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엘팬알백] <53>1998년 LG 최초의 외국인선수 이야기

“LG 트윈스 지명하겠습니다. 투수 마이클 앤더슨!”
1997년 11월 14일(한국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세인트 피터스버그 힐튼호텔 위티드룸. 이곳에서는 KBO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선수를 지명하는 드래프트가 열렸다. LG는 여기서 우완 투수 마이클 앤더슨을 호명한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53번째 주제는 1998년 처음 도입된 외국인선수 제도와 LG의 역사적인 최초 외국인선수 이야기다.
LG는 2026년의 오스틴 딘과 요니 치리노스, 앤더스 톨허스트, 라클란 웰스를 포함해 지금까지 총 63명의 외국인선수와 인연을 맺었는데, 그 원조라 할 수 있는 1998년의 외국인선수 선발 스토리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KBO리그는 왜 외국인선수 제도를 도입했나
KBO는 1983년부터 재일교포 선수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외국인선수에 관한 한 출범 이후 사실상 쇄국 정책을 펼쳐왔다.
일찌감치 외국인선수에 문호를 개방한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는 차치하고, 대만프로야구도 1990년 출범 첫해부터 외국인선수 제도를 도입했다는 점에서 보면 KBO의 배타적 단일 민족주의가 얼마나 오랫동안 견고하게 작동해 왔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야구계에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친다.
1994년 1월 한양대 2학년 투수 박찬호가 LA 다저스와 계약한 뒤로 해외 진출 붐이 일어난 것. 박찬호 이후 같은 해 경희대 외야수 최경환과 중앙대 투수 최창양이 각각 보스턴 레드삭스,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계약하면서 아마추어 선수들의 미국행 러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여기에 박찬호와 92학번 동기인 고려대 4학년 조성민이 1995년 시즌 도중 일본프로야구 최고 명문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곧이어 92학번 중 최고 에이스로 활약해 온 연세대 임선동도 일본 다이에 호크스와 입단 계약에 합의했다.
KBO리그 지명을 받지 않은 박찬호 조성민과 달리 임선동은 1992년 LG가 이미 1차지명을 해놓은 선수. 그래서 더 큰 파장을 불러왔다. [엘펜알백] ㊼편에서 자세히 소개했듯이 LG와 임선동은 이 과정에서 지난한 법정소송까지 벌이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아마추어 선수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KBO 최고 투수인 선동열이 1995년 한일슈퍼게임이 끝난 뒤 해태 구단 측에 일본 진출을 요구하면서 KBO리그에 태풍을 몰고 왔다.
처음엔 반대 입장을 밝히던 해태 구단도 여론에 밀려 '국보투수' 선동열을 주니치 드래건스에 임대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당시에는 FA(프리에이전트) 제도도 없었고, 더더군다나 해외 진출 포스팅제도도 없었다. 하지만 선동열이 처음으로 그물을 찢고 바다를 건너간 이상 KBO 각 구단 슈퍼스타들의 해외 진출 요구가 물밀 듯 일어날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해외 진출의 빗장이 풀려버린 것이다.

