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거부권 행사도 못하는데···초유의 ‘野 단독 예산’ 초읽기
李 "與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감액 수정안 제출 단독처리 압박
세입·출 원칙 훼손···적법성 논란
취임 8개월은 文정권 예산철학 반영
"정부·與, 민주당에 얹혀가는 기형"
총선예산엔 공감···막판 합의 전망도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내년도 예산안의 단독 처리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민주당은 예산안 법정 시한인 12월 2일을 넘기더라도 정기국회가 끝나는 다음 달 9일까지는 예산안을 처리하겠다며 여당을 압박하고 있다. 단독 처리될 경우 윤석열 정부의 국정철학이 반영된 첫 예산은 169석의 민주당 앞에 힘도 써보지 못하고 휴지 조각이 될 수 있다. 본회의를 통과한 예산안은 대통령의 거부권(재의요구권)도 인정되지 않아 현 정부는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민주당 예산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지난 29일 의원총회에서 “여당이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며 “(예산 합의가) 안 되면 준예산으로 가자는 태도를 보이는데 결코 용인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 대표는 전날에도 “경찰국 예산이나 초부자 감세에 동의할 수 없다”면서 “필요하다면 우리가 가진 권한을 행사해 ‘민주당 수정안’을 선택하는 것도 하나의 안”이라며 단독 처리 가능성을 내비쳤다. 민주당이 여당과 예산안 합의가 안 되면 정부의 동의가 필요한 증액은 빼고 ‘감액 수정안’을 제출해 단독으로 본회의에서 처리할 수 있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실제 통과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헌정 사상 유례가 없고 감액 예산이더라도 세입·세출 원칙을 훼손해 ‘정부 편성권’을 침해하는 적법성 논란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당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원내대책회의에서 민주당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안을 제출하기로 한 것과 관련해 “이걸 하겠다는 말은 결국 법정 예산 처리 기한을 지키지 않겠다는 선포나 다름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정치권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도 모자랄 판에 불과 3일 전 합의해놓은 예산 처리 후 국정조사를 깼다”며 야당에 책임을 물었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야당의 단독 예산 처리는)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데 상대를 악마화하는 두 정당이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30일 정치권에 따르면 민주당은 예산안 통과를 전제로 한 국정조사가 시작된 상황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제출하겠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예산안 단독 처리까지 예고하면서 정국 구도를 민주당 우위에 놓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이재명 사법 리스크’로 힘을 쓰지 못했던 상황을 단번에 역전시킨 셈이다.
국민의힘으로서는 주도권을 빼앗기면 윤석열 정부 첫 예산마저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철학이 녹아든 첫 예산이 야당 예산안으로 대체될 경우 윤석열 대통령은 ‘민주당 가계부’로 임기의 3분의 1을 보내야 하는 초유의 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野 예산으로 尹 정부 국정 운영=윤석열 정부는 임기 초반 8개월을 문재인 정부 예산으로 운영해야 했다. 3월 대선에서 승리한 뒤 5월 임기를 시작한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의 예산안으로 살림살이를 꾸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 120개 국정과제를 반영해 법인세 인하 등의 세제개편안을 포함한 639조 원의 첫 예산안을 마련했지만 높은 여소야대의 벽을 실감하고 있다.
