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세계 그룹은 한국 유통산업의 얼굴이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의 막내딸 이명희 회장이 1979년 경영에 입문한 신세계백화점은 최고급 럭셔리 백화점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후 건설된 이마트는 국내 대형마트 시장의 절대강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이 거대한 유통 그룹은 예상치 못한 내부 위기에 직면했다. 2023년 이마트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고, 온라인 사업 SSG닷컴은 연달아 손실을 내고 있으며, 신세계백화점까지 실적 성장이 정체 상태에 빠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82세의 이명희 총괄회장이 남매 경영 체제를 구축한 이후에도 그룹 내 실질적인 파워는 여전히 손에 쥐고 있다는 점이다. 2023년 대대적인 임원 인사에서 기존 리더십이 집중적으로 교체되면서 이명희 회장의 복귀설이 부각되었다.

>> 쿠팡에 패배한 온라인 전쟁
신세계 그룹이 마주친 첫 번째 위기는 이커머스 시장에서의 패배였다. 2021년 그룹은 이베이 코리아를 인수하여 지마켓과 옥션, 스마일 페이를 확보했다. 당시 목표는 자사 온라인 플랫폼 SSG닷컴과 연계하여 국내 이커머스 시장에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야심찬 계획은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
강력한 최저가 전략과 당일 배송으로 시장을 장악한 쿠팡 앞에서 신세계 그룹의 온라인 사업은 무릎을 꿇었다. 2024년에는 알리바바와 테무 같은 해외 이커머스 플랫폼까지 가세하며 경쟁이 심화되었다. SSG닷컴은 2024년 상반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2.5% 감소했으며, 491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지마켓과 옥션도 여전히 적자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부동산 경기 침체의 여파
신세계 그룹의 고통을 가중시킨 두 번째 요인은 부동산 경기 침체였다. 그룹의 자회사인 신세계건설은 2023년 공사 원가 상승과 미분양으로 인해 1,878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 대비 1,757억 원 증가한 손실액으로, 신세계건설의 무리한 투자 전략이 빛을 잃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마트의 적자 전환은 이 신세계건설의 부실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연결 기준으로는 사상 최대 매출 29조 4,722억 원을 기록했지만, 자회사의 손실로 인해 469억 원의 적자 전환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카피캣 논란으로 얼룩진 혁신
신세계 그룹, 특히 정용진 부회장의 신사업 다각화 전략은 "카피캣"이라는 오명을 안게 되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출시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자주(JAJU)'는 일본의 프리미엄 브랜드 '무인양품(MUJI)'의 디자인을 거의 그대로 모방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특히 종이 봉투 쇼핑백의 디자인까지 동일하다는 비판이 거세다.
신세계푸드의 버거플랜트는 미국의 셰이크쉑을 연상시키며, 호텔 비즈니스인 '레스케이프'도 외국 호텔들의 컨셉을 차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혁신이라는 명목 아래 이루어진 신사업들이 결국 모방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신세계 그룹의 창의성을 의심케 한다.

>> 남매 경영의 명암
신세계 그룹은 2011년 신세계와 이마트로 분할된 이후 정용진 회장(1968년생, 57세)과 정유경 회장(1972년생, 52세)의 "남매 경영" 체제로 전환했다. 정용진 회장은 이마트를 중심으로 한 유통 사업을 이끌었고, 정유경 회장은 신세계백화점을 총괄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정용진 회장이 당시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승진한 반면, 정유경 회장은 2024년 10월 총괄사장에서 회장으로 승진했다는 것이다. 이는 백화점 부문의 경영 성과를 이명희 회장이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정유경 회장은 취임 후 '랜드마크 전략'으로 강남점을 3년 연속 3조 원 매출을 달성하게 했고, 센텀시티점도 비수도권 최초로 2조 원 고지를 넘겼다.