각 구단들도 쇄국 정책만으로 KBO리그를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조만간 FA 제도도 도입할 수밖에 없고, 프로와 아마추어 핵심 선수들의 연이은 해외 유출에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적 흐름을 거스를 순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1994년 구단주 회의에서 타당성을 검토한 외국인선수 수입 문제를 본격적으로 도마 위에 올려놓게 된다.
1996년 7월 4일 KBO 제9대 총재로 취임한 홍재형 신임 총재는 “국내 프로야구의 질적인 개선과 수준을 높이기 위해 외국 용병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밝히면서 “올 시즌 중으로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우리 프로야구 시장 개방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덧붙였다.
프로야구를 재벌기업의 홍보수단으로만 보지 않고 미래 성장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팬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외국인선수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KBO는 이에 따라 ‘외국인선수 고용계획안’을 마련해 8월 19일 대전 유성 컨트리클럽에서 프로야구 단장들의 월례 모임에서 공개했다.
당초 이 고용계획안에는 ‘1997년부터 구단당 2명의 외국인선수를 고용할 수 있도록 추진한다’고 돼 있었다.
하지만 1997년부터 당장 외국인선수 제도를 시행하기엔 시간적으로 촉박한 상황. 관련 규정들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고 제대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1996년 11월 27일 서울 잠실 호텔롯데월드에서 열린 KBO 이사회(사장단 모임)에서 1998년부터 외국인선수 제도를 도입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외국인선수 드래프트…LG는 왜 8개 구단 중 7순위 지명이었을까?
요즘에는 각 구단이 자율적으로 외국인선수와 계약하지만, 1998년과 이듬해인 1999년에는 KBO리그행을 희망하는 외국인선수를 한 곳에 모아놓고 트라이아웃(공개 테스트)을 진행했다. 8개 구단이 모두 참관한 뒤 드래프트를 통해 외국인선수를 선발하기로 했다.
드래프트는 5라운드까지 진행하기로 했다. 다시 말해 구단별 지명 인원은 최대 5명. 하지만 계약은 지명선수 중 최대 2명으로 제한하고, 경기당 2명씩 출전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큰 관심사는 드래프트 순서. 당해 연도 성적을 토대로 한다면 페넌트레이스 막판에 고의적인 ‘져주기 게임’ 등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기에 이를 방지하고자 최근 3년간 페넌트레이스 승률을 합산하기로 했다.
홀수 라운드에서는 성적 역순으로, 짝수 라운드에서는 성적순으로 ‘ㄹ’자 형태로 지명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1라운드는 현대-한화-롯데-OB-쌍방울-삼성-LG-해태 순으로 정해졌다.
LG는 페넌트레이스를 기준으로 1995년 74승48패4무(승률 0.603)로 2위, 1996년 50승71패5무(승률 0.417)로 7위, 1997년 73승51패2무(승률 0.587)로 2위를 차지해 합산 결과 지명 순서가 7번째로 밀렸다.
해태는 1995년에는 4위에 그쳤지만, 1996년과 1997년 페넌트레이스 1위에 올라 성적이 가장 좋았다. 그래서 맨 뒤에 배치됐다.
외국인선수 몸값은 최대 12만 달러(당시 환율로 약 1억1000만 원)로 제한했다. 연봉을 비롯해 주거비와 의료비, 후생복지비용을 모두 포함한 금액이다.
12만 달러가 기준이 된 것은 당시 국내 최고 연봉 선수인 LG 김용수의 연봉이 1억2000만 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넘지 않도록 상한선을 둔 것이었다.
애초에는 연봉만 최대 12만 달러로 정하고 부대비용은 별도로 책정하기로 했지만, 8개 구단은 비용 절감 차원에서 연봉과 부대비용을 합쳐서 12만 달러로 하향 조정했다.

◆플로리다에서 펼쳐진 최초 트라이아웃
대상 선수 공급은 미국 스포츠 마케팅 회사인 CSMG를 통해 이뤄졌다. CSMG는 마이너리그 경력 6년 이상의 선수를 대상으로 접수한 200여 명 선수 중 1차적으로 100여 명으로 추린 뒤 에이전트들에게 트라이아웃에 참가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총 55명이 최종 테스트에 응했다.
트라이아웃은 미국 플로리다주 세인트피터스버그에서 열렸다. KBO 각 구단 단장과 운영팀장, 감독, 코치, 스카우트 등 관계자들이 오디션에 참가한 선수들의 훈련 모습과 5차례 평가전을 지켜보면서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였다.

