씹어야 제맛 ‘풀로만 소고기’ 서울 레스토랑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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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희의 맛따라기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꿈을 이루는 데 꼬박 13년이 걸렸다. 국제무대를 누비던 목초 거상(巨商)이 시골로 내려가 2011년 암송아지 12마리로 목축업을 시작했다. 몇 가지 원칙과 꿈이 있었다. 소를 자연의 이치에 맞게 키운다. 목장 이름이 들어간 음식을 레스토랑 메뉴에 올린다. 이 꿈만 놓고 보면 9할은 이뤄졌다. 초식동물인 소에게 고급 목초만 먹이고 최고의 동물복지 환경에서 키웠다. 올 여름 그 고기가 서울 레스토랑 두 곳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난달 31일 서울 방배동의 아담한 이탈리아 레스토랑 ‘시스트로’에서 꿈이 익어가는 행사가 있었다. 그 목장 고기로 풀코스 식사를 하는 이벤트가 점심, 저녁 두 차례 열렸다. 22석의 좌석은 온라인 예약을 열자마자 금세 매진됐다. 손님은 미식이 취미인 유력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소리 없이 영향력 강한 입맛 고수들이다.
6코스 중 소고기 요리 세 가지가 나왔다. ▶피에몬테식 케이퍼 참치소스를 올린 홍두깨살 로스트비프 ▶로마식 소 내장 요리 트리빠 ▶다진 표고와 키조개 관자를 구워 곁들인 채끝 스테이크와 새우젓을 활용한 한국식 치미추리. 이날 손님들 반응을 보고 이 요리 중 하나를 9월부터 시스트로 정규 메뉴로 채택했다. 소의 양을 이용한 토마토 스튜인 로마식 트리빠(Trippa alla Romana)다.
▶재료: 손질한 양(소의 제1 위)과 벌집양(제2 위) 1㎏, 푹 삶은 붉은강낭콩 250g, 갈아서 쓸 토마토 500g, 토마토 페이스트 100g, 사방 1㎝ 양파·샐러리와 0.5㎝ 당근 각 100g, 0.5㎝ 두께 마늘편 50g, 마른 고추 3g.
▶조리: ①양과 벌집양은 손질한 걸 사서 깨끗이 씻는다. ②향신채소와 소금을 넣고 양을 1시간 정도 삶아 식힌 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③올리브 오일에 채소(당근·샐러리·마늘)를 볶은 다음 양과 벌집양을 넣고 함께 살짝 볶는다. ④토마토 간 것과 페이스트, 강낭콩, 건고추를 넣고 약한 불로 1시간 정도 졸인다. ⑤소금·후추로 간을 맞추고 필요하면 물로 농도를 조절한 다음 풍미, 양의 질감을 확인한 후 한소끔 끓여 완성한다. ⑥따뜻하게 데운 토기나 도기 그릇에 담고 잘게 썬 고수를 작은 그릇에 담아 함께 상에 낸다. 고수를 곁들이는 건 이곳 주방의 응용이다.
이 음식은 요리사들이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하는 요리 중 하나라고 한다. 조심해도 만에 하나 냄새가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스트로 주방도 처음엔 굳이 그걸 할 이유가 있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1차 손질한 내장 원물을 받아보니 일반 소와 달리 상태가 좋았다. 한 번 더 손질하고 헹구니 깨끗했다. 완성된 음식은 약간 새금하고 부드러운 토마토 양념이 양과 잘 어우러진다. 오래 익혀 부드럽게 된 양깃머리 근육질은 쫄깃하면서 가닥이 올올이 풀어지는 듯한 질감이다. 잡내가 전혀 없고 씹을수록 고기 맛이 우러난다. 사이사이 씹히는 강낭콩도 미각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묘미가 있다. 대개는 구이, 가끔은 탕으로 먹는 한식 양 요리와는 전혀 다른 맛이다. 취재할 때 옆자리에서 식사하던 30~40대 여성 손님들은 “이게 그거 요리라고? 맛있다, 맛있네”라며 놀라워했다. 처음 닷새 만에 10접시가 나갔고, 앞으로 밀키트로도 판매할 예정이다.
스테이크는 4주 습식 숙성한 설도나 보섭살을 1인 100g(조리 전 무게)씩 팬에 구워서 낸다. 원육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누룩소금만 발라 하룻밤 재우고 다른 양념은 하지 않는다. 목장을 두루 살피고 여러 부위 고기를 구워 먹어본 뒤 감동한 셰프가 “좋은 고기에 양념을 강하게 하면 안 된다”면서 확정한 레시피다. 하루 평균 7월에 6~7개, 8월에는 8개가 나갔다. 목표는 하루 15개다. 아주 맛있다는 사람도 없지만, 불평하는 손님도 아직은 없다. 풀코스 10만9000원 가격에도 큰 저항감 없이 빠르고 평화롭게 자리 잡았다.
“좋은 고기는 양념 강하게 하면 안된다”
“소비자는 공동생산자”라는 철학을 가진 이 목장 소고기는 온라인 직거래 판매만 해왔다. 그런데 이번 레스토랑 상륙을 계기로 ‘꽃밥’에서 운영하는 북촌 그로서란트에서 300g 단위로 소매 예약판매도 시작했다. 목장 규모상 한 달에 두 마리만 도축하기 때문에 고기를 무시로 살 수는 없다.
올해 고희인 조영현 목장주의 ‘레스토랑 상륙작전’은 오랜 전투 끝에 완수를 눈앞에 두고 있다. 미완의 1할은 메뉴에 목장 이름 다섯 글자를 새기는 것이다. 예컨대 ‘풀로만목장의 풀로만 소고기구이 코스’ 같은 이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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