씹어야 제맛 ‘풀로만 소고기’ 서울 레스토랑에 오르다

2024. 9. 21. 00:1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택희의 맛따라기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꿈을 이루는 데 꼬박 13년이 걸렸다. 국제무대를 누비던 목초 거상(巨商)이 시골로 내려가 2011년 암송아지 12마리로 목축업을 시작했다. 몇 가지 원칙과 꿈이 있었다. 소를 자연의 이치에 맞게 키운다. 목장 이름이 들어간 음식을 레스토랑 메뉴에 올린다. 이 꿈만 놓고 보면 9할은 이뤄졌다. 초식동물인 소에게 고급 목초만 먹이고 최고의 동물복지 환경에서 키웠다. 올 여름 그 고기가 서울 레스토랑 두 곳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난달 31일 서울 방배동의 아담한 이탈리아 레스토랑 ‘시스트로’에서 꿈이 익어가는 행사가 있었다. 그 목장 고기로 풀코스 식사를 하는 이벤트가 점심, 저녁 두 차례 열렸다. 22석의 좌석은 온라인 예약을 열자마자 금세 매진됐다. 손님은 미식이 취미인 유력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소리 없이 영향력 강한 입맛 고수들이다.

6코스 중 소고기 요리 세 가지가 나왔다. ▶피에몬테식 케이퍼 참치소스를 올린 홍두깨살 로스트비프 ▶로마식 소 내장 요리 트리빠 ▶다진 표고와 키조개 관자를 구워 곁들인 채끝 스테이크와 새우젓을 활용한 한국식 치미추리. 이날 손님들 반응을 보고 이 요리 중 하나를 9월부터 시스트로 정규 메뉴로 채택했다. 소의 양을 이용한 토마토 스튜인 로마식 트리빠(Trippa alla Romana)다.

양깃머리가 올올이 풀어지는 듯한 질감
소 양과 벌집양으로 조리한 ‘시스트로’의 ‘풀로만 트리빠’. [사진 이택희]
트리빠는 내장을 말한다. 이 음식은 켄터키 치킨처럼 예전 로마에서 귀족들이 먹지 않는 소 내장 부위로 가난한 하층민들이 해 먹던 요리에서 유래했다. 지금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즐기는 일상식이다. 시스트로 메뉴에 올리는 이름은 ‘풀로만 트리빠’로 지었다. 풀만 먹고 자란 소 양으로 요리했기 때문이다. 먹어보니 맛도 좋고, 보기도 고급스러울 뿐 아니라 집에서 요리해 먹기도 만만해 보여서 조리법부터 물어봤다. 가정에서 보양을 겸한 별식이나 손님맞이 요리로 좋을 듯한 이 음식의 재료와 조리 과정은 다음과 같다.

▶재료: 손질한 양(소의 제1 위)과 벌집양(제2 위) 1㎏, 푹 삶은 붉은강낭콩 250g, 갈아서 쓸 토마토 500g, 토마토 페이스트 100g, 사방 1㎝ 양파·샐러리와 0.5㎝ 당근 각 100g, 0.5㎝ 두께 마늘편 50g, 마른 고추 3g.

▶조리: ①양과 벌집양은 손질한 걸 사서 깨끗이 씻는다. ②향신채소와 소금을 넣고 양을 1시간 정도 삶아 식힌 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③올리브 오일에 채소(당근·샐러리·마늘)를 볶은 다음 양과 벌집양을 넣고 함께 살짝 볶는다. ④토마토 간 것과 페이스트, 강낭콩, 건고추를 넣고 약한 불로 1시간 정도 졸인다. ⑤소금·후추로 간을 맞추고 필요하면 물로 농도를 조절한 다음 풍미, 양의 질감을 확인한 후 한소끔 끓여 완성한다. ⑥따뜻하게 데운 토기나 도기 그릇에 담고 잘게 썬 고수를 작은 그릇에 담아 함께 상에 낸다. 고수를 곁들이는 건 이곳 주방의 응용이다.

이 음식은 요리사들이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하는 요리 중 하나라고 한다. 조심해도 만에 하나 냄새가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스트로 주방도 처음엔 굳이 그걸 할 이유가 있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1차 손질한 내장 원물을 받아보니 일반 소와 달리 상태가 좋았다. 한 번 더 손질하고 헹구니 깨끗했다. 완성된 음식은 약간 새금하고 부드러운 토마토 양념이 양과 잘 어우러진다. 오래 익혀 부드럽게 된 양깃머리 근육질은 쫄깃하면서 가닥이 올올이 풀어지는 듯한 질감이다. 잡내가 전혀 없고 씹을수록 고기 맛이 우러난다. 사이사이 씹히는 강낭콩도 미각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묘미가 있다. 대개는 구이, 가끔은 탕으로 먹는 한식 양 요리와는 전혀 다른 맛이다. 취재할 때 옆자리에서 식사하던 30~40대 여성 손님들은 “이게 그거 요리라고? 맛있다, 맛있네”라며 놀라워했다. 처음 닷새 만에 10접시가 나갔고, 앞으로 밀키트로도 판매할 예정이다.

인사동 ‘꽃, 밥에 피다’의 풀로만목장 소고기 스테이크. [사진 이택희]
이보다 앞서 서울의 대표적 친환경 한식당인 인사동 ‘꽃, 밥에 피다’에서는 7월 20일부터 ‘오직 풀로만 키운 한우구이 코스’를 내놨다. 제철 채소로 차리는 8가지 비건 요리 코스에 이 목장의 소고기 스테이크를 더한 정찬이다. 메뉴판에 이렇게 적었다. “고기는 씹어야 제 맛. 입안에서 살살 녹는 부드럽고 기름진 고기를 원하신다면 풀로만 한우 코스는 주문하지 말아 주세요.”

스테이크는 4주 습식 숙성한 설도나 보섭살을 1인 100g(조리 전 무게)씩 팬에 구워서 낸다. 원육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누룩소금만 발라 하룻밤 재우고 다른 양념은 하지 않는다. 목장을 두루 살피고 여러 부위 고기를 구워 먹어본 뒤 감동한 셰프가 “좋은 고기에 양념을 강하게 하면 안 된다”면서 확정한 레시피다. 하루 평균 7월에 6~7개, 8월에는 8개가 나갔다. 목표는 하루 15개다. 아주 맛있다는 사람도 없지만, 불평하는 손님도 아직은 없다. 풀코스 10만9000원 가격에도 큰 저항감 없이 빠르고 평화롭게 자리 잡았다.

“좋은 고기는 양념 강하게 하면 안된다”
“소비자는 공동생산자”라는 철학을 가진 이 목장 소고기는 온라인 직거래 판매만 해왔다. 그런데 이번 레스토랑 상륙을 계기로 ‘꽃밥’에서 운영하는 북촌 그로서란트에서 300g 단위로 소매 예약판매도 시작했다. 목장 규모상 한 달에 두 마리만 도축하기 때문에 고기를 무시로 살 수는 없다.

올해 고희인 조영현 목장주의 ‘레스토랑 상륙작전’은 오랜 전투 끝에 완수를 눈앞에 두고 있다. 미완의 1할은 메뉴에 목장 이름 다섯 글자를 새기는 것이다. 예컨대 ‘풀로만목장의 풀로만 소고기구이 코스’ 같은 이름 말이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 중앙일보 기자. 늘 열심히 먹고 마시고 여행한다. 한국 음식문화 동향 관찰이 관심사다. 2018년 신문사 퇴직 후 한동안 자유인으로 지내다가 현재는 경희대 특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