당초 최대어로 꼽힌 선수는 메이저리그 출신의 타이 게이니. 왼손 거포로 지명 1순위인 현대 유니콘스가 뽑아갈 가장 유력한 후보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게이니가 지명을 이틀 앞둔 12일 개인사정을 이유로 캠프를 이탈한 뒤 멕시칸리그로 떠나버리면서 드래프트 전체 판도가 요동쳤다.
그러자 1996년 LA 다저스에서 박찬호와 한솥밥을 먹었던 메이저리그 출신 마이크 부시가 최대어로 떠올랐다. 1997년에는 부상으로 빅리그에서 활약하지 못했지만, 1996년 다저스에 콜업된 뒤 12안타 중 4개를 홈런으로 장식할 정도로 파괴력을 자랑한 거포였다.
각 구단은 그동안 수집한 선수 정보와 다른 팀의 동향을 토대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면서 지명 후보를 추려 나갔다.
그런데 트라이아웃이 진행되는 도중 또 예상하지 못한 비상 사태가 발생했다. IMF 여파로 자금난에 휩싸인 쌍방울이 현지에 파견한 스카우트들에게 드래프트를 포기하고 중도 귀국하도록 긴급 조치를 취했다.
당초 쌍방울은 드래프트 순서에서 1라운드 5순위로 배정받았다. 이에 따라 후순위의 삼성, LG, 해태의 지명 순번이 한 칸씩 앞당겨지게 됐다.

◆1순위 현대 예상 밖 지명…조 스트롱 지명에 장내 술렁
11월 14일 세인트 피터스버그의 힐튼호텔 위티드룸에서 KBO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선수 드래프트가 열렸다.
1순위 현대가 누구를 지명하느냐에 따라 각 구단 지명 선수의 밑그림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현대는 최대어로 평가받고 있던 거포 내야수 마이크 부시 대신 투수 조 스트롱을 지명해 장내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스트롱은 시속 150㎞ 안팎(평가전 최고구속은 148㎞)의 강속구가 매력적인 우완투수. 미국 마이너리그를 거쳐 대만리그(TML·타이완 메이저리그)에서도 4시즌 동안 활약해 아시아야구에 친숙한 선수였다.
현대 김재박 감독은 “타격이 좋은 부시와 투수 스트롱을 놓고 밤새 고민을 한 끝에 스트롱을 택했다”고 털어놨다. 마운드 강화를 위해 그동안 마무리투수를 맡고 있던 정명원을 선발로 돌리고 스트롱을 클로저로 활용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2순위의 한화는 현대가 부시를 지명할 경우 내야수 조엘 치멜리스를 1순위로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현대가 스트롱을 호명하자 ‘웬 떡이냐’ 싶어 부시를 지명했다.
롯데는 1라운드에서 투수 빅터 콜(계약 불발)을 호명했고, OB는 내야수 에드가 캐세레스, 삼성은 투수 호세 파라를 선택했다.

◆LG 역사상 1호 외국인선수…LG는 왜 앤더슨을 지명했나?
“타임!”
지명 5순위 구단 쌍방울이 드래프트에 불참하면서 LG는 1라운드에서 6번째로 지명할 수 있게 됐다. 그렇더라도 후순위 지명이다 보니 남아 있는 선수를 놓고 고심할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LG는 1라운드부터 “타임”을 외쳤다. 드래프트 현장을 찾은 천보성 감독과 김용달 코치 등 스태프들은 테이블에서 한동안 의견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이름을 외쳤다.
“LG 트윈스 지명하겠습니다. 투수 마이클 앤더슨!”

