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미터 숲 속에서 길을 잃다
출구 없는 길, 알고 보면 출구 있는 재미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비밀정원

처음 들어섰을 땐 설렘이, 조금 지나면 당황이, 끝에 다다르면 짜릿한 환희가 밀려든다. 3미터가 넘는 나무들이 빼곡히 둘러선 미로 속에서 길을 찾는 건 단순한 놀이 그 이상이다.
정신을 맑게 하는 나무 향기와 미세하게 울리는 천연 화산석의 감촉까지, 김녕미로공원은 미로를 걷는 순간순간마다 감각을 깨운다.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역사와 상징, 자연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철학까지 오롯이 담긴 그 길 위에서 방문자들은 ‘길을 잃음’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선물받는다.
미국인 교수가 만든 한국 최초의 미로
김녕미로공원이 세워지기까지의 여정은 한 외국인의 집념에서 시작됐다.
1983년, 제주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미국인 더스틴(F.H. Dustin)은 세계적인 미로 디자이너인 에이드리언 피셔와 손잡고 제주에 새로운 개념의 공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국제 우편과 전화로 설계 도면을 주고받으며 3년에 걸쳐 디자인을 완성했고, 직접 랠란디 나무를 심고 8년간 공을 들여 나무를 가꾸었다. 그렇게 1995년, 제주도 김녕에 우리나라 최초의 미로공원이 문을 열었다.
당시만 해도 동북아시아에서 전통 미로공원은 흔치 않았다. 지금은 제주도 곳곳에 14개 이상의 미로가 들어섰지만, 김녕미로공원은 여전히 가장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원조’로서의 위상을 지키고 있다.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4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았다는 기록만 봐도, 그 매력은 쉽게 바래지 않는다.
숲을 닮은 미로, 고양이와 동심이 함께하는 곳
이곳은 단순한 미로 공원이 아니다. 길을 잃는 재미뿐 아니라, 오감을 자극하는 환경이 곳곳에 펼쳐진다.
수벽을 이루는 랠란디 나무는 사계절 내내 푸르며 특유의 향기로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집중력을 높여준다. 바닥에 깔린 송이석은 오염된 공기를 정화하고 혈액 순환을 도와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뿐만 아니라 공원 전역엔 50마리 이상의 고양이들이 자유롭게 거닐며, 어린이 방문객에게는 특별한 추억을 안긴다. 공원 조성 당시부터 숲과 마을을 오가던 고양이들을 인위적으로 제거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두었기에 가능했던 풍경이다.
이제는 ‘고양이 공원’으로도 알려진 김녕미로공원은, 미로 속에서 길을 찾는 재미에 더해 생명과 공존하는 따뜻한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와 발 자전거 경기장도 운영 중이다. 미로 한켠에 마련된 고양이 성 근처의 경기장에서는 안내판을 참고해 키에 맞는 자전거를 골라 달릴 수 있으며, 아이들은 물론 부모들도 동심으로 돌아가는 추억을 만들 수 있다.
제주의 상징을 품은 살아있는 미로
김녕미로공원의 미로는 단순한 길이 아니라, 제주 자체를 형상화한 상징물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제주도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음양 문양과 제주 선인들이 만들었던 밭담 형상, 하멜이 타고 온 스패로호크(Sparrow-hawk) 배의 모형까지 포함되어 있다. 미로를 탐험하는 행위는 곧 제주 역사를 따라 걷는 여행이 되는 셈이다.
‘제주 역사의 기행’이라는 테마는 설계자 에이드리언 피셔의 손끝에서 구현됐다. 더스틴 교수는 이후에도 김녕미로공원의 수익 일부를 제주대학교와 지역사회에 환원하며, 단순한 관광 명소가 아닌 지역과 상생하는 공간으로의 의미를 이어가고 있다.
출구 없는 삶처럼 느껴질 때, 정해진 답이 없는 길을 걷고 싶을 때, 김녕미로공원은 그 답을 제공한다.
답답한 일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고요한 미로를 헤매다 보면 어느 순간 작은 종소리와 함께 뿌듯한 성취감이 마음 깊숙이 울려온다. 그것이야말로 김녕미로공원이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이유다.