정유경 회장은 백화점을 "쇼핑 공간"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생활문화 복합공간으로 재정의했다. 강남점의 국내 최대 규모 식품관은 리뉴얼 후 주말에 하루 평균 1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온라인 시장에서의 패배를 오프라인의 진화로 보상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반면 정용진 회장이 주도한 온라인 사업 전략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SSG닷컴의 적자는 여전하고, 거액으로 인수한 이베이 코리아 자산들도 기대만큼의 수익성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정용진 회장도 2025년 신년사에서 "과거부터 돌아본 위기설"을 언급하며 내재적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철의 여인이 다시 일어선다
이명희 회장은 "은둔의 경영자"로 알려져 있다. 1979년 경영에 입문하기 전 12년간 전업주부로 생활했던 그녀는, 경영 세계에 입문한 후 신세계백화점을 혁신했다. 2007년 신세계백화점 본점 신관 개점 이후 언론 노출과 인터뷰가 거의 없었다. 공식 석상에 나타나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승계 이후에는 경영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2023년의 대대적인 임원 인사는 이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백화점과 이마트 등 주요 계열사의 대표 40%가 교체되는 전대미문의 인사가 이루어졌으며, 이를 진두지휘한 인물이 이명희 회장이라는 후문이 돌았다. 관계자들은 "이명희 회장이 그룹 상황에 격노했다"고 전했다.
이명희 회장이 신세계를 일군 리더십은 뚜렷하다. 1979년 경영에 입문한 그녀는 최초에는 백화점 경영에 뜻이 없었다. 그러나 한 번 결심하자 백화점의 현대화와 혁신을 주도했다. 신세계를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사라진다"는 경영 철학으로 이끌며 국내 백화점의 표본으로 만들었다. 전문경영진을 신뢰하고 위임하는 경영 방식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82세의 이명희 회장은 정용진, 정유경 남매에게 권력을 이양했으면서도 여전히 그룹 내 최고 권력자로 작용하고 있다. 2025년 1월 정용진 회장이 이명희 회장의 이마트 지분 10%를 전량 매입하기로 발표한 것은 계열 분리를 향한 움직임이지만, 이마저도 최종적인 구도를 정하는 데 있어 이명희 회장의 의사가 반영되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 전략적 대응: 재무 건전성 강화
신세계 그룹은 2025년 정기 임원 인사와 조직개편을 통해 변화하는 신호를 보냈다. 계열사 전반에 재무 및 법무 중심의 지원조직이 대거 신설되었다. 이마트는 지원본부를 재무본부와 지원본부로 재편했고, 신세계센트럴과 신세계라이브쇼핑도 지원본부를 새로 꾸렸다.
이 같은 조직개편은 투자 확장 과정에서 재무 관리를 강화하려는 포석으로 평가된다. 내수 시장이 어려운 상황에서 과감한 투자와 사업 확장을 계속하되, 재무 구조를 탄탄하게 하겠다는 전략인 것이다. 또한 이번 정기 인사는 정용진, 정유경 남매의 독립 경영 체제를 본격화하는 신호로도 읽힌다.
>> 위기 속 성과,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
2024년 신세계 그룹의 연결 기준 총매출은 11조 4,974억 원으로 전년 대비 3.3%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4,795억 원으로 25.1% 감소했다. 수치만 보면 외형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수익성은 악화된 상황이다. 통상임금 관련 대법원 판결의 추정 부담금 260억 원이 일회성으로 반영되었지만, 근본적인 구조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같은 악화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예측된다.
신세계백화점은 역대 최대 매출 7조 2,435억 원을 기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강남점과 센텀시티점의 호조와 식품관 중심의 공간 혁신이 주효했다. 그러나 이마트의 적자 전환은 여전히 신세계 그룹의 발목을 잡고 있다.
신세계 그룹의 위기는 한국 유통산업 전체가 맞닥뜨린 구조적 변화의 축소판이다. 온라인 시장에서의 선제적 리더십 부재, 부동산 시장의 급변, 소비심리의 위축은 대형 유통사들의 공통된 과제다. 신세계가 이를 어떻게 극복해낼 것인지는 단순한 기업 문제를 넘어 한국 유통산업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지점이 될 것이다. 이명희 회장의 경영 수완과 남매 리더십의 시너지가 어떻게 발휘될 것인지, 그리고 오프라인 강점을 온라인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지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Copyright © 저작권 보호를 받는 본 콘텐츠는 카카오의 운영지침을 준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