이렇게 앤더슨은 LG 트윈스 역사상 1호 외국인선수가 됐다.
앤더슨은 1966년생으로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태어났다. 키 190㎝·몸무게 90㎏의 우완투수. 1988년 신시내티 레즈에 입단해 마이너리그 10년간 77승59패, 평균자책점 3.86을 기록했고, 메이저리그에서는 1993년 3경기에 등판해 평균자책점 18.56(5.1이닝 11자책점)의 성적을 남겼다. 메이저리그 경력이 화려한 선수는 아니었다.
“요즘엔 각 구단마다 외국인선수 데이터가 많이 쌓여 있고, 전문 인력이 많이 배치돼 있지만 당시엔 외국인선수 제도가 처음 도입됐기 때문에 각 구단들이 선수 선발에 어려움이 많았어요. 아무래도 정보도 부족하고 트라이아웃 장소에서 평가전 몇 경기로 선수를 파악하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죠. 단장이 선수 선발까지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는 일이고, 당시 천보성 감독과 코치들이 우리 팀에 필요한 포지션의 선수를 뽑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프런트는 우리 구단이 지명한 선수 계약에만 올인했죠.”
당시 LG 트윈스의 단장으로 플로리다 현장에 함께 갔던 최종준 전 단장의 말이다.

LG가 앤더슨을 지명한 것은 1997시즌 직후 해외 프로야구 진출을 추진한 특급 소방수 이상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였다.
물론 팀 내에는 김용수라는 최고의 소방수 경력을 자랑하는 레전드가 있었다. 하지만 김용수는 1997년부터 완전히 선발로 전환한 상황. 더군다나 1998년이면 만 38세에 접어드는 시점이라 김용수는 루틴을 지키며 체력관리를 할 수 있는 선발을 원하고 있었다.
앤더슨은 시속 140㎞ 중반대의 구속으로 압도적인 구위를 자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내 타자들에게는 생소한 큰 키에서 내려꽂는 각이 매력적이었다. 제구력도 괜찮고 체인지업을 주무기로 하고 있어 새로운 유형의 마무리투수로 적합하다는 판단을 했다.
앤더슨은 1라운드에서 LG에 호명되자 매우 기뻐했다. 그러면서 현지에 파견된 한국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을 소개하며 소감을 밝혔다.
“스포츠가 좋아 야구를 시작했다. 미식축구와 야구를 함께 하다가 야구가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아 야구를 계속하게 됐다. 몸상태는 좋으며 새로운 경험에 대해 신기한 느낌을 갖고 있다.”

◆2R는 주니어 펠릭스 지명…5R까지 계속 타임
2라운드는 최근 3년간 성적 순으로 지명했다. 이에 따라 1라운드에서 마지막 순번에 외야수 숀 헤어를 지명한 해태가 2라운드에서는 1순위로 투수 윌리엄 저브를 선택했다.
그 다음은 LG 차례. 또 “타임”을 외쳤다. 회의를 거듭했다. 1라운드에서 투수를 지명했기에 2라운드에서는 타자를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LG 트윈스 지명하겠습니다. 외야수 주니어 펠릭스!”
펠릭스는 1967년생으로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의 우투양타 외야수. 좌타자가 즐비한 LG에서 좌우로 활용 가능한 스위치히터라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트라이아웃에 참가한 야수 중 빅리그 경험도 풍부한 편이었다.
1985년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한 주니어 펠릭스는 1989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이후 캘리포니아 에인절스(현 LA 에인절스), 플로리다 말린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옮기며 빅리그 무대에서 활약했다. MLB에서만 585경기에 출장해 타율 0.264, 55홈런 280타점을 올렸다. 커리어만 놓고 보면 큰 기대를 품을 수 있는 선수였다.
LG는 3라운드에서는 좌완투수 보브 맥도널드, 4라운드에서는 외야수 론 브라운, 5라운드에서는 마크 밈스를 각각 지명했다. LG는 드래프트 참가팀 중 유일하게 1라운드부터 5라운드까지 매 라운드마다 “타임”을 불렀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한편 2라운드에서 삼성은 좌완투수 스코트 베이커, OB는 우타 거포 타이론 우즈, 롯데는 스위치히터 내야수 덕 브래디, 한화는 내야수 조엘 치멜리스, 현대는 우타 3루수 스코트 쿨바를 각각 지명했다.
OB가 선택한 우즈는 지명 당시만 해도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OB에서도 1순위는 에드가 캐세레스였다.
우즈는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아보지 못한 선수였다. 트라이아웃 당시 파워는 뛰어나지만 정교함 쪽에서 물음표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미래는 알 수 없는 법. 우즈는 1998년 KBO 단일시즌 최다홈런 신기록인 42개의 홈런포를 쏘아올리며 잭팟을 터뜨렸다. 그해 외국인선수 최초로 페넌트레이스 MVP까지 거머쥘 줄은 OB에서도 몰랐다.