민주당은 당장 “국민의힘이 예산 파업을 하고 있다(박홍근 원내대표)”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박 원내대표는 29일 “민주당 단독이라도 예산 심사에 임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국민의힘은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로부터 국민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이 장관 해임건의안과 예산안을 연계한 무리수를 두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169석의 의석수 앞에 박 원내대표의 공언대로 민주당 예산안의 단독 처리가 불가능하지 않다. 민주당이 12월 2일 본회의에 자동 부의되는 정부 예산안 원안을 부결시키고 민주당이 단독으로 마련한 수정안을 올려 의결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되면 윤석열 정부는 초기 20개월, 즉 임기의 3분의 1을 민주당이 짜 놓은 살림살이에 맞춰 국정을 계속 운영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 인수위 전문위원으로 활동한 최수영 정치평론가는 “민주당 가계부로 (임기) 3분의 1을 얹혀가는 것은 기형적인 모습으로 의회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것”이라며 “결국 윤석열 정부의 국정철학이 좌초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이재명표 예산도 포기하나=헌법에 의해 국회는 국가의 예산안을 심의·확정할 수 있지만 정부 동의 없이 지출 예산 금액을 늘리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각 상임위와 예결위에서 감액 심사를 해도 증액 관련 논의는 정부와 함께해야 한다. 민주당이 단독으로 예산안을 다루더라도 감액 심사만 가능하고 증액 심사는 불가능하다.
앞서 민주당은 예산 심사를 앞두고 초부자 감세에 반대하면서 대통령실 등 권력기관 예산을 대폭 감액하겠다는 심사 방향을 세웠다. 세부적으로 △경찰국 등 권력기관 예산 △대통령실 이전 관련 예산 △공공분양주택 등 사업 설계가 부실한 예산 △불요불급한 홍보 예산 △기후위기 역행 사업 예산 △집행이 불가능한 예산 등을 감액 대상으로 꼽았다. 감액 규모만 5조 원이 넘는다. 감액된 해당 예산안만 단독 통과시키면 된다는 구상이다.
문제는 ‘이재명표’ 예산으로 기초연금 1조 600억 원, 지역화폐 예산 7000억 원 등 증액 예산도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이른바 ‘꼼수' 법안 처리까지 고려하고 있다. 기초연금법의 경우 시행일을 내년 중으로 명시한 뒤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식이다. 증액안을 야당 예산안에 반영할 수는 없지만 이재명표 예산이 필요한 법안을 통과시키는 우회 전략이다. 김만흠 전 국회입법조사처장은 “결국 예비비 편성이나 추경 요청 등 다양한 방법들이 동원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나라살림도 정쟁 굴레=전문가들은 국가의 나라살림이 정쟁의 중심에 서게 된 것에 대해 “안 좋은 선례”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거대 야당이 단독 수정안 처리 카드를 꺼내 들어 새로운 뇌관을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여기에 정부 여당도 ‘준예산’ 가능성을 운운하며 예산안을 볼모로 한 정쟁을 자초했다.
다만 이번 예산안이 2024년 열리는 총선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마지막 예산인 만큼 결국에는 여야가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예산 심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돼야 ‘쪽지 예산’이라 불리는 지역 예산 끼워 넣기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예산안 단독 통과는 야당에도 부담이지만 여당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분석했다.
예산안 통과 법정 기한이 3일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와 기획재정위원회 모두 교착상태에 빠졌다. 예결특위는 예산안 심사에서 세출, 기재위는 세입 논의를 담당하는 상임위원회다. 예결위는 야당의 ‘상임위 단독 의결’에 여당이 회의 불출석으로 응수하면서 파행을 겪었다. 기재위는 더불어민주당이 사회적경제3법의 상정을 요구하면서 여야가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예산 심사 마무리 작업에 착수해야 할 시점에 여야의 입장이 평행선만 달리고 있어 법정 기한 내 예산 심사는 물 건너 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야는 29일 예산 심사 지연의 책임을 서로 전가하며 날을 세우고 있다.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민주당이 윤석열 정부의 대선 공약이나 국정과제 관련 예산에 대해 무도한 칼질을 벌이고 있다”며 “예산안 논의를 막는 쪽은 다수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이라고 강조했다. 예결위 위원인 박정 민주당 의원은 기자회견을 열고 “원만하게 진행되던 예산 심사가 국민의힘의 실력 행사로 파행을 맞았다”며 “여당이 예산 심사를 보이콧하다니 낯설고 황당할 뿐”이라고 맞섰다.
