혼자협회’에서 재치 있는 문구의 현수막을 내걸었다. 하지만 하늘은 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다. 이들의 혼인신고서는 수리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2014년 5월21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 혼인신고 불수리 불복 신청을 했으나 기각됐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2024년 10월10일, 혼인신고 불수리증을 받은 동성 부부 열한 쌍, 총 스물두 명이 모여 법원에 불복 신청을 하겠다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번 소송에서 승소하면, 앞으로 한국에서도 동성 부부의 법적 지위가 인정받게 된다. 2024년 10월 현재, 동성결혼이 가능한 나라는 전 세계 39개국이다.

〈시사IN〉은 혼인평등소송에 참여하는 원고 열한 쌍 부부의 집을 방문했다. 나이도 직업도 사는 모습도 모두 다른 이들의 집안 풍경은 다채로우면서도 비슷했다. 서로를 돌보고, 일상을 나누고, 때로 다투기도 하지만 결국은 마주 보고 웃고 마는, 지극히 평범한 부부의 모습이었다. 세상의 모든 커플들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들이어서, 이게 기사가 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박지아씨(왼쪽)와 손문숙씨는 둘이 있을 때 가장 나다우면서 우리답다고 느낀다. ⓒ시사IN 신선영

서울 지하철 충정로역 환승 구간은 길고 길었다. 숨이 턱밑까지 차도록 달리면서도 스스로 의아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뛰지?” 휴대전화 데이터를 다 써서 만나기로 한 식당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길 가던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지도 사진을 확대하고 축소하기를 여러 번, 마침내 좁은 골목길 사이에 있는 참치집에 들어섰을 때는 밤 1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박지아씨(31)는 자신의 마음을 확신했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손문숙씨(48)도 마찬가지였다. 막차가 끊기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집에 돌아가던 사람을 굳이 돌려세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은 문숙이 일하던 여성인권단체였다. 문숙은 활동가, 지아는 프로그램 참여자였다. 문숙은 다른 이를 진심으로 배려하는 사람을 좋아했고 지아는 빛나는 사람을 좋아했다. 서로의 모습이 그랬다. 2017년 6월29일, 만난 지 두 달 만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같이 살기 시작했다.

옷을 잘 사지 않는 문숙씨를 위해 지아씨는 자주 옷을 선물한다. 두 사람의 옷장. ⓒ시사IN 신선영

처음에 문숙은 어머니에게 “같은 학교 같은 과 후배”라고 지아를 소개했다.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기도 했지만 온전한 ‘진실’은 아니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맞은 첫 명절에 문숙은 식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는 내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좋아, 아니면 듣고 싶은 이야기까지만 해주는 게 좋아?” 엄마는 솔직하게 이야기해달라고 말했다. “엄마, 지아는 그냥 후배가 아니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같이 살고 있는 거야.”

이제는 명절에도 함께 가서 인사를 드리고 온다. “지난 추석에도 같이 갔는데, 남동생 아내가 지아보다 언니거든요. 그래서 지아가 ‘언니’라고 불렀는데 엄마가 슥 오더니 ‘어허, 손아랫사람인데 언니라고 하면 안 되지’ 하시는 거예요. 구세대적 마음과 신세대적 마음이 그렇게 충돌하더라고요.” 문숙이 깔깔 웃었다.

서울 마포구 집에서 손문숙씨(왼쪽)와 박지아씨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2022년 6월, 두 사람은 연인이 된 지 5주년을 맞아 혼인신고서를 냈다. 각자 회사에서 경조사 휴가를 받아 발리로 신혼여행도 다녀왔다. 이전까지 3년 반이 가장 긴 연애 기간이었던 문숙은 지아를 만나고 ‘영원한 관계’에 회의적이던 마음이 바뀌었다. “이제는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친구하고는 오래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 그래도 될 거 같다는 생각. 추상적인 단어가 구체적으로 이해되거든요. ‘아 이런 게 친밀함이라는 거구나’ 하고요. 둘이 있을 때 가장 나다우면서도 우리다워요.”

변호사인 박지아씨는 서울지방변호사회 홈페이지에 경조사 알림 신청을 하는 것이 목표다. ⓒ시사IN 신선영

결혼을 해도, 결혼을 하지 않아도 ‘온전한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충만한 둘’인 관계가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 선택지가 애초에 있느냐 없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이미 신혼여행까지 다녀온 두 사람이 ‘새삼’ 혼인평등소송에 참여하는 이유다. 변호사인 지아는 여기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또 하나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둘이 법적으로 부부가 되면 서울지방변호사회 홈페이지에 경조사 알림을 신청하고 싶어요. 그게 정말 부럽더라고요.”

나경희 기자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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