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혁신은 왜 멈췄나
‘도전’보다 ‘안정’에 방점 찍고 일하는 문화 퍼져
(시사저널=엄민우 시사저널e. 기자)
대한민국 대표 기업 삼성전자가 흔들리고 있다. 한때 '10만 전자'를 목표로 삼던 주가는 외인들이 우수수 빠져나가며 '5만 전자'까지 떨어졌다. 미래 먹거리로 키우던 부문은 좀처럼 성과를 못 내고 있다. 그사이 잘나가던 '현재 먹거리' 부문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일각에선 HBM(고대역폭메모리) 경쟁력에 삼성전자의 미래가 달렸다고도 이야기하지만, 이는 '겉핥기식' 분석이란 게 삼성전자 안팎의 이야기다. 조직문화 등 회사가 안고 있는 근본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 같은 문제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그룹 경영과 관련해 공식 석상에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 들어 취재진 질문에 한마디씩 던지기도 하지만 그룹 경영과 관련한 구체적 목표나 비전에 대해선 말을 아낀다. 쉽게 말해 엔비디아의 젠슨 황,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등과 정반대 스타일이다. 그런 그가 2019년 이례적으로 공언했던 것이 바로 "2030년 시스템반도체 1등 하겠다"는 메시지였다. 모처럼 나온 이 회장의 공식적 목표치였기에 더욱 무게감이 느껴졌고 업계의 이목이 쏠렸다.
이후 이 회장의 메시지를 실현하기 위한 그룹 차원의 노력이 뒤따랐다. 메모리에 집중됐던 물적·인적 자원이 비메모리 부문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주로 메모리에 포진하던 '에이스'들이 투입되고 공격적인 투자도 이뤄졌다.
그런데 5년이 지난 지금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공들이던 파운드리 부문에서 세계 1위 TSMC와의 격차는 오히려 더 벌어졌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 2분기 TSMC의 시장 점유율은 62.3%, 삼성전자는 11.5%다. 게다가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3분기 5000억원 적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는 투자대로 하고 나온 결과이기에 삼성전자로선 더욱 뼈아픈 부분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파운드리 사업은 생산자 주도가 아닌 '고객 맞춤형' 사업인데 메모리식으로 공급자 중심으로 접근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비메모리 부문의 비즈니스는 단순히 기술력뿐 아니라 각 고객사의 콘셉트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반도체 오디세이》의 저자이자 반도체 시장 전문가로 꼽히는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센터장은 10월10일 보고서를 통해 삼성전자의 현 상황을 이렇게 진단했다. "가혹하게 얘기하자면 삼성 비메모리 사업부의 상대적 성과는 2011년을 피크로 계속 뒷걸음질한 셈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기간 동안 무려 90조원 이상이 투자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렇게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투자 효율성에도 비메모리 사업에 대한 전략적 수정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삼성의 완벽주의가 발목을 잡았다"
비메모리 부문이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사이, 원래 잘하던 메모리 부문도 흔들리고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HBM 개발 및 납품에서 SK하이닉스에 선수(先手)를 내준 것이다. 삼성전자보다 발 빠르게 HBM 개발에 나선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에 제품을 납품하며 시장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 있다. 메모리의 절대적 강자였던 삼성전자가 한순간에 도전자 처지가 된 것이다. 100점만 맞던 과목에 투입하던 노력을 다른 과목에 쏟았는데 두 과목 모두 성적이 불만족스러운 격이다.
반도체와 더불어 삼성전자의 '수익 쌍끌이' 역할을 하는 스마트폰 부문도 상황이 좋지 않다. 갤럭시S24는 그나마 선전했지만 플립6 등 폴더블폰의 판매 저조로 올 3분기 MX부문 영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20%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회심작으로 내놨던 폴더블폰 판매가 저조한 데다 중국 업체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국내에서 정치권 등에 시달리는 삼성전자와 달리 중국 업체들은 공격적인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급성장하고 있다.
삼성 위기의 원인과 관련 조직 안팎의 목소리를 종합하면 변화보다는 안주하려는 문화, 즉 실패를 두려워하는 문화가 문제점으로 거론된다. '윗선'은 안전한 단기 실적을 강조하고 아랫 직급엔 모험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퍼져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같은 현실을 삼성전자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영현 부회장(DS부문장)은 10월8일 메시지를 통해 "가진 것을 지키려는 수성(守成) 마인드가 아닌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도전정신으로 재무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도전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실패가 용인되는 조직문화인데, 이 부분부터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글로벌 컨설팅 기업 임원은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는 수많은 실패를 거듭했지만 문책성 인사를 남발하는 대신 계속 연구개발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줬고, 그 결과 결국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며 "혁신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분위기에선 나올 수 없는데 삼성전자는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스타일만 봐도 '이미 완성된 곳'을 찾아 '안전제일' 식으로 하려는 등 실패와 그에 대한 책임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비친다"고 전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삼성전자와 비교되는 곳이 현대자동차그룹이다. 현대차는 현재 기존 사업인 완성차뿐 아니라 모빌리티 사업 중 자율주행, 로봇, AAM(미래항공모빌리티) 등 당장 수익를 내기 어려운 부문에 대해서도 적극 투자 및 연구개발을 끊김없이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는 성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분야의 실패를 용인해 주고 내부 반발에 꺾이지 않게끔 밀어주는 정의선 회장의 뒷바라지가 있다는 전언이다.
혁신보다 안정을 추구하게 된 삼성전자의 현재 상황과 관련해선 여러 배경이 거론된다. 우선 지난 몇 년 새 특히 DS부문에서 고위급이 하나하나 챙기는 '현미경식 검증'이 이뤄졌고, 이 같은 '완벽주의' 때문에 제품 및 양산 테스트 등이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못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더불어 관료화된 조직문화가 혁신을 가로막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최근 몇 년 새 조직 내부에 관료 출신들을 고위급으로 적극 영입했다. 사외이사로도 관료 출신을 영입했는데 반도체 전문가들로 이사회를 채운 TSMC와 비교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만 하는 회사가 아니라는 점, 또 복잡해진 국제정세 속 통상 문제도 중요해지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더라도 좀 더 전문역량을 갖춘 인사들을 영입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런 가운데 벌써부터 삼성전자 연말 인사에 업계의 눈이 쏠리고 있다. 조직문화를 바꾸는 가장 즉각적이고 효과적 방법이 인사 및 조직개편이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외부 출신 등 파격적 새 인물들이 영입될지 여부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삼성전자가 잃어버린 혁신 DNA를 되찾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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