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소주 '진로'를 박스씩 쓸어가요"···필리핀 대형마트에서 벌어진 일[현장+]

22일 필리핀 대형 창고형 마트 'S&R 멤버십 쇼핑'의 주류 코너에 하이트진로의 '진로' 소주가 4~6개입 박스 단위로 진열돼 있다. /사진=이유리 기자

지난 22일 필리핀 마닐라의 '코스트코'로 불리는 대형 창고형 마트 S&R 멤버십 쇼핑.

커다란 카트를 밀던 20대 커플이 하이트진로의 소주 브랜드 ‘진로(JINRO)’ 진열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남성은 도수 높은 일반 소주 4개 묶음 두 세트를, 여성은 복숭아맛 과일소주 한 세트를 집어 들었다. 라면, 과자, 빵, 깔라만시 음료까지. 카트 안은 소주와 어울릴 주말 장보기 품목으로 가득했다.

제프 디말란타(28)씨는 “사이다에 진로를 섞어 마시는 걸 제일 좋아한다”며 “일주일 내내 마시고 많을 땐 하루에 3병까지도 마신다”고 웃었다. 옆에 있던 여자친구 나이자 감보아(25)씨는 진로 복숭아에이슬을 들어 보이며 “달콤해서 술 같지 않다. 그래서 더 자주 손이 간다”고 말했다.

S&R에서 만난 20대 커플의 쇼핑 카트. 진로 일반 소주 2묶음(총 8병)과 복숭아에이슬 1세트(4병), 그리고 함께 섞어 마실 야쿠르트와 탄산음료 등이 빼곡히 담겨 있다. /사진=이유리 기자

한국에서 '참이슬'로 잘 알려진 하이트진로의 소주는 해외 시장에서는 '진로'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필리핀에서는 대형마트 S&R과 퓨어골드, 편의점 세븐일레븐 등 주요 유통 채널을 빠르게 확보하며 소비자와의 접점을 넓혀가고 있다. 현지에서는 한두병씩 구매하는 이들도 많지만 4~6병의 박스 단위로 '쓸어 담듯' 구매하는 소비 형태도 일반화되고 있다.

S&R에서 10년 넘게 소주 판매를 담당해온 수석 구매 담당자 니코(35)씨는 “필리핀은 가족 단위 소비가 많아 금요일이나 주말을 앞두고 진로 소주를 박스 단위로 구매해 집에서 함께 마시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필리핀 최대 슈퍼마켓 체인 '퓨어골드'의 주류 매대에서도 진로의 존재감은 단연 눈에 띄었다. 일반 소주부터 과일소주, 수출 전용 고도수 제품, 광고 모델이 인쇄된 기획 세트까지. 하이트진로 제품이 진열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K드라마가 열어준 진로의 문

21일 필리핀 최대 슈퍼마켓 체인 ‘퓨어골드’ 내 한국 소주 코너. 전체 매대 중 상당 부분이 하이트진로의 일반 소주와 다양한 과일 소주 제품으로 채워져 있다. /사진=이유리 기자

필리핀에서 진로 소주가 빠르게 퍼져나간 출발점은 단연 한국 드라마였다. '궁', '역도요정 김복주', '힘쎈여자 도봉순' 등에서 배우들이 소주병을 들고 건배하는 장면은 필리핀 시청자들에게 인상 깊게 각인됐다. 특히 팬데믹 기간 동안 K드라마 시청이 일상화되면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소주로 이어졌다.

현지에서 만난 마트 고객들은 모두 "K드라마를 통해 소주를 처음 알게 됐다"고 답했다. 퓨어골드에서 만난 졸로(23)씨는 “2018년부터 한국 드라마와 음식을 즐기기 시작했는데 생라면에 소주를 곁들이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 실제로도 따라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이린(23)씨도 “4년 전쯤 드라마에서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는 장면을 봤는데, 실제로 소주 맛이 괜찮아서 계속 마시고 있다”고 말했다.

유통 현장에서도 이 같은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퓨어골드와 세븐일레븐에서 4년째 상품기획 및 영업(MD)을 맡고 있는 마리 필 레예스(42)씨는 “진로의 주 소비층은 21~30세의 젊은 세대이며 대부분 K드라마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다”며 “매출 비중은 딸기에이슬이 약 30%, 참이슬 후레쉬가 55%, 기타 과일 소주가 약 15%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현지 문화에 녹아든 '진로'

21일 필리핀 퓨어골드 매장에서 한 현지 소비자가 진로 소주 제품을 들고 있다. /사진 제공=하이트진로

'진로'의 확산은 단순한 콘텐츠 노출을 넘어 필리핀 특유의 소비 문화와 맞물리며 더욱 가속화됐다. 대표적인 것이 '섞어 마시는 문화'다.

필리핀의 2030 사이에선 소주를 맥주, 요구르트, 모구모구, 깔라만시 등과 조합해 마시는 방식이 유행처럼 자리잡았다. 필리핀은 원래 진(Gin)에 오렌지 주스를 섞어 마시는 전통이 있어 주류를 혼합하는 문화에 익숙하다.

마리 씨는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를 중심으로 소주를 야쿠르트나 맥주를 섞어 마시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어 과일소주 중심이었던 소비가 도수가 높은 일반 소주로 확대되고 있다"고 밝혔다.

진로는 이제 달콤한 과일소주를 넘어 ‘깔끔한 맛’의 일반 소주를 찾는 현지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사이린 씨는 “진로 후레시를 특히 선호하는 이유는 필리핀 전통 증류주보다 도수가 낮고 깔끔해서 숙취가 덜하기 때문"이라며 "깔라만시나 맥주에 섞어 마시기도 하지만 단독으로도 즐긴다”고 말했다.

마닐라=이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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