예결위 심사가 난항을 겪는 것은 국토교통위원회와 정무위원회에서 민주당이 국정과제 예산을 대폭 삭감한 예산안을 일방 처리해서다. 예결위는 25일 감액 심사를 마칠 예정이었으나 국토위·정무위 예산이 문제가 되면서 파행을 빚었다. 여야는 28일 다시 논의 테이블에 마주 앉았으나 정회만 반복할 뿐 이견을 조율하지 못했다. 여기에 민주당이 29일 국회운영위 예산소위에서도 대통령실 예산을 44억 원 감액한 뒤 단독 의결하면서 여야의 갈등은 더 깊어진 상황이다. 이에 대해 여당은 “각 상임위 예산안은 정부 동의 없이 의결된 것”이라며 “정부 원안을 두고 심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야당은 “절차적 문제 없이 통과된 예산”이라고 받아치며 대치하고 있다.
세출뿐 아니라 세입 협상도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기재위 조세소위에서 여야가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어서다. 예산 심사는 기재위에서 세법 심사를 마치면 그에 맞춰 내년도 세입액이 확정되고 이를 반영해 예결위에서 세출을 최종 조절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세입 심사를 마치지 못하면 예결위에서 여야가 극적 타협을 도출해도 예산 심사를 마칠 수 없는 셈이다.
여야는 금융투자소득세·법인세·상속세 등 정부의 세제개편안 주요 내용마다 입장을 달리하며 대치하고 있다. 여기에 야당이 ‘사회적경제3법’을 경재재정소위에 상정해 논의하자고 주장하면서 협상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 ‘예산부수법안’으로 지정돼야 할 세법 심사의 마감 기한은 30일이어서 사실상 국회법에 규정된 기한 내 심사를 마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이 내년 정부 예산안에 대대적 칼질을 예고했지만 집권 여당은 태평한 분위기다. “총선을 앞두고 지역 예산을 증액하려면 당정의 협조가 필요하다”며 합의 처리에 무게를 싣고 있다. 민주당의 예산 삭감 주장에 벌써 추가경정예산안 우려가 나오지만 여당이 낙관론에 기대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29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민의힘은 야당이 정부 예산안을 삭감할 때마다 여론전에 매달릴 뿐 묘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토위·정무위에서 단독 처리된 예산안이 예결위에 상정되자 이철규 국민의힘 의원은 기자회견을 열고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없다”며 재심을 요구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상임위의 정부안 삭감은 있어왔던 일”이라며 거부했고 결국 여당은 무기력하게 협상 테이블로 되돌아왔다.
정기국회 종료가 10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여당은 점점 수세에 몰리는 모양새다. 당초 국민의힘 지도부는 10·29 참사 관련 국정조사를 수용해 예산 정국에서 협상력을 높일 방침이었다. 하지만 야당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강행하자 여당 내부에서는 ‘국정조사 보이콧’ 주장이 흘러나오며 합의 결렬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부 예산안을 지켜낼 유일한 전략이 불투명해졌지만 여당은 ‘플랜B’ 찾기에 심각한 분위기도 없다. 외려 ‘민주당도 여당의 협조가 필요하다’며 합의 처리를 확신하는 분위기마저 감지된다. 내년 예산안이 2024년 총선과 직결된 예산인 만큼 ‘지역구 예산’을 추가로 편성해야 하는데 정부의 동의 없이는 증액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서다.
이재명 대표가 사활을 걸겠다고 예고한 공공임대주택과 지역화폐 예산 증액도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당은 내다본다. 한 여당 지도부 인사는 “국정조사 이외 예산안에 대한 협상 카드는 아직 논의 전”이라며 “예산 삭감안을 단독 처리하는 것은 민주당에도 부담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여당은 협치를 외치고 있지만 정부와 야당 사이의 가교 역할에는 손을 놓고 있는 모습도 포착된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예산 정국을 풀려면 대통령과 야당이 만나야 한다”며 “입장 차만 확인해서는 안 되고 야당의 요구를 듣고 국정과제도 설명하며 협조를 받아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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