LG는 곧바로 지명 선수인 앤더슨, 펠릭스와 협상을 진행했다. 여기서 앤더슨은 상한선인 12만 달러에 흔쾌히 사인했다.
하지만 펠릭스가 문제였다. 상한선을 훨씬 넘는 20만 달러 가까이를 요구하면서 계약이 결렬되고 말았다. LG로선 KBO 8개 구단이 약속한 규정을 어기면서 계약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LG는 차선책으로 3라운드부터 5라운드에 지명한 선수와 계약을 검토해 보기도 했지만 기량 면에서 펠릭스에 미치지 못한다는 판단을 했다. 이에 따라 일단 1998년 외국인선수는 앤더슨 1명만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LG만 그런 건 아니었다. 롯데는 1라운드에 지명한 투수 빅터 콜이 무려 45만 달러를 요구해 내야수 덕 브래디만 계약했다.
해태는 드래프트 직후 그룹이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외국인선수 계약을 전면 포기했지만, 이종범의 일본 진출로 타선에서 어려움을 겪자 5월에 가서야 외야수 숀 헤어와 계약을 하게 됐다.

◆LG 1호 외국인선수 앤더스의 추억
LG 유니폼을 입은 앤더슨의 첫 인상은 매우 좋았다. 2월 3일 입국한 그는 스프링캠프에 합류하기 전 일주일 남짓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놀라운 적응력을 보였다.
간장비빔밥에 김치와 빈대떡을 즐겨먹는 등 한국선수들보다 더 한국적인 식성을 자랑했다. 영어 해설이 있는 한국어 사전을 들고 다니면서 한국어 공부에도 열정을 불태웠다.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등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는 친화력도 발휘해 모두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외국인선수는 실력으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 법. 앤더슨은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를 거치면서 클로서로서 확실한 신뢰를 얻지 못했다. 특히 압도적 구위와 마무리 솜씨를 자랑한 이상훈을 보유했던 LG였기에 비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LG로선 시즌 개막 후 컨디션이 상승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예정대로 앤더슨에게 마무리의 중책을 맡겼다.
시즌 개막 후 출발은 좋았다. 4월 13일 개막 두 번째 경기인 인천 현대전에서 앤더슨은 6-3으로 앞선 9회말 등판해 3타자를 깔끔하게 범타 처리하면서 승리를 지켰다.
LG 구단은 물론 KBO 외국인투수 1호 세이브를 올리며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시즌 두 번째 등판인 4월 17일 대전 한화전에서 1-1 동점인 8회말 2사 후 등판했지만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3-3 동점이던 9회말 2사 2루서 홍원기에게 끝내기 중전안타를 맞으면서 패전의 멍에를 썼다.
그해 성적은 4승7패 21세이브. 그럭저럭 마무리 역할을 수행하기는 했지만 승보다 패가 3개나 더 많았다. 평균자책점 3.56은 마무리투수로서는 아쉬운 수치였다.

