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여제'의 귀환은 예고 없이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이루어졌다. 2026년 5월 20일, 경기도 고양 킨텍스 PBA 스타디움. 우리금융캐피탈 LPBA 챔피언십 16강전 무대에서 김가영(하나카드)은 김다희를 세트스코어 3-0으로 완파하며 8강에 이름을 올렸다. 스코어만 보면 여유로운 완승이지만, 내용은 그보다 훨씬 치열했다. 그리고 8강에서 기다리는 상대는, 2년 3개월 전 이 자리에서 눈물을 삼켰던 이유주다. 당구 팬이라면 이 대진표 앞에서 심장이 조금쯤 빨리 뛸 수밖에 없다.

김가영이 프로당구 무대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설명이 필요 없다. LPBA(여자프로당구) 출범 이후 가장 많은 우승 트로피를 쌓아온 선수로, 그녀의 이름 앞에 붙는 '당구여제'라는 수식어는 과장이 아닌 성적표의 요약이다. 특히 시즌 개막전에서의 강세는 두드러진다. 직전 시즌 개막전에서도 정상을 밟은 김가영은 이번 대회에서 2연패라는 진귀한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이번 대회가 열리는 고양 킨텍스 PBA 스타디움은 PBA·LPBA 투어의 핵심 거점이다. 관중석과 조명, 테이블 배치까지 선수의 집중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 공간에서 김가영은 이미 여러 차례 강자의 면모를 증명한 바 있다. 그런 만큼 이번 16강전 역시 그녀에게 낯선 무대가 아니었다.

16강 상대는 김다희였다. 김다희는 투어에서 꾸준히 경쟁력을 보여온 선수로,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실제로 경기는 초반부터 팽팽하게 흘렀다. 김가영이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구도가 아니라, 두 선수가 이닝마다 밀고 당기는 집중력 싸움이 전개됐다.
한편 이번 대회 16강에서는 김가영 외에도 굵직한 이름들이 동시에 경기를 치렀다. 이유주가 이지연1을 3-0으로 꺾으며 깜짝 8강 진출을 확정했고, 용현지는 강지은·권발해·한슬기를 연파하는 쾌조의 흐름을 이어갔다. 히가시우치 나쓰미 역시 접전 끝에 8강에 합류하며 외국인 선수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결과만 놓고 보면 3-0 완봉이지만, 숫자 뒤에는 세 개의 전혀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다.

1세트: 스코어는 7-7까지 팽팽했다. 김가영은 앞서가다가도 김다희에게 따라잡히는 상황을 반복했다. 그러나 9이닝째, 뱅크샷으로 남은 점수를 일괄 처리하며 11-8 세트 승리를 낚아챘다. 집중력이 극대화되는 마지막 이닝에서의 결정력, 이것이 김가영과 여타 선수를 가르는 첫 번째 차이였다.
2세트: 패턴은 반복됐다. 8-8 동점 상황까지 김다희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9이닝째 승부처에서 김가영이 뱅크샷을 꽂아넣으며 11-7로 두 번째 세트를 가져갔다. 두 세트 연속으로 동점 상황을 뒤집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압박 상황에서 발현되는 경험치의 산물이다.
3세트: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앞선 두 세트에서 승부처마다 뒤집힌 김다희는 심리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김가영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2이닝째 하이런 6점 폭발로 단번에 흐름을 장악했고, 3이닝 만에 10-3까지 격차를 벌렸다. 이후 6이닝째 남은 1점을 처리하며 11-3, 세트스코어 3-0 완승으로 경기를 매조졌다.

수치로 본 격차도 명확하다. 김가영의 애버리지 1.375, 하이런 6점. 김다희는 애버리지 0.818, 하이런 4점. 수치상 약 1.7배에 달하는 효율 차이가 3세트의 압도적 내용으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경기에서 주목할 포인트는 단순히 '김가영이 이겼다'가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겼느냐가 더 중요하다.
1세트와 2세트에서 김가영은 7-7, 8-8이라는 동점 상황을 각각 한 번씩 허용했다. 상대에게 주도권을 넘긴 건 아니었지만, 완전히 억누르지도 못한 흐름이었다. 그러나 매번 결정적 순간에 뱅크샷이라는 고난도 기술로 한 번에 국면을 정리했다. 뱅크샷은 쿠션(벽)을 이용해 공을 간접 타격하는 방식으로, 성공률이 낮은 만큼 선택 자체가 자신감의 표출이다. 김가영은 이 선택을 두 세트 연속으로 해냈다.
3세트의 하이런 6점도 마찬가지다. 압박을 풀어내는 가장 빠른 방법은 연속 득점이다. 김가영은 2이닝이라는 초반에 이미 6점을 쌓으며 상대의 심리적 저항 의지를 꺾었다. 이것이 단순한 '실력 차이'가 아니라, 경기를 읽고 타이밍에 맞게 집중력을 폭발시키는 능력—흔히 '클러치 능력'이라 부르는 자질이다.

그렇다면 8강 대진표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김가영의 상대가 된 이유주는 단순한 8강 진출자가 아니다. 2023-24시즌 개막전에서 이 두 선수는 8강에서 이미 맞붙은 적이 있다. 그때 이유주는 0-3으로 패했고, 이후 3시즌 동안 32강 이상의 성적을 내지 못하며 긴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당구 팬 커뮤니티 사이에서는 당시 그 패배가 이유주에게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남겼다는 분석이 꾸준히 나왔다.
그런 이유주가 3시즌 만에 8강 무대를 밟았다. 그것도 이지연1을 3-0으로 완파하는 자신감 넘치는 내용으로. 슬럼프를 딛고 돌아온 선수가 자신을 무너뜨렸던 선수와 다시 같은 무대에 서는 것—스포츠가 만들어내는 드라마 중에서도 이만한 이야깃거리는 흔치 않다.

이 대진이 지금 더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한 실력 대결이 아니라, 한 선수의 재기 서사와 다른 선수의 왕조 유지가 한 테이블에서 충돌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팬들 입장에서는 어느 쪽을 응원하든 감정 이입할 수 있는 구도다. 김가영이 개막전 2연패를 향해 나아가는 동시에, 이유주가 2년 넘게 묵혀온 설욕을 이루는 반전이 펼쳐질 수도 있다. LPBA가 시즌 초반부터 이런 매치업을 만들어낸 것 자체가 흥행 측면에서도 큰 수확이다.
당구 테이블 위에서 2년 3개월의 시간이 다시 소환됐다. 김가영은 이 자리에서 또 한 번 여제의 위엄을 증명할 것인가, 아니면 이유주의 긴 기다림이 마침내 보상받는 날이 올 것인가.
Copyright © 구독과 좋아요는 콘텐츠 제작에 큰 힘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