◆시즌 중반 합류한 펠릭스…KS 견인하는 역전 3점포
LG는 2라운드 지명 선수인 펠릭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활약하고 있는 멕시칸리그도 계속 예의주시하며 체크했다. 멕시칸리그에서 호성적을 올리고 있었기에 관심을 거둘 수 없었다.
결국 LG는 공격력 강화를 위해 6월 11일 펠릭스와 월봉 1만5000달러의 조건에 사인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펠릭스는 "멕시칸리그가 끝나는 8월초에나 LG에 합류할 수 있다"며 당장 한국으로 갈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LG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결국 펠릭스는 멕시칸리그 남부지구에서 84경기에 출장해 타율 0.329, 16홈런, 70타점을 올린 뒤 8월 중순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데뷔전은 8월 19일 인천 현대전. 여기서 4타수 무안타에 삼진만 2차례 당했다. 이튿날인 8월 20일 인천 현대전에서는 5타수 무안타에 삼진 2개. 2경기에서 9타수 무안타의 극심한 부진이 이어지자 LG로서도 난감할 수밖에 없다.
결국 3번째 경기인 21일 인천 현대전 첫 타석에서 중월 2루타로 짜릿한 손맛을 봤다.
펠릭스는 KBO 첫해 페넌트레이스에서 33경기에 출장해 타율 0.293, 6홈런, 21타점을 기록했다. 압도적인 성적은 아니지만 시즌 후반 합류를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타선에 윤활율 역할을 하는 쏠쏠한 활약이었다.
무엇보다 삼성과 치른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인상 깊은 홈런을 날려 재계약에 성공했다.
3-4로 뒤지던 7회말 1사 1,2루 상황. 스위치타자로서 삼성 좌완 스코트 베이커를 상대하기 위해 우타석에 들어선 그는 극적인 역전 3점홈런을 터뜨렸다. LG는 이 경기를 7-5로 잡으면서 플레오프 3승1패 전적으로 2년 연속 한국시리즈 무대에 올랐다.

◆족적은 남기지 못했지만…기억해야 할 최초의 외국인선수들
LG 트윈스 최초의 외국인선수인 앤더슨은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1년 만에 LG를 떠났다. 1999년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공포의 외인구단’ 쌍방울 레이더스로 이적해 선발투수로 변신했지만2승9패, 평균자책점 6.75를 기록했다. LG 시절보다 못한 성적. 결국 KBO리그에 온 지 2년 만에 작별을 고했다.
오히려 뒤늦게 팀에 합류한 펠릭스는 LG와 재계약에 성공했다. 연봉 11만 달러에 인센티브 4만 달러 등 총 15만 달러의 조건에 사인했다.
짧은 기간 임팩트를 보여준 펠릭스였기에 이듬해 활약을 기대했다. 스스로도 "풀타임으로 활약할 경우 첫해 OB 타이론 우즈 못지 않은 성적을 올릴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1999년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겨울 내내 몸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살이 찌고 둔해진 몸으로 스프링캠프에 참가했고, 시즌 성적도 기대치를 한참 밑돌았다. 97경기에 출장해 타율 0.253, 13홈런 49타점에 그쳤다. 결국 보따리를 쌌다.
과거에는 외국인선수를 두고 '용병'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용병(傭兵)의 사전적 의미는 '지원한 사람에게 봉급을 주어 고용한 병사'를 뜻한다.
국내 선수들과 차별되는 이방인. 그런 점에서 보면 앤더슨은 마무리투수로서, 펠릭스는 주포로서 KBO리그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흘러간 '용병'이었는지 모른다. 옆집 OB 베어스의 타이론 우즈와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LG 트윈스 역사에 남아 있는 1호와 2호 외국인선수였다는 사실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한 번쯤은 되새겨 보고 기억해야 할 이름일지 모른다.
외국인선수 제도가 도입된 지도 올해로 29년째. LG는 2026년 현재 오스틴 딘과 요니 치리노스, 앤더스 톨허스트, 라클란 웰스 등 4명의 외국인선수를 보유하고 있다. 1998년 1호 마이클 앤더슨을 시작으로 2026년 라클란 웰스까지 KBO에 정식선수로 등록한 LG 외국인선수는 총 63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한편 LG는 1998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잠실 라이벌 OB와 최후의 주사위 던지기를 하게 된다.
대졸 최대어로 평가받는 내야수 김동주(고려대)와 연세대 포수 조인성을 획득하기 위한 마지막 작업이었다.
[엘팬알백] <54편>에